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월 16일 (토), 백두대간 종주를 향한 열네번째 산행에 나섰다. 5.18, 6.6, 6.29, 7.17, 8.15. 모두 국가적 행사의 기념등반이 되어 버렸다. 억지로, 일부러 날짜를 잡은 것도 아닌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하늘이 보호하고 조국과 함께하는 '대한민국대표 백두대간종주팀'이야. 아니먼 말고.
이번은 대간산행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이틀간에 걸쳐 연속 진행되었다. 또 '추억'의 열차편 이동도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심상준 총무께서 야심찬 산속 야영 준비, 준비, 준비를 해왔다. 늘 다양한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심 총각에게 박수. 총무와 총각이 비슷하네. 이렇게 훌륭한 한국대표 대간종주팀의 총무를 맡고 있으니 언제 장가 가겠노.
나, 유영래대장을 포함 1차팀 10명은 오전 8시 15분, 서울역출발 경부선 무궁화열차를 타고 목표지인 충북 황간역으로 향했다. '칙칙 폭폭 칙칙 폭폭' 기적소리 울리며. 기차여행은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어 언제라도 좋다. 평행한 두 가닥의 레일 위로 뱀처럼 길게 이어진 기차 차량들이 '철거덕 철거덕'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굽이치듯 내달려 간다. 확 트인 차창 대형유리를 통해 아름다운 풍경을 자연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사파리 관광처럼.
이미 창밖에는 초가을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듯하다. 창밖인데 무슨 냄새, 느낌상. 뭉게 뭉게 핀 흰 구름이 한가롭게 떠있는 푸른 하늘, 논과 밭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오곡 백과.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 임박했구나. 맑고 선선한 기운이 유리창을 통해 온몸에 느껴지고 있다.
철도를 오래간만에 탔죠. 이용할 일이 별로 없으니. 차내방송 코멘트가 달라져 있더라구요. "이 열차는 잠시후 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라고 했던 열차가 "우리 열차는 --"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지독한 공동체의식, 집단주의, 패거리활동 탓이지만. '우리 자식', '우리 엄마', '우리 식구',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나라' 등등 '우리'라는 말이 땡볕 그림자처럼 늘 붙어 다니잖아요. 크고 작은 외침을 너무 많이 받아 흩어지면 죽고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서 뭉쳐야만 살 수 있어서 그런가. 어떤 분들은 이런 것을 두고 다른 나라, 다른 民族과 비교해서 굉장히 좋은 면이라면서 만족해 하시더라구요. 글쎄.
'우리 열차'는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별로인데. 이헌태는 철도청에 가까운 친구나 친인척이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 철도청에 자본을 투자한 사람도 아니고. 딱 깨놓고 아무 상관도 없죠. 작년인가 언젠가 '우리 은행'이 이름 잘 지었다고 자화자찬이 대단했죠. 동질감과 친근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때문이겠죠. '우리 은행'이 고객서비스와 경영도 잘 하는지는 모르지만. 철도청도 민영화 앞두고 짱구를 돌린 것 같네요. 오버한 느낌이 드네요. 말만으로 정겨운 '우리 의식'이 들 것 같으면 무조건 다 갖다 붙이면 되겠다.
'우리' 라는 말을 다 붙여도 좋은데 딱 한군데는 금해야 하는데. 관성의 법칙에 의해 생각없이 그냥 붙여 사용하더라구요. '우리 애인',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 웬 지 이상하지 않아요. 일부다처의 이슬람국가를 빼고는. 애인과 마누라, 남편을 함께 쓴다는 것인가. 잉. 하기사 요사이는 충분히 가능도 하겠더라구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남편이든 주부든 '법적 파트너'를 제쳐두고 '별도의 파트너'를 갖고 있더라구요. 공식, 비공식까지 합쳐 일종의 '다부 다처사회'.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는 말이 영 틀리지는 않구만. 이 말들이 명실상부해지면 이상적 공동체 사회가 완성되어 가는 것인가. 시어머니부터 남편, 마누라 온 가족이 모두 바람 나서 따로 노는 영화 '바람난 가족'과 같은 '콩가루 가족'이 모여 사는 '콩가루 나라'가 되는 거지 뭐.
