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제>가을에 얽힌 '시인들의 러브스토리'

'기러기 울어예는/하늘 구만리/바람이 서늘 불어/가을은 깊었네/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가을이면 한 번쯤 흥얼거리게 되는 박목월(1916~1978) 시인의 '이별의 노래'. 이 시에는 목월과 한 여대생의 애틋한 사랑이 숨어 있다.

30대 후반이던 목월은 1953년 봄 대구의 한 교회에서 서울의 명문여대생 ㅎ을 만나고 환도 이후에 더욱 가까워졌다. 목월은 그녀의 태도가 존경을 넘어 사랑으로 싹트는 기미를 보이자 후배 시인에게 ㅎ을 설득해주기를 부탁했으나 결국 사랑에 빠져 그해 가을 함께 잠적했다. 두 사람이 제주에 살고 있음이 알려지고, 사랑의 도피생활이 넉달째 접어들었을 때 목월의 부인이 제주로 찾아가 새로 지은 목월과 ㅎ의 겨울한복과 생활비 봉투를 내민다. 부인의 충심 때문에 목월은 ㅎ과 헤어져 서울로 돌아왔고, 그 직후에 '이별의 노래'를 지었다.

계간 '시인세계' 가을호는 '시인의 사랑, 사랑의 시'란 특집을 마련, 박목월을 비롯 이상, 김영랑, 백석, 유치환, 모윤숙, 한하운 등 시인 일곱 명의 숨겨진 러브스토리를 다뤘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말처럼 주옥 같은 시들을 쏟아낸 시인들의 사랑에는 특유의 향기와 운치, 멋이 녹아들어 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쓴 백석(1912~?) 시인은 불쑥 종적을 감췄던 여인 자야를 찾아가 하룻 밤을 보낸 뒤 그녀를 떠나면서 이 시를 남겼다.

그는 두 차례의 결혼 외에 두 차례의 연애를 겪는데 난(蘭)과 자야(子夜)가 그들이다. 난은 이화고 학생이었고, 자야는 조선 권번의 기생이었다. 특히 난의 경우는 짝사랑에 가까왔다. 자야와의 열애 중 난이 사는 마을을 찾거나 그녀의 고향인 통영을 제목으로 하는 시를 3편이나 쓴 것도 이를 입증한다. 1936년 1월 발표된 '통영'이라는 시는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든 이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며 안타까움을 노래했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너에게 편지를 쓴다'. 시 '행복'으로 유명한 유치환(1908~1967) 시인은 해방 이듬해 고향인 통영여중에 국어교사로 부임한 직후 여류 시인 이영도를 만난다. 청마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요조숙녀의 자태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로부터 스무해동안 청마는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청마가 59세 때 교통사고로 타계한 뒤 이 시인은 자신이 간직했던 연서들을 당시 출판사 편집장이던 이근배 시인(현 한국시인협회장)에게 넘기고 이들의 사연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베스트셀러로 탄생했다.

모윤숙(1909~1990) 시인의 '렌의 애가'는 분방하고 격정적인 성격의 여성시인 '렌'이 '시몬'이라는 유부남을 사랑하면서 느낀 솔직한 감정을 담은 에세이였다. 시 속의 '시몬'이 누구냐에 대해서 궁금증이 끊이지 않았는데 책에 묘사된 이미지와 행적으로 미뤄 춘원 이광수란 설이 많았다. 그러나 중국에서 활동한 한국인 영화배우 김염의 일대기를 다룬 논픽션 '상하이 올드 데이스'를 최근 펴낸 박규원씨는 '시몬'이 김염의 맏형인 의사 김영이라고 주장, 새롭게 논란을 빚고 있다.

이상(1910~1937)은 금홍이란 작부와 살면서 사랑의 감정을 자기 문학의 중심 메타포로 삼았고, 한하운(1919~1975)은 여동생 친구였던 한 여인과의 희생적 사랑이 전해지고 있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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