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춘수칼럼-꿈에 본 화서국(華胥國)

옛날 성왕(聖王) 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 꿈에 보았다고 한다.

그 나라에는 몸은 없고 넋만 있다.

참편(斬鞭)에도 무상(無償)이다.

생사(生死)가 없다.

애증(愛憎)이 없다.

신분의 상하가 없고 사욕(私慾)이 없고 이해손득(利害損得)이 없다.

나도 간밤에 꿈을 꾸었다.

누가 내 귀에다 대고 일러주었다.

여기가 바로 옛날 황제가 꿈에 본 그 화서국이라고 - 나는 눈을 씻고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알고있는 황제가 본 화서국과는 어딘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앞쪽으로는 잔잔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자그마한 샘들이 거북이 등처럼 여기 저기 놓여져 있었다.

모두들 숲이 무성하다.

따라서 샘들은 모두들 초록빛 일색이다.

가까이에 있는 섬들에서는 학이 앉아있다.

흰 빛이 선연하다.

뒤쪽으로는 해발 500m쯤 되는 산이 완만하게 좌우로 뻗어있다.

역시 숲이 무성하다.

그런 바다와 산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다.

여기가 화서국이라고 나에게 일러준 사람은 이 나라의 어딘가에 가면 고인이 된 보고싶은 사람을 볼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가 어디라고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는 그 장소까지는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곳을 나는 내 힘으로 찾아내야 하겠다

며칠이 그새 지났다고 하는데 배가 고프지도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온갖 것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이 됐다.

누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나는 헛소리를 들었을까? 그 음성은 그러나 오래 오래 귀에 익은 얼마 전에 갑자기 듣지 못 하게 된 그 음성이 아닌가.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속이 편하지가 않았다.

한 번 다시 헛기침을 했다.

두 번째가 첫 번째를 다독거리며 가라앉힌다.

헛기침이 간신히 가라앉는다.

속이 좀 풀린다.

순간 무엇인가 본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된다.

그것은 어릴 때 할머니가 만들어 신겨준 꽃버선 같기도 하다.

그런 느낌이 된다.

잠을 깨고 싶은데 눈이 뜨이지 않는다.

누가 또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좀 더 있어 보라,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려오리라, 그 소리를 듣고 나면 당신 눈이 절로 뜨이리라 -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내 힘으로는 사태를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조금 있자니까 드디어 어떤 음성이 멀리서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내가 듣게 된 소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다.

다시 옛날을 상기시켜 사람들을 분노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아마 살아남지 못 하리라 - 말들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역사가 말하리라!' 할 때의 그 국민과 역사, 그리고 그 다음은 재벌, 노동조합, 자본주의, 사회주의, 혁명, 진보, 보수, 강도, 강간, 살인, 성희롱, 사기, 협박공갈, 아첨, 바보, 천치, 병신, 비리, 뇌물, 정치자금……기타 자꾸 음성은 계속되는데 너무 멀어져갔기 때문에 내 귀에는 잘 들리지가 않았다.

위에 열거한 말들은 훨씬 이전에 없어진 사어(死語)들인데 지금은 아무도 그 말들을 기억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황제가 본 화서국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또 있다고 했다.

거북이 등에 갑이 없고 토끼 몸에 털이 없다.

여름에 부채가 없고 겨울에 화로가 없다.

아니, 여름도 없고 겨울도 없다.

넋은 하늘에서 잠자고 구름처럼 간다.

몸이 없으니 분뇨(糞尿)가 없다.

있는 것은 갓 핀 꽃잎 같은 두 개의 날개, 거기가 바로 빛나는 상춘(常春)의 나라 호접(蝴蝶)의 나라다.

그런데 내가 본 화서국은 많이 다르다.

넋이 없고 몸만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말(이름)을 가지지 못 한다.

내가 본 화서국은 사람이 살기에는 몹시 심심할 것 같았다.

사람사는 곳이면 조금은 되잖은 수작도 있을 법하다.

내가 본 화서국에는 황제가 본 화서국과는 달라서 갓 된 꽃잎 같은 두 개의 날개를 가진 호접이 없었다.

서(胥)는 나비를 가리키는 말인데도 그랬다.

몹시 서운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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