한국 사회가 바람이 난 것 같아요. 지난 30년간 경제성장시대에는 '신바람'이 불었는데.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이 '바람난' 거센 바람이 태풍이 될 것인가 아니면 미풍에 그칠 것인가. 좀 더 두고 봅시다. '바람'이 '바람'나면 어떻게 되냐요. '바람'도 종류가 많구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람'. 잉 여기도 바람이네.
철도얘기 쬐금 더. 얼마전 대구기차충돌사건처럼 한심하고 무책임한 철도원이 있는 반면에 살신성인의 훌륭한 철도원도 있더라구요.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 영화가 갑자기 생각.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회의 일꾼이냐, 마누라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비정의 가장이냐는 놓고, 또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직업인, 마르크스가 지적한 지배계급의 착취를 보존시켜 주는 피지배계급의 허위의식이 아니냐는 논란도 불러 일으켰지만. 서정적 음악, 하얀 겨울 눈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던져주었다.
주인공 오토는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마누라의 시신을 앞에 두고 친구 부인이 원망조로 "왜 울지 않느냐'고 하자 "난 철도원이니까. 집안 일로 울 순 없어요" 라면서 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철도원이 울면 교도소 가나. 나 원 참.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철도원'이야. "건강을 해쳐가며 깃발을 흔들고 / 눈물을 삼켜가며 호각소리를 울린다 /눈 속에 슬픔을 묻으라 / 철도원이여"
주인공의 삶의 전부는 철도. "나는 아버지 말씀을 믿고 살아왔다. '끊임없이 이어진 레일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는 기차처럼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고. 그래서 기관사가 된 거야. 철도원으로 사명을 다하려고 했다. 후회는 없다". 근래 시대풍조를 반영해서 '즐겁게 삽시다', '재미있게 삽시다' 는 말은 자주 들어 보았지만 '씩씩하게 삽시다'는 오랜만에 듣는 말. 좋습니다, 좋고요. '힘차고 당당하게 살자' 는 뜻이겠죠.
이처럼 지금은 뜸하지만 예전에 많이 쓰든 말 가운데 또 하나. '바르게',거짓없이 솔직하게, 이실직고 하렸다는 뜻의 "바른말 해라". 삐둘게 얘기했나. 한문 '바를 정'과는 좀 다른 데도 어떻게 그런말이 정착했는지.'바르게 살아라'도 흔히 들었죠. 얼마전에 비슷한 말로 이회창씨가 지난 대선때 재활용했죠.'나라를 반듯하게 하겠다'고. '바르게 살기 운동협의회'란 사회단체도 있기는 하지만. 어느듯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씩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는 훌륭한 말이 다시한번 컴백하기를 기대하며. 다른 것 필요없고 딱 그 두가지만 인간들이 제대로 실천하고 살면 한국은 세계최고행복나라, 지구는 우주최고행복나라가 되겠죠.
이 영화를 놓고 이념적 접근은 천부당 만부당. 주인공은 훈훈한 마음씨를 지녔다고 봐야죠. 평소 가족들에게도 모질게 했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일이 있으면 '살신성인'할 철도원이라고 봅니다. 좋게 생각합시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하죠.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지죠'.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백두대간을 타고부터, 산천초목을 알고부터는 사시사철, 하루내내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기관사란 직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어요. 펑펑 쏟아지는 흰눈도 가장 먼저 신고받고 소낙비도 원 없이 구경하고 빨간 단풍의 정취도 만끽하고. 기관사가 되고 싶어라. 기관사를 '미래 인기유망직종'으로 임명합니다. 앞으로 자연을 즐기면서 돈버는 직업이 최고 직업이 될테니까요.
