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 체험...'목욕관리사' 1일 보조원

벌거벗고 만나는 세상, 목욕탕. 이젠 단순히 몸을 씻는 곳만이 아니다. 적은 비용으로 몸속 노폐물을 빼고 쌓인 피로도 풀 수 있는 서민들의 문화.휴식 공간이다.

냉탕, 온탕, 사우나를 번갈아 들락거리기를 30여분. 피부가 적당히 불었다 싶을 때 목욕관리사(때밀이) 아저씨를 불러 몸통을 맡기는 날이면 갑부가 부럽지 않다.

이 맛에 습관적으로 목욕탕을 찾는 '사우나 마니아'들도 크게 늘었다. 가끔씩 신세를 지는 포항시 용흥동 '파크랜드' 때밀이 아저씨를 찾아 하루만 '보조'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간신히 승낙을 받은 지 사흘만인 6일 오전 목욕탕으로 '출근'했다.

"쉬워 보이지만 간단치 않습니다. 손님들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하여튼 잘 해보세요". 여전히 '별 놈 다 본다'는 투로 의아해하는 아저씨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바닥청소부터 시작했다.

"니 신출내기 맞제?" 손바닥에 긴 '이태리 타올' 감는 법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냥 적당히 쓰기 편한 대로 하면 되지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행여 수건에 골이라도 지면 손님들의 피부를 손상시킬 우려가 커 최대한 잘 펴서 잡아야 하는 게 첫번째 수칙.

손님이 뜸한 틈을 타 한쪽 구석에서 때수건을 감았다 풀기 복습을 하고 있을 즈음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드디어 "어이"하면서 때밀기를 청했다.

'위에서 아래로, 근육결을 따라, 가슴.배.등 넓은 부위는 원을 그리듯, 부드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게…'. 고참에게 전수받은 몇가지 원칙을 마음 속으로 되뇌며 때밀기를 시작했다.

"니 신출내기제? 그래갖꼬 때가 나가겠나? 마, 너그 선배 오라캐라". 너무 세게 밀었다가 화라도 내면 어쩌나 싶어 최대한 부드럽게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를 '애무한' 정도에 그쳤나보다.

결국 처음으로 해본 5분여의 진땀빼기는 모두 허사가 되고 새로 시작해 15분 만에 끝난 할아버지 봉사료 1만2천원은 고참의 손으로 들어가버렸다.

오전 황금시간대 오전10시. 목욕객수가 갑자기 늘었다. 고참이 "이 시간에 오는 손님들은 팔자 편한 사람들"이라고 귀띔한다. 표나게 까다로운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정말 그럴까 했는데 주차장을 내려다보니 중대형 승용차가 압도적으로 많다.

시간대별 입욕객 분석도 고참의 경험에서 나온 통계치다. 새벽∼아침식전 손님은 출근준비하는 샐러리맨이거나 외박한 사람들, 오전 9∼11시 사이는 남 눈치 볼 일 없는 자영업자나 개인사업가들, 점심 이후 오후 시간대는 실직.퇴직자 타임, 퇴근시간 이후∼밤11시 사이에는 건강에 관심이 많은 40대 초반∼50대 중반의 기업체 간부들이 많다.

오전 시간대 손님은 정말 그랬다. 온탕의 수온을 좀 더 올려달라거나 깨끗한데도 냉탕의 수도꼭지를 세게 돌려 물갈이를 해댔다. 열탕이 너무 뜨겁다고 난리치는 이도 있다.

수시로 손을 탕속에 담가 수온을 체크하고 혹시 때라도 뜰까 수질관리에 바쁜 시간이다. 그 사이 2명의 손님이 있었지만 '민감한' 이들이어서 때밀이는 고참이 맡았다.

당일치기 '신출내기'는 비누목욕 시키기와 침대 청소 등 잡일을 해야 했다. "박형, 형편이 그렇게…" 탈의실 평상에서 참치찌개로 점심을 해결하고는 잠시 쉬어야 했다. 평소 취미가 사우나, 주특기가 사우나에서 오래 버티기, 여가생활이 목욕하기라 할 정도로 사우나 마니아를 자처해왔으나 오전 내내 고온다습한 욕실에서 일한 탓에 맥이 풀려버린 탓이다. 그 사이 체중도 2kg 이상 줄었다.

정신도 차릴 겸 잠시 외출했다가 1시간여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아저씨, 때 좀 밀어 주세요". 장내 정리를 하다가 손님의 호출을 받았다.

손님의 입에서는 "어?"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박형 아녜요? 아니, 이게 어떻게…. 이런 데서 아르바이트라니? 형편이 그렇게 어려워요?" 질문이 내리 쏟아졌다.

손님은 평소 자주 만나는 기업체 고위 임원이었다. 난데없이 때밀이로 나선 출입기자를 보고는 살림살이가 어려워 아르바이트에 나선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는 '형편'을 걱정해 준 것. 전후사정 설명을 듣고는 한참을 웃었다.

정말 성의껏 그의 피부를 문질렀다. 그와의 특별한 만남은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팁으로 1만원을 더 받았다.

동네 목욕탕 때밀이 요금은 중학생 이상 1만2천원, 초등생 이하 8천원이다. 평소 서비스 받을 때는 적잖은 요금으로 여겼는데 막상 이 일을 해보니 결코 비싸지 않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손님 한 사람에게 봉사하는데 숙련자는 15∼20분, 초보자는 30∼40분씩 걸리는 게 보통이다. 그 사이 흐르는 땀만해도 어림잡아 반되는 됨직했다.

게다가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요즘 목욕탕이나 그곳 종사자들은 손님 격감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목욕비라도 아끼려는 사람이 늘면서 입욕객이 줄고, 때를 미는 사람은 더욱 줄고, 땀빼고 난 뒤의 갈증해소용 음료수를 사 마시는 사람도 드물다. 사정이 이러니 이곳 종사자들이 고달파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평소 '단골 때밀이 아저씨'였다가 이날 '선생님'이 된 고참 송필재(50)씨는 "하루 최소 12명 정도는 밀어야 현상유지가 되는데 요즘은 7, 8명도 어렵다"며 "외환위기 직후에도 이렇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러다가 봉사료까지 더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의 걱정이 기우에 그치기를 바랐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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