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의 한국지배 이전에도 왜(倭)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약 200년간 지배했다?'
일본 도쿄대 교수였던 스에마쓰 야스가즈(末松保和)는 일제 강점기때 '왜가 369년 가야의 다른 이름인 임나를 정벌해 562년 신라에 뺏길 때까지 왜 왕권의 통치기관인 임나일본부의 통제 아래 두었다'고 주장했다.
스에마쓰 교수는 1933년 처음 '남한경영론'을 제기한 뒤 1949년 '임나흥망사'란 단행본을 냈다.
그로부터 50여년 뒤인 2003년 10월31일, 이사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는 '한일합방은 조선인의 총의(總意)로 일본을 선택한 것'이란 역사관을 밝혔다.
그랬다.
'가깝고도 먼 나라'. 2천년 세월동안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오면서 한편으로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 교류해 온 일본. 영욕의 역사였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덧칠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야와 왜도 그러했다.
일본 규슈와 시코쿠, 혼슈 곳곳에는 400년대와 500년대 왜 무덤 속에서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백제 토기가 쏟아지고 있다.
대가야 무덤인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일본열도의 남단,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와 오키나와 주변에서만 나오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나왔다.
전라도 일부지역에는 비슷한 시기의 왜계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앞쪽이 직사각형, 뒤쪽이 둥근 형태인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특정 지역에서 다른 나라의 유물이나 유적이 나왔다고 '지배-피지배' 관계를 뜻하는 것일까. 일본에서 대가야 유물이 나왔다고 대가야가 일본을 지배했고, 한반도에서 왜 유물이 나왔다고 왜가 한반도를 지배했다?
일본 사학자들은 광개토왕 비문, 사서(史書) '고사기'(712년 펴냄) '일본서기'(720년), 전방후원분 등을 근거로 왜의 한반도 지배를 한동안 주장했다.
'400년, 고구려 5만 병력이 신라에서 왜를 쫓아내고 임나가라(김해) 종발성까지 추격했다'는 광개토왕 비문의 끝 부분에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이란 기록이 있다.
일본측은 이를 임나일본부의 지휘를 받은 현지 군대로 해석했으나, '함안(아라가야)에 있던 가야 방어군' 또는 '고구려 순라병'이란 풀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존재 시기인 500년대 중반까지 '일본'이란 국호 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 내용 자체의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 사서에는 '스미노에노 오호미카미가 호무다 대왕에게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의 나라를 주었다'(512년)는 등 황당한 점이 많다.
사서 일부가 덧칠 또는 왜곡됐다는 방증이다.
특히 한.일(가야-왜) 관계사는 상당부분 이런 식이다.
임나일본부 즉,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도 왜의 지배관청이 아니라 '안라에서 외교적 또는 상업적 이익을 위해 일한 왜의 외교기관이나 교역기관'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에 보이는 왜계 전방후원분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가야와 백제에 장기 체류한 왜의 관리나 무역상 등의 무덤 또는 왜 고분문화의 영향을 받은 가야(백제)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임나일본부설의 극단에는 '일본 천황가의 고향은 경북 고령' 또는 '일본 천황가는 김수로왕의 후예'라는 주장이 있다.
마부찌 가즈오 일본 쯔꾸바대학 명예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일본 천황의 고향 '고천원(高天原)'은 고령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임나가라의 '고천원'에 살던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야마토' 정권을 세웠다는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니니기노 미꼬도'는 고천원의 왕손으로, 100년대 고천원에서 배를 타고 일본 규슈지방 와다나가야라는 해변에 도착해 나라를 세웠다는 것. 그가 고천원에서 떠날 때 할머니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는 동거울, 쇠칼, 굽은옥 등을 주면서 '일본은 나의 자손이 대대로 왕이 될 것이니 가서 잘 다스려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
마부찌 교수는 '니니기노 미꼬도'가 일본에 도착, 육지에 내리면서 '이곳은 가라국과 마주보는 곳'이라고 말한 점과 철검, 동경, 곡옥이 고령의 가야무덤에서 흔히 출토된다는 점 등을 들어 '고천원'은 곧 고령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이경희 가야대 총장도 이같은 주장을 받아들여 지난 99년 6월 고령 지산리 가야대 안에 '고천원 고지(古地)'란 비석과 고천원에 거주한 사람들의 이름과 계보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총장은 "해마다 6월이면 일본 천황의 고향이 고령이라고 믿는 일본인 등 수십명이 이 곳을 찾아 제사를 지낸다"며 "대가야와 왜는 건국신화 외에도 토기, 철과 장신구 등 교류를 통해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지난 91년 일본의 사학자인 아라다 에이세이는 '신무천황의 본관'이란 책을 내고 '일본 천황가는 김수로왕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수로왕의 아들 10명 중 7명이 절에서 부처가 되어 승천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본 황조의 7왕자가 남규슈 지방에 도착했다는 일본측 기록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일본 천황과 고령 또는 김수로왕을 연결시키는 주장들은 뚜렷한 근거나 증빙자료가 부족하고, 학계에서도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일본은 침략사관에 따른 역사해석만 되풀이 해왔고, 한국도 일방적 문화전파만 얘기했지 상호 교류의 관점을 갖지 못했다"며 "문화의 상호교류라는 냉철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열도에는 400년대 중반 이후 대가야 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특히 대가야 토기의 경우 이 즈음 일본열도에 들어간 한반도 토기(신라, 백제, 아라가야, 소가야 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대가야의 대왜 교류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반면 한반도의 대가야 세력권내 일부 고분에서도 왜계 토기와 유물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대가야와 왜의 문화.정치적 관계를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당시 양국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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