백두대간 종주의 종착역은 民族의 영산, 백두산 천지. 우리 대간팀은 (잉, 여기도 '우리'네. 한국사람 '우리' 좋아하는 것은 세계가 인정해야하겠구만) 더 나아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의 원천인 바이칼 호수까지 뻗어가기로 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을 잇고 광활한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반대편 저 멀리 유럽까지 달리는 '유라시아 횡단열차'가 하루빨리 개통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2.
오전 11시 5분쯤, 황간역에 도착했다. 기차가 플랫폼에 멈추자 어린이 마냥 깡총 뛰어 내렸다. 맑은 깨끗한 시골 공기를 흠뻑 마시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과거 어린 시절, 고향과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자그마한 역.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의 냄새가 전혀 묻어있지 않는 정겨운 농촌시골역이었다. 휘 사방을 둘러보니 초록의 산으로 둘러싸인 한가롭고 평화로운 마을 전경. '아, 너무 좋구나'. '시골, 고향, 농촌은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야'
황간역을 빠져 나와 읍내를 관통해서 5분가량 걸으니 황간 시외버스정류장이 나왔다. 버스를 놓쳐 오전 11시 20분, 택시 3대에 나눠 타 지난 산행 때 하산했던 상촌면 물한리 물한계곡으로 향했다. 상촌면 읍내를 지나면서 마침 5일 장날에 나와 좌판을 펼쳐놓고 마냥 쪼그리고 앉아 있는 촌 할매의 모습도 추억스럽다.
선두택시의 기사분은 얼굴에 주름살이 깊게 패였고 행동이 매우 둔해 누가 봐도 연세가 지긋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노인. 이름은 고홍룡, 자그마치 여든 둘이란다. 참, 대단한 분이구만. 손주 재롱 받으면서 쉴 만도 한데. 밤에는 운전 시야거리에 지장이 있어 대게 낮에만 활동을 한단다.
'사오정' (45세정년)하고는 거리가 멀구만. '오륙도'도 있더라구요. 56세까지 자리 지키면 '도둑놈'이라고. '육이오'도 있다고 하네요. 환갑을 넘겨 62살에도 직장에 다니면 그 회사 '오너'라고 하네요. 잘도 갖다 붙인다.
이 어른은 일제 때 차가 귀하던 시절 목탄차를 비롯해서 지금까지 62년간 운전대를 잡은 충북 최고령 택시기사라고 하네요. 백신종선배 왈, 부산에 85세된 할아버지 기사가 계셨는데, 지금은. 경력으로 봐서 한국 최장수, 한국 최고령 운전사가 아닐까. 택시기사는 고객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직업인데, 하여튼 조심해서 운전하세요.
두 아들도 택시기사란다. 황간읍내 택시기사 7명 가운데 절반이 한가족. 이들 삼부자는 농사도 짓고 개인택시로 돈도 벌고 해서 동네에서 어깨 힘 펴고 산다고 내가 탄 택시기사가 부러운듯이 전했다. 거의 '완장'차고 있구만. 서울서 택시기사하면 누가 알아주나. 이를 두고 용꼬리보다 닭대가리가 낫다는 것인가. 촌에서 살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의 인생을 살고 있구만. 부럽습니다, 부럽고요.
노인얘기 나오면 약방의 감초. 로마 최고의 정치가이고 문인이었던 키케로(기원전 106-43년)가 설파한 '노년론'. 노인론의 고전이죠. 예순 두살의 늙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만든 논리겠죠. 말이 되는지 일단 들어나 보죠.
첫째, 노년이 되면 일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박. "육체는 쇠약하다 하더라도 정신으로 이뤄지는 노인의 일거리는 없는가. 큰 일은 육체의 힘이나 재빠름이나 기민함이 아니라 사려깊음과 영향력과 판단력에 의해 행해진다. 갖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그 힘에 맞춰 하려고 하는 바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 팔순의 택시기사는 육체노동인가 아닌가. 몇 시간만 운전하면 육체에 큰 부담이 안 갈수도. 세상이 확 바뀌어 환갑 넘어도 젊은 사람 같은 체력을 가진 사람들이 적잖은 것 같아요.
