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119 구조대 일일 체험을 위해 오전 9시30분쯤 칠곡소방서로 향했다.
왜관 철교옆 낙동강변 국도에 자리잡은 소방서다.
백주흠 서장과 낯익은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진우 방호구조과장의 안내로 곧바로 '구조대 대기실'로 향했다.
119구조대의 트레이드 마크는 주황색 복장. 구조대 복장을 갖추고보니 마치 정식 대원인 것처럼 의욕이 솟았다.
박대식 구조대장을 비롯한 대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늘 함께 야근할 대원들은 모두 7명. 정석만 부대장과 정언영 구급장, 정재억 응급장, 서기현, 권익평 반장, 이형철 대원이다.
특별히 오늘은 이은숙 구급사가 동참했다.
간호사 출신인 이 구급사는 119구조대 활동이 좋아 소방대원을 자원한 사람이다.
119구조대원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출동장비 점검. 현장출동에서 돌아온 직후 곧바로 정비해 둬야 비상출동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원들과 장비점검에 나섰다.
박대식 구조대장이 유압스프레이, 유압 절단기, 체인톱, 동력절단기 등 중장비 가동법을 시범보인다.
장비들을 직접 들어보니 무게가 보통 30~40㎏ 정도다.
이어 119구급차를 점검했다.
구급차 내에도 심장쇼크 치료장비 등 1천만원 이상의 고가장비는 물론 다양한 응급 처치기구들이 즐비하다.
아기 분만세트까지 비치돼 있다.
119구조대원들은 2개조로 편성돼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휴식한다.
오전에는 출동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후 오후1시29분 갑자기 "출동! 환자발생" 이라는 응급구호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얼떨결에 구급차쪽으로 뛰었다.
구급차내에 비치된 도면을 들고 정확한 마을위치를 확인하는 한편 환자보호자와 통화를 시도하며 환자상태 파악에 나섰다.
사이렌을 울리며 현장에 도착하자 마을 앞에 할머니가 나와 다급하게 손짓했다.
환자는 박 모(83) 할아버지. 10년전 전립선 수술을 했으나 며칠전부터 통증과 배뇨장애가 계속돼 119에 신고했다는 것. 곧바로 왜관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
오후 2시57분 또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출동지는 왜관중학교 뒤편. 현장에 도착해 환자운반용 '카고'를 끌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이 간호사가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한다.
다행히 발작 증세를 일으켰던 환자가 정신을 차렸다.
환자를 왜관병원으로 이송하고 보호자에게 연락했다.
출동명령은 계속됐다.
이번엔 구조출동이다.
왜관읍에서 컨테이너로 만든 노인회관에 할머니들이 모여서 놀던 중 출입문이 고장나는 바람에 갇혔다.
마을 사람들이 열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들이 도어 오프너를 이용, 순식간에 문을 열었다.
갇혀있던 할머니는 16명. 모두 무사히 구조했다.
어둠이 내릴무렵 지천면 영오리 영청마을에 만성질환자 구급출동이 접수됐다.
이젠 바깥풍경을 내다볼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현장으로 가는 도중 귀환명령이 하달됐다.
환자가 다른차량을 이용하여 병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보호자들은 급한 마음에 이중 삼중으로 신고를 하는 경우가 있어 출동한 구조대가 허탕치는 경우도 많다.
이젠 더이상 현장으로 나갈 기력이 없다.
첫 출동때 나타났던 멀미증세가 멈추지 않았고 몸에서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버린 느낌이다.
화재현장에서 흔히 "소방차가 늑장출동해서 피해가 커졌다" "구조대가 조금만 일찍왔으면 더 많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등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19 구조대에게 늑장출동은 없다.
다만 현장을 찾아가는 시간이 걸리는것 뿐이다.
그러므로 구조요청 땐 가능한한 자세하게 위치를 알려야 빨리 구조할 수 있다.
막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상황실에 구조신고가 접수됐다.
소방서 앞 도로 위에 덤프트럭이 적재물을 떨어뜨려 교통사고 위험이 있다는 것. 정석만 부대장이 현장을 살펴보고 도로중앙에 있는 중량 13㎏의 철판을 이동 조치해 10분만에 상황 끝.
제발 더이상 출동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30분도 지나지 않아 또 출동명령. 현장출동 동행을 포기했다.
밤샘을 하려면 체력을 충전하여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오후7시. 저녁식사 시간이다.
설마 식사 시간에는 출동명령이 없겠지. 사건사고에 예고는 없는 법이지만 제발 먹을때와 화장실에 있을 때는 평온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식사를 끝낸 대원들이 제자리에 대기했지만 출동명령은 없다.
오늘따라 조용하다.
사건사고 이야기나 좀 들려달라고 하자 이은숙 간호사는 신바람을 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간호사는 농촌지역인만큼 농기계 사고가 잦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밤이 깊어졌지만 사건접수가 없었다.
정재억 대원이 "체력은 곧 소방"이라며 헬스를 하러가자고 체력단련실로 손을 끌었으나 피곤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별말이 없던 정석만 부대장이 긴 로프를 손에 들고왔다.
실생활에 꼭 필요한 매듭을 가르쳐 주겠단다.
가장 기초적인 8자매듭을 배웠다.
고리만들기, 연결매듭 등 18가지의 매듭을 설명했지만 알아 듣기 힘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인 두 딸을 두고 있는 정 부대장은 "아빠가 119 구조대원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딸들이 가끔씩 "아빠는 왜 밤에 집에 안오느냐"고 질문한다며 "소방대원은 밤낮이 따로 없다"고 말한다.
119구조대원들이 가장 심란한 때는 무조건 "늑장출동했다"고 비난을 받을 때. 이를 대비해 이진우 방호구조과장은 정신교육을 강조한다.
"119 구조대원들은 프로다.
혹시 주민들이 심경에 거슬리는 말을 하더라도 절대 과민하게 대응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밤11시가 넘어서면서 피곤이 몰려왔다.
이 간호사가 긴급제안을 했다.
"오랜만에 야식 시킵시다" "메뉴는 양념 탕수육". 자정이 가까워지자 대원들은 "오늘은 더이상 상황발생이 없을것 같다"며 귀가를 종용한다.
대원들에게 야식을 선물한후 소방서를 나섰다.
밤공기가 유별나게 시원하다.
대원들이 접은 쪽지하나를 건넨다.
〈소방관의 기도〉
제가 부름을 받을 때는 신이시여/
아무리 강력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중략)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인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중략)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칠곡.이홍섭기자 hs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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