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순천만 대대포구

가을을 가장 가을답게 마무리하는 것은 갈대다. 꽃이 핀 갈대는 가을 볼거리의 마지막이고 그 해 꽃의 끝물이다. 잿빛 갈꽃의 고개숙인 모습은 한 해의 보냄을 반추하게 만든다.

순천만에서 가을은 갈꽃과 함께 저물고 있다. 푸석해진 줄기가 더 이상 꽃잎을 잡지 못하고 민들레처럼 바람이 꽃잎을 떨궈내기 시작하면 가을은 더 이상 반도를 머물지 못하고 바다로 긴 여행을 떠난다.

순천만은 아직 만추의 서정이 기막히게 남아 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새의 깃털을 땅에 꽂아 놓았는가'라며 감탄한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순천만에는 날지 못하는 수백만 마리의 새들이 흰 날개짓을 하며 화려한 비상을 위해 바람에 온몸을 흔들고 있다. 남쪽에 광할한 개펄과 북쪽에 빽빽한 갈대숲을 보듬고 있는 순천만은 동서남북이 다른 풍광을 가지고 있다.

순천 출신의 김승옥은 소설 '무진기행'에서 대대포구의 안개를 안개나루(霧津)라고 표현했다.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까...' 세상을 삼키고 토해내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안개로 유명한 대대포구는 이제 '갈대 포구'로 불린다.

순천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남서쪽을 감싸안고 흐르는 이사천이 만나 바다가 되는 종착역인 대대포구는 퇴적물이 쌓이면서 갯벌지대에 갈대가 자라기 시작했고 발이 푹푹 빠져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뻘에서 갈대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70여만평의 갈대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포구에 겨울이 다가오면 갈대밭에 몸을 숨긴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썰물처럼 안개가 빠지고 나면 갈대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대포구에 도착하면 포구가 보이지 않는다. 왼쪽 제방을 오르면 몇 척의 배가 있는 포구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제방아래 비포장 도로가 나온다. 제방아래서는 그저 갈대의 머리만 보일 뿐.

대대포구에 날아드는 겨울 철새에 대한 설명이 붙은 표지판 위 제방에 올라서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갈대가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펼쳐진 갈대 숲. 또 다른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다. 뛰어 내리면 그대로 푹신한 침대가 될 것 같다.

제방길은 4km에 이른다. 10리길을 걸어서 가자면 다리가 아플 것 같지만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을 보며 걷는 길은 곧 사색의 길이 된다. 여기 저기 연인과 함께 길을 걷는 모습도 보이고 철새 탐사를 나온 듯 가족과 함께 망원경을 들고 갯벌을 주시하는 무리도 보인다.

가다가 지치면 주민들이 갈대를 엮어 만든 쉼터에서 바람을 피하며 쉬어 가면 그만이다.

제방 오른쪽에는 추수가 끝난 논이 펼쳐지고 논 사이로 수로가 있다. 수로가 난 반대편 갈대밭에는 어김없이 갈대사이로 난 갯벌수로가 있다. 갯벌사이로 난 수로에 햇살이 비치면 진흙뻘에 남은 물기가 반사돼 눈이 부신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뻘의 모습은 누구든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마력이 있다.

긴 사색의 시간이 지나면 이제는 순천만을 본격적으로 탐험할 시간이다. 대대포구에는 지난 10월부터 철새 탐조선 4척이 운행되고 있다. 5인기준 3만원의 승선요금이 있지만 결코 비싸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대대포구에서 출발해 20~30분간 갈대밭 사이로 난 수로를 헤치며 제방에서 보지 못한 철새며 뻘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까.

철새 탐조선은 일몰 30분전에 타면 환상이다. 해질녁 순천만은 시시각각 변하며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를 연출한다. 수로에 내려앉은 낙조가 탐조선의 움직임에 따라 생긴 물의 파동과 함께 대자연의 안무를 연출한다. 먹이를 노려보던 겨울 진객 흑두루미가 탐조선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군무를 연출하고 거기에 놀란 도요새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갈대밭이 끝나는 뻘지역은 주민들이 보호구역을 쳐 놓고 어로행위도 하지 않아 말 그대로 철새들의 천국이다. 올겨울에는 벌써 2백여마리의 흑두루미가 순천만을 찾았다. 천연기념물 228호 흑두루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월동하는 곳이 순천만이라는데 해마다 개체수가 40~50마리 늘어난다고 한다.

순천만에는 흑두루미,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 물떼새, 도요새, 검은머리 갈매기, 청둥오리, 흑부리 오리 등 2백여종의 철새들이 갈대숲에서 겨울을 난다.

포구는 육지가 거기서 끝나는 길이다. 바다라는 새로운 시간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가을이 순천만에서 끝나고 있다. 대대포구는 이미 새로운 계절을 품고 있었다.

취재수첩

◆가는 길 : 구마고속도로→마산서 남해고속도로→순천IC→목포, 벌교 방향 2번국도→인월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대대포구다. 순천만 갈대포구를 찾은 다음에는 동쪽의 와온포구나 서쪽의 화포를 들러 보자. 40km에 달하는 해안선 가득히 개펄이 펼쳐져 있다.

◆순천만 여행시 순천시 관광안내소(061-749-3107)나 순천만 갈대 지킴이로 소문난 서관석(011-9440-5865)씨에게 연락하면 상세히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평일에는 탐조선이 운항하는 지 연락을 해보고 가는 게 좋다. 연락처(019-622-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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