둘째, 쾌락을 즐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박. " 이것은 비난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칭찬거리다. 플라톤은 쾌락을 악을 낳는 미끼라고 했는데 이런 미끼와의 전쟁에서 자유로우니 노년이 얼마나 좋은가".
최근 영화 '죽어도 좋아'라는 노인영화 보셨죠. 칠순을 넘기신 일흔 셋, 일흔 둘의 남녀노인 이 짜릿한 '섹스신'을 펼치면서 왕성한 성생활을 과시. 그 아저씨 달력에 표하는 것을 보니 이틀에 한번, 또 '낮거리'라고 적더라구요. 색마 아닌가 모르겠어. 왜 적어, 별난 취미야. 그렇게 한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겠지.
셋째.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박. " 노년의 결실은 앞서 이뤄놓은 좋은 것들에 대한 풍부한 기억이다. 봄은 청년기를 의미하고 농부에게 미래의 열매를 약속하지만 남은 시기도 열매를 추수하고 저장하는 일에 알맞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곧 평균수명 '100살 시대'가 개막되겠죠. 너무 오래 살아서 지쳐서 본인 스스로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기특한 세상이 될지도. 재수 없이 죽는 게 안타까울 날이 오겠지. 결론, 키케로의 말씀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가 되어 버렸네. 무슨 말씀인지 뜻만 새기면 된다고요. 알겠습니다.잡소리하나, 담배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이후라고 하니, 담배피우던 호랑이는 언제적 호랑이요. 에게 오래 된 게 아니구만.
성인의 절반이 노인인 세상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길거리의 풍경이 가관이겠구만. 서울 종각에 있는 탑골공원의 '노인판'이 이제 전 도시의 공원으로 퍼지겠네. '특수에서 보편으로'. 노인특수집단이 노인보통집단으로 바뀌겠네. 지구의 인류는 바야흐로 우주에서 '노인국'.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가 소인국과 거인국만 생각했지, '노인국'은 놓쳤구만. '노인국'이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되나. 결국 죽어야하니까. 1백억명으로 늘어난 지구사람수가 1백만명으로 확 줄어들겠지 뭐. '노아의 방주'네. 인류가 새롭게 출발하겠구만. 그때부터는 진짜 좋은 인류문명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기사, 어린 인간들이 사라지면 달걀이나 닭,소,돼지를 마구 찍어내듯 '인간대량생산' 기계를 만들겠지 뭐. 인간들이 보통 놈들이어야지 말이야.
사회는 경제성장, 청년지향, 젊은문화의 추구현상으로 인해 노인들이 푸대접을 받고 밀리고 있죠. "노인은 더 이상 여생이 아니라 생의 엄연한 한 부분입니다" 이헌태가 아니라 노인협회 슬로건으로 제격일 듯. 개인이나 나라나 모두 노인에 대한 준비를 합시다. 키케로도 마찬가지이지만 딱 깨놓고 노인의 삶이 좋은 것은 아니죠, 늙어서도 기죽지 말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지. 가끔 젊은 사람들도 노인이 되더라구요. '조로증'이 아니고요. 화내면 노인(怒 人)이지 뭐. 성질 죽여야하지 뭐.
오전 11시 50분에 '물이 한없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물한계곡에 도착했다. 물이 차다는 한천마을 상류에서부터 약 20㎞를 흐르는 깊은 계곡으로, 삼도봉(1,176m) ·석기봉· 각호산 (1,176m) ·민주지산(1,242m)에 둘러싸여 있고 원시림을 보존하고 있어 곳곳에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는 손꼽히는 생태관광지.
택시에서 내리니 향긋한 나무, 숲 내음이 코로 쏵 빨려 들어왔다. '맴 맴', 환영이라도 하듯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귀 따가울 정도로 요란스럽다. 상쾌한 바람이 온몸을 살짝 스친다. 산들은 온통 짙은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맑고 푸르렀다. 늦여름을 보내고 초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기운이 완연히 감지된다.
