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첫눈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 수산은 난생 처음으로 '겨울'이라는 낯선 계절을 대구에서 맞고 있다.

무더운 날씨에만 익숙한 그녀의 몸은 요며칠간의 추위를 못견뎌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지만 말로만 듣던 한국의 겨울이 어떤 것인지, 도대체 '눈(雪)'이란 게 무엇인지 그녀는 호기심반 두려움반으로 기다리고 있다.

8일 첫눈이 내렸다.

중부지역과 안동 등지에서는 백설이 꽤 난분분했던 모양이다.

대구의 하늘은 말짱했지만, 그래도 불현듯 날아온 반가운 엽서처럼 겨울 초입의 첫눈 소식이 찌뿌드드한 머리를 개운하게 해준다.

참으로 봄꽃과 여름 녹음, 가을 홍엽, 그리고 겨울의 눈…. 대자연의 섭리는 어쩌면 이토록 공평하고 조화로운지.

'첫'자가 접두어로 붙는 단어는 수없이 많지만 '첫눈'이라는 단어만큼 사람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도 그다지 없을 성싶다.

아마 있다면 '첫사랑' 정도?

아닌게 아니라 '첫눈'은 참 묘하다.

냉랭하고 부박(浮薄)한 이 시대에 그것은 굳게 닫힌 마음빗장을 푸는 황금열쇠같기도 하고, 행복을 안겨다주는 동화 속 메리 포핀스 같기도 하다.

마른 바게트 빵처럼 딱딱한 감성에 윤기가 돌게 하고, 탈바가지를 쓴 듯 무표정한 얼굴에도 슬며시 미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눈은 왜이다지도 사람 마음을 말랑말랑 녹이는가. 눈처럼 명징한 감성과 잘 조탁된 언어가 어우러진 김진섭의 수필 '백설부(白雪賦)' 에서 일면 해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질일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인지, 부지중 온화하게 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미에 대한 눈맛이 탁월했던 혜곡 최순우 선생은 강릉 죽서루와 주변경치에 대해 '강산만리의 호활(浩闊)한 자연풍경'이라고 극찬했지만, 눈 내리는 날의 간결미도 우리 산천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만약, 첫눈 소식에 질퍽거리는 길과 응달의 빙판길, 교통체증 따위가 먼저 떠오르고, 귀찮은 생각부터 든다면, 감성지수에 빨간 불이 켜졌음을 눈치채야 하리라.

멀지않아 이 분지에도 눈이 올 것이다.

그날 사람들은 첫눈 인사를 나누느라 휴대전화 사용이 급증할 것이고, 전화벨 소리에 유난히 귀를 쫑긋거리겠지. 갈수록 팍팍해지는 세상살이에서도 '어찌된 연유인지' 마음들이 넉넉해지는 날이다.

첫눈 오는 날은.

편집 부국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