이런 저런 사연으로 갈곳을 잃어 방황하는 노숙자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는 무료급식소에서는 초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그 어느 곳보다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지난 29일 오후 7시 대구시 동구 신천동 동대구 지하철역 광장. 어둠이 내려앉은 이곳에 구수한 국밥냄새가 퍼지기 시작하자 이곳저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있던 100여명의 노숙자들과 홀몸 노인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줄을 서기 시작했다.
'맑고 향기롭게 대구 모임'소속 무료급식사업 봉사자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준비하는 '사랑의 무료급식소'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지만 자원봉사자들이 퍼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끈한 국밥에 마음까지 따뜻해진 노숙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다.
"하루종일 무료 급식시간만 기다렸다"는 이진상(50.가명)씨는 "이렇게 인정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노숙자들은 늘 행복하다"며 함박 웃음을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자원봉사자들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이곳에 '사랑의 무료급식소'가 생긴 것은 지난 99년 2월 '맑고 향기롭게 대구모임' 소속 무료급식봉사단이 부처님의 사랑을 직접 전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마다 노숙자들의 저녁식사 제공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지난 96년 이 모임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주로 팔공산 자연보호활동, 새집 달아주기, 동물 모이주기 등 동물사랑 캠페인과 골프장 반대운동, 환경생태기행 등을 주로 펼치는 환경캠페인을 펼쳤는데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서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맑고 향기롭게 대구 모임' 고경순 회장은 "IMF이후 노숙자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끼니를 굶는 사람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며 "그 중에는 당장 밥을 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현재 급식소를 운영하는 날에는 50여명의 회원이 음식물 조리와 배식, 설거지 일을 하며 조리 일을 돕기위해 주부 봉사 회원 10여명이 나서고 있다.
비록 급식시간은 30분이면 끝나지만 식사 준비량이 많아 밥상차리는 일은 하루종일 품이 드는 중노동. 오전 10시부터 장을 보기 시작해 오후 2시부터 약 4시간 동안 음식을 조리하고 장만하는 강행군이 시작된다.
오후 7시쯤 배식장소인 동대구 지하철 역 광장으로 음식을 이동, 배식을 한후 오후 8시쯤 설거지를 시작한다. 정작 봉사자들은 설거지가 끝난 밤 10시가 다돼서야 간단한 식사로 요기를 채운다.
"무료급식이 시작될 때면 우리도 노숙자 못지 않게 배가 고프다"는 황태순(30.대구 평리동)씨는 "그래도 불쌍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 동참하면서 큰 보람을 느끼게 됐다"며 활짝 웃었다.
이 모임에서 주방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유호(31)씨는 "인터넷이나 요리책을 샅샅이 뒤져 식단을 짜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한다"며 "주방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 서툰 점이 많지만 정성만은 가득 담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간 노숙자는 연 인원 5천여명.자원봉사자도 지금까지 수백여명에 이른다. 5년째 꾸준히 급식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홍종근(31)씨는 "그동안 일부 복지단체에서 노인들을 위한 급식사업을 펼쳐왔지만 노숙자들이나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한 무료 급식사업은 드물었다"며 뿌듯해 했다.
한번 급식을 위해 들어가는 돈은 대략 25만원. 외부 후원이 없는 봉사단체로서는 만만찮은 돈이지만 자원봉사자들은 직접 회비(1인당 3천원~2만원)를 모아 충당해왔다
또 재정이 어려울 때는 1천여명의 '맑고 향기롭게' 대구지회 회원들과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갖다준 쌀과 김치. 채소류 등 밑반찬으로 고비를 넘겨왔다.
고 회장은 "IMF 때는 실직자들이 몰려와 매주 200여명에게 식사를 공급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며 "익명의 후원자들과 동대구 지하철역원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운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들이 하는 일은 무료급식봉사만은 아니다. 날씨가 쌀쌀해져 생활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의 바깥출입이 어려워지면 자원봉사자들이 홀몸노인을 위한 밑반찬 배달 봉사를 시작한다. 이들의 보살핌을 받는 100여명의 홀몸노인들에게는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의 불씨인 셈.
또 매달 첫 번째 일요일이면 정신지체 부모 아래서 제대로 양육받지 못하고 있는 노막선 5남매의 집을 어김없이 방문해 청소.빨래.가구교체.아이들 목욕 등을 해주며 이들 가족을 보살펴 준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는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소리봉사'에 나서 책을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든 '녹음도서'를 무료배포하고 있다. 이밖에 저소득층 가정 자녀를 위한 무료학습지도, 결식아동 돕기 거리공연, 수재민 돕기 자원봉사 등을 통해 부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들어 자원봉사자 수가 줄고 경기침체로 인해 봉사활동하기가 '많이 힘들다'고 한다. 사무국장 이유호(31)씨는 "무료급식사업이 널리 알려지면서 '내가 아니라도 남들이 돕겠지'라는 생각에 봉사자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며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이러한 노력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민지(25)씨는 "최근 경제가 어려워 반찬가짓수를 줄이는 등 밥상차리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고 박일용(29)씨는 "노숙자들을 무조건 동정하기보다는 이들의 무질서와 나태한 정신을 바로잡아 사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도 밥먹이는 데만 급급, 봉사활동 자체에 회의가 들 때가 있다"며 "국가 차원의 노숙자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최창희기자 cc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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