올라갈 산 능선쪽의 하늘을 보니 걱정이 태산. 산 능선에는 이미 먹구름이 드문드문 걸치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비가 온다는데. 지난 산행 때 마구 퍼붓는 장대비때문에 고생을잔뜩 했는데. 제발, 제발, 오늘은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물한계곡 입구에서 여러 식당을 전전했다. 장정 10인분의 밥이 준비된 곳이 없었다. 꽤 알려진 관광지에 밥도 없다니, 참 이상하구만. 다시 아래방향으로 약간 내려와 동네 부녀회 할매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갔다. 밥을 빨리 짓게 하고 그 사이에 촌두부에 과실주를 한잔씩 걸쳤다. 밥이 익자 된장찌개를 곁들여 후딱 배를 채웠다. 정식메뉴 요리가 엄마솜씨처럼 맛이 좋았다.
영동대학 학생 두명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물한계곡 개발과 관련한 설문조사를 요청했다가 '개발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허정균 선배한테 딱 걸렸다. "자연은 그대로 놔두는게 좋아, 왜 자꾸 개발하려고 그래" 라며 욕만 퍼지게 얻어먹자 백신종 선배가 불쌍했든지 저쪽으로 데리고 가서 대신 답해준다. 학생들 하필 허 선배한테 걸리나, 재수 없구만.
물한계곡 입구의 집과 산들을 둘러 보니 호두(胡 挑)나무가 호위하고 있다. 호두나무가 한국에서는 호도나무라고도. 뜻풀이는 오랑캐 나라에서 온 복숭아모양. 페르시아가 원조라고 하니. 호두나무는 가래나무과라고 하네요. 가래나무, 가래가 나올라 그러네, 어떤 지역에서는 추자나무라고도 한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올해는 호두농사가 거의 망쳤다고 한다. 비도 자주 오고 특히 우박 때문에.
이 마을, 특히 충북 영동군의 명물이 바로 호두나무. 호두의 70-80%가 영동군에서 생산되고 나머지는 무주,김천,옥천,거창에서 나온다고 하네요. 지리적 ,기후적 여건에 민감하구만. 지가 무슨 '민감성 피부'라고. 거참 웃기게 생긴 놈이 노는 물도 특이하구만. 공기 좋고 물맑은데.
호두의 겉껍질은 하늘, 흔히 만지는 호두의 딱딱한 껍질은 땅, 속의 연한 부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우리 인간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라서 호두는 '천 지 인' 3재가 모두 들어 있는 귀한 과실로 여겨졌다고 하네요. 이헌태처럼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의미 부여를 세게 하네. '철옹성'처럼 딱딱한 껍질에 싸인 모습이 생명과 불멸의 상징으로 되어 결혼식날 폐백때 시부모들이 며느리의 치마에 던져 풍요와 자손번영을 기린다고 하네요. 그렇구나. 호두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천년 만년 살겠구만.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 한국 유입 내력, 고려시대에 유청신(柳淸臣)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가지고 와서 고향인 천안에 처음으로 심었다고 하네요. 천안하면 호두과자 하나 밖에 생각 안나니 유청신이란 사람이 천안을 살렸구만. 지금은 천안에는 호두나무는 사라지고 호두과자만 남았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붕어모습만 있듯이.
3.
낮 12시 50분에 드디어 식당을 출발,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다. 아이쿠, 비가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 주여, 너무 하십니다.
올해 비는 왜 그리 많이 오노. 이 놈의 비, 비, 비. 아닙니다, 아니고요. 아닐 비(非). 인기가수 '비'가 나와서 그런가. 서울의 경우 이틀에 한번 꼴로 비가 왔더라구요. 얄미운 밉상얘기 한번 할까요. 농민들에게는 죽을 맛이지만 저처럼 에어컨 없이 지내는 도시인들에게는 살 맛났죠. 시원한 여름, 여름, 여름. 너무 너무 좋더라구요. 이헌태는 '이기주의자.
