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사흘 굶은, 논 귀퉁이에서

회상하는 볏단의 군락

한 폭 그림을 밀치는 화왕산 길

고개든 억새풀 그림자 흔들며

조신조신 내려가는 산비탈 뒤

멧새들 깜짝 놀라는

절집 마당에서 감로수로 적시면

낯선 몸짓 덩그렇게 앉아, 나는

바위 아닌 것이 된다.

정경진 '관룡사를 찾아' 부분

화왕산에 간 적이 있다.

힘겹게 정상에 올라서 보니 내 키보다 큰 억새들이 바람속에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억새들의 흰 머리카락이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 나를 놓아두고는 한참을 그냥 있었다.

그리고는 내려오는 길은 산성을 따라 뒤쪽으로 내려왔다.

마사토에 미끌어지며 도착한 관룡사 마당은 화왕산 정상의 번잡스러움과는 대조가 될 정도로 조용했다.

그 산사의 적막에 경건함보다는 오히려 내가 나뭇잎이나 바윗돌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 고요한 느낌이 전해지는 시이다.

서정윤 (시인.영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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