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그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

명동 성당 지하실에는 일년내내 신자들의 고백성사를 들어주는 상설 '고백소'가 있다.

서울이란 곳이 신자수가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요즘 세상이 이래저래 죄많이 짓고 살게 돼있는 탓인지 고백성사 시간대마다 죄를 고백하려고 줄지어 앉아있는 행렬의 길이가 늘 만만찮다.

고백성사란 가톨릭 신자가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자책하고 참회하고 싶을때 신부님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낱낱이 고백함으로써 죄를 용서 받는 일종의 성사의식인만큼 결코 거짓이 담길 수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거나 용기와 솔직함이 부족한 신자의 경우 고백 내용에 진실됨이 결여될 경우가 있다.

사례 한가지를 들어보자. 누가 실화라면서 들려준 얘기지만 필자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들은 대로만 적어보면 대충 이런 줄거리다.

얘기에 앞서 우선 고백성사에는 죄를 조목조목 고백한 뒤 기타 사소하고 기억이 안날만한 자질구레한 과오들은 '그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사죄하오니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라는 말로 뭉뚱그려 고백하는 대목이 있다.

정말 자기 자신이 알아내지 못한 죄거나 모르고 지나친 죄 또는 죄로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저지른 잘못 같은 것까지도 깨끗이 사해 달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끔 간큰신자는 차마 신부님 면전에서(가리개창이 막혀있긴 하지만) 솔직히 털어 놓기가 뭣한 죄를 감추고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속에 뭉뚱그려 넣어서 사함을 받아보자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약점으로 눌러 봐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고백성사의 신앙적 의미로 볼때는 하느님 앞에서 꼼수부리는 매우 그릇된 고백 태도다.

다시 실화얘기로 돌아가보자. 어느 나이든 신자가 소실을 두고 있으면서도 꼬박꼬박 주일마다 신부님께 고백성사는 봤는데 처음 몇달간은 똑같은 축첩죄를 판에 박은듯 되풀이 하다가 양심이 부끄러웠는지 그다음부터 별것 아닌 자그만 죄만 고백하고는 축첩은 '그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속에 끼워넣는 '꼼수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뻔히 눈치를 채신 노신부님이 줄기차게 인간 한번 만들어 보려고 온갖 좋은 성서 말씀과 감동적인 감화로 다독거려봤지만 반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실을 버리지 않은채 '그 밖에…'고백을 했다.

드디어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고백소 안에서 땀을 흘리며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계시던 노신부님이 문제의 신자 차례가 돼 또 '그 밖에…'가 나오자 그만 폭발 하시고 말았다.

고백소 문을 열고 뛰쳐나오신 신부님, 벽력같은 고함을 치며 신발을 벗어들고 놀라 달아나는 '고얀놈!' 뒤를 좇아 성당마당을 이리 뛰고 저리뛰었다는 일화다.

노신부님의 고얀놈!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본 것은 최근 대선자금 폭로전을 둘러싸고 서로서로 고백 하라며 치고받는 여야 정치권의 이전 투구를 보면서 정작 고약한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들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다.

SK 자금 이야기가 나왔을때 부터 거기서만 받아 먹었겠느냐는게 민초의 직감이었고 대통령 집사가 처음 '한푼도 안먹었다'고 고백했을때도 '아, 많이 먹었다는 말이구나'[는 말임을 진작에 짐작해냈다.

그게 민심이요 천심(天心)이다.

이회창씨가 '감옥가도 내가 가겠다'며 비장한 고백과 사과를 했을때도 정작 대선자금 공개는 피했다.

노 대통령 역시 어제 가진 간담회에서 대선자금을 다 밝히자고 하면서도 '공개다 고백성사다 할게 아니라 검찰수사에 협조나 하자'며 눈앞이 캄캄했던 규모의 내막은 자진 공개를 피해갔다.

어느누구도 진정한 고백을 할 자세는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두렵고 캥기는 것인가. 왜 그토록 끝까지 감추려 드는 것일까.

단 한마디에 모든 국민적 의혹과 불신이 씻어질 고백을 마다하고 굳이 길고 지루한 검찰수사와 특검의 길로 접어들어 경제를 해치고 민심만 산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지도자들의 아둔함이 그래서 답답하다.

지금의 민심은 '그밖에…죄'가 더 궁금할 뿐이다.

그걸 안털어 놓고는 그 어떤 사과나 수사나 해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검찰을 못믿고 특검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준 고백 스타일이 고얀놈을 쫓는 노사부님의 심기처럼 민심을 그렇게 못믿게끔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죄 지은자가 '어디 한번 수사 해봐라, 들키면 반성하마'는 식으로 버티는 정치적 참회는 반성이랄 수 없다.

진정한 참회와 개혁의 반성은 스스로 잘못을 먼저 고백할 때만 그나마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

신자인 이회창씨와 노 대통령이 고백소에 꿇어 앉아 그밖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정치개혁은 절로 될것 같은데 말재간을 보니 아무래도 기대하긴 글렀다.

노신부님처럼 하느님이 신발짝 들고 나오시면 모를까.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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