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의 연작소설 '유랑가족'은 도시의 문명기호가 빈곤의 삶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은폐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풍요를 누리는 반대편에서 상대적인 열패감에 시달리는 도시 소시민들에게 그가 보여주는 가난의 풍경은 너무나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떼쓰고, 어머니는 고된 생계에 찌들려 매를 드는가 하면, 술에 취한 아버지는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위협한다.
이 같은 고통의 비명 소리가 오가는 '가난과 소외'의 전쟁터가 '있을 법한' 소설 속의 현실만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모습이며, 그 풍경은 날로 삭막해지고 있다.
○...우리의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외환 위기를 계기로 '부익부 빈익빈'의 소득 불평등 현상이 심화되고, 빈민층이 두터워지면서 소설 속의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쯠친인척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중3 아들이 병으로 숨진 어머니의 시신을 반년 동안 집에 둔 채 생활해 오다 학교 교사가 발견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사가 보인다.
경기 이천시 모 중학교 학년부장 정모 교사는 지난 4일 이 학생의 집을 방문했다가 다방 종업원이었던 심모씨(45)가 숨져 뼈만 남아 있는 상태인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5년 전 아버지를 여읜 이 소년은 다방 일이 바빠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오던 어머니가 당뇨병이 악화돼 집에서 몸져눕자 지난 5월 말부터 조퇴하며 간호해 왔다 한다.
그러나 6월 4일 심씨가 숨지자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결석하면서 '어머니가 가출해 학교에 가지 못했다'며 숨겨 온 모양이다.
그 속사정을 모르는 담임교사는 수소문 끝에 생활보호대상자 생계비 등으로 살고 있는 그를 만나 출석하도록 설득한 뒤엔 지금까지 결석도 하지 않았다 한다.
○...이 학생의 셋집 보일러를 수리해 주려고 부장교사가 열쇠공을 불러 잠겨 있던 안방 문을 따고 들어가다 시신을 발견하게 됐다지만, 이 사실을 숨겨 온 사연은 우리를 더욱 참담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어머니를 계속 곁에 두고 싶었고, 죽어 있는 추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었다니…. 이 소년의 가난과 열등의식, 지독한 소외감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건 우리 모두의 책무이자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책무와 책임에 얼마나 충실하며,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자성해봐야 할, 지금은 한겨울이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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