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난을 견디다 못해 전업하는 후배들이 속출하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지역 디자이너들의 대가 끊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80년대 초반 대구에 유니섹스 모드 바람을 몰고 왔고, 지역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혔다는 평을 받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천상두(48.이노센스 대표.대구패션조합 이사)씨는 요즘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경기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다.
헐렁한 재킷에 통 좁은 청바지, 무스를 발라 사자 갈기처럼 위로 치켜 빗은 노란 머리, 조금은 여성스러운 어투…. 보통의 비슷한 나이의 남자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매무새로 기자를 맞은 그의 어린 시절은 그의 차림새만큼 남달랐다.
"밖에서 노는 것보다 재봉틀 만지며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는 남방 같은 평상복은 직접 디자인해 맞춤집에 주문했고요.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온 새 옷을 내키는 대로 뜯어고치다 꾸중도 많이 들었지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단순히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옷을 다른 친구가 봐 주는 재미에 빠져 있던 그가 패션에 대해 눈을 뜬 것은 중학교 졸업 이후 군에 입대할 때까지 약 6년간의 서울생활에서란다.
"교교 진학에 실패하자 당시 서울에 계시던 형님이 올라와서 공부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 명동 거리에 활보하는 사람들의 옷에만 관심이 갑디다.
재수 끝에 진학은 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지요. 당시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옷가게나 유흥업소 주변만 맴돌았어요".
군 제대 후 대구 도심에서 포장마차를 열기도 했던 그는 1981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맞춤옷집을 냈다.
"제가 디자인해 입은 옷을 보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것 같으니 다른 사람 옷도 만들어보라는 선배의 말에 용기를 얻었지요. 포장마차를 처분한 돈으로 가게를 마련, 'MR.천'이란 상호를 걸고 남성용 남방과 와이셔츠 등을 만들었어요. 옷이 여성들의 취향에도 맞았는지 여자 손님들이 조금씩 생기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 손님보다 더 많아졌어요. 그래서 여성복으로 전향했지요".
1996년 첫 개인 패션쇼를 시작으로 매년 국내.외서 한 두 차례 이상의 작품 발표회를 갖고 있는 그는 오트쿠튀르(houte couture.고급 맞춤옷)를 지향한다.
1년에 평균 300~350 종류의 옷을 내놓는 그가 고수하는 작업 원칙은 두 가지. 하나는 '최소한 10년은 입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과 '아무리 고객의 반응이 좋아도 똑같은 옷은 3벌 이상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역 내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소재의 대부분을 수입 원단에 의존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섬유 도시인 대구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로서 왜 죄책감이 없겠어요.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단만으로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만들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면서도 그는 행정 당국과 섬유업계에 한가지를 얘기하고 싶어했다.
"현재 행사 기간이 서로 다른 대구국제섬유박람회(PID)와 '직물과 패션의 만남전' 행사를 동시에 개최해야 합니다.
국제 규모 행사인 PID 행사 때 찾은 해외바이어들에게 지역에서 생산된 원단 자체만 내놓기보다는 그 원단으로 만든 작품까지 함께 보이는 것이 섬유 수출량도 늘리고 지역 디자인산업도 키우는 길일 것입니다".
송회선기자 s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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