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25일 경북대학교에서 한국어문학회 발표대회가 열렸다.
오랜만에 그 모임에 참석해 근래에 한 연구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발표했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행사가 끝난 뒤에, 자리를 옮겨가면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계속했다.
그 기회에 지방문화 발전과 육성에 관해 많이 생각했다.
대구의 한국어문학회는 서울에 본부를 둔 국어국문학회, 호남 및 호서 지방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한국언어문학회와 함께 국어국문학 분야의 3대 학회를 이루고 있다.
학회지는 국어국문학회가 133호까지, 한국언어문학회가 50호까지, 한국어문학회가 81호까지 냈다.
회원수는 국어국문학회 2천여명, 한국언어문학회 8백여명, 한국어문학회 7백50여명이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국어국문학회의 우위가 뚜렷하고, 한국어문학회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러나 학회 활동의 내실을 살피면 평가가 달라진다.
학회지를 국어국문학회는 연 3회, 한국언어문학회는 연 2회 내는데, 한국어문학회에서는 연 4회 내느라고 큰 수고를 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일반 회원의 참여 열의이다.
한국어문학회의 경우에는 회비를 완납한 회원이 절반이나 되고,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이번 모임에 참석했다.
한국어문학회가 특히 알찬 활동을 하는 것은 지방학회이기 때문이다.
학회라도 지방에 있으면 뒤떨어진다는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는다.
대구 일대 여러 대학 국어국문학 교수진이 학회를 공유하면서, 대학의 경계를 넘어서서 함께 공부하는 학문 공동체를 키워왔다.
그 결속력과 열의, 학문의 수준과 토론의 열기에 감명을 받아 가깝고 먼 다른 여러 고장의 학자들도 기꺼이 참여한다.
대구에 있다가 서울이나 다른 먼 곳으로 옮겨간 교수들도 계속 관련을 가지면서, 귀향의 기회를 얻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서울이 무엇이든 주도하는 폐단에서 벗어나 여러 지방이 각기 전국적인 활동의 구심체가 되게 하는 것이 거듭 강조되는 이상이다.
목표를 그렇게 설정하는 사람들도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내심으로 회의하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국가 시책의 근본적인 전환이 요청된다고 역설하는 것이 예사이다.
그러나 한국어문학회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않고 그런 이상을 이미 실현하고 있다.
이 사실은 대구 사람들이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대구나 경북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는 소식을 듣고 있다.
사회과학 쪽 전공자들 가운데 학문 수입업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지방을 살려야 나라가 살아난다고 역설하는 것을 사회 참여의 새로운 과제로 삼는다.
각계각층의 분발을 촉구하고, 정부의 정책을 바꾸려고 하는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의의가 있다 하겠으나, 학문 연구의 내실을 스스로 이룩하는 책무를 소홀하게 한다면 모든 구호가 헛것이다.
당위론에서 실제 작업으로 나아가, 세상을 바꾸어놓는 연구를 남들에게 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려면, 한국어문학회를 스승으로 모시고 지침을 얻어야 한다.
대구가 "선비의 고장"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지난해 대구시장을 만난 기회에 "학문의 수도"라고 말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선비'는 '양반'과 동의어로 이해될 수 있다.
자기 선조가 양반이라고 으스대는 복고주의는 청산해야 한다.
'학문'은 누구나 하고, 오늘날 더 잘 할 수 있다.
우리 학문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세 주역 원효, 일연, 최제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시 나타나 학문의 수도가 어딘지 거듭 확인한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 대구 및 인근 지역의 사명이다.
그렇게 하는 데 지방자치단체가 기여하려면, 한국어문학회가 말없이 그 토대를 이룩해온 활동을 주목하고 지원해야 마땅하다.
학문에도 생산이 있고 판매가 있다.
학문 판매 시장이 서울에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팔 물건을 시장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최상의 학문 업적 생산지 가운데 하나가 대구이다.
특히 전통문화 재창조에서는 대구의 제품이 으뜸일 수 있는 원천적인 가능성이 실현되고 있다.
내 자신도 대구 시절에 설계해 만들기 시작해 제품을 서울에서 완성해 팔면서 교수 노릇을 하다가 이제 곧 정년을 맞이한다.
이번에 한국어문학회를 다시 찾아 청춘이 되돌아온 느낌이다.
(서울대교수.국문학)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