내 새끼, 아들 이원교한테 올 여름은 너무 시원해서 좋았다고 하니 아들의 항의, "아버지 사무실은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잖아. 낮에 아파트에 있으면 더워 죽을 뻔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이따식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원보내 주고 건강하게 키워주었더니, 어따 대고. 킥킥. 이어 아들 왈, "아버지 제가 건강하게 자라주니 너무 너무 고맙죠. 저한테 감사해요". 세상이 우찌 이렇게 되었노. 솔직히 두 가지는 맞는 것 같아요. 사무실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보내니 집에서도 시원하게 보냈는 줄 알았던 나의 착각. 또 건강하게 자라주니 진짜로 눈물 나도록 고맙다.
제 나이가 마흔둘이거든요. 지긋하게 들었죠. 인품도 드러나죠. 아니라고요. 이헌태, 니는 나이에 맞게 처신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것이 본론이 아니고요. 태어나서 이렇게 시원한 여름을 보낸 것은 처음인 것 같아서요. '이헌태사(史)'에서 굉장한 사건이죠. 42년을 살아오는 동안 올해 여름이 가장 비가 많이 왔고 가장 무더위가 없었던 것 같아요. 늘 겪어왔던 '한국형 여름 날씨'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빙과류, 에어컨, 수영용품등 여름 더위장사가 망했지 뭐. 나만 시원하면 되지, 남 신경 쓸 거 있나. 이헌태, 마음을 곱게 먹어라. 알겠습니다. 여름비 신기록을 깨니 대간산행 때마다 비가 오지. 이것은 백두대간이 한국에 속한다는 결정적 반증, 매사를 좋게 생각하는 니가 자랑스럽다.
지구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나. 선진국 프랑스에서도 폭염으로 1만명 가량이 죽었다고도 하니, 중세 흑사병인가.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앞으로 '별 일'이 아니고 '흔한 일'이 될 거라구요. '큰 일'이네. 내 죽고 나서 큰 일이 생기든 말든 내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 일 없었으면. 일도 보니 종류가 많구만. 한때 인기짱 일은 '이주일'. 일 가운데 가장 귀찮은 일은 '볼 일',응아 있잖아요. 응아를 왜 '볼 일'로 했는지, 나 원 참. 최고 좋은 일이 뭔 줄 아세요. '놀 일', 잉.
기상청에 따르면. 6월 1일부터 8월 17일까지 전국 10대도시 평균기온이 22.8도로 평년보다 1.2도 낮았고 서울과 대구에는 여름 열대야 현상 (새벽과 밤 기온이 섭씨 25도이상인 경우)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네요. 작년 서울에는 3차례, 대구는 9차례나 있었지만. 우째 그런 일이. 이건 기상이변이야. 이렇게 비가 많이 오고 시원한 여름은 한반도 생긴 이래 처음이 아닌가. 혹시. 더 늦기 전에 인간들이 정신차리고 지구환경보호에 나서야지. 큰 일이네.
또 일조시간은 평년의 69%에 불과해서 과일당도가 떨어졌다고 하네요. 농민들 머리 찌근찌근하겠어요. 나락과 과일들이 결실을 앞두고 충분한 일조량을 받아야 하는데. 뙤약볕에 뼈빠지게 일하고도 몇 푼 못 버는데 우째 이런 일까지. 농민들 한숨과 시름이 깊어져만 가네. 막판 몇 주일 남았으니 좀 더 지켜봅시다. 마지막 불꽃을 태워라.
각설하고, 물한계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싱거운 나무 낙엽송이 일행을 먼저 맞이해준다. 지난 산행 때는 폭우가 쏟아져 계곡물이 크게 불어 '우르르 쾅쾅' 광난의 현장이었으나 이번 산행 때는 물의 양도 현저히 줄었고 '졸졸' 차분하고 안정되게 흘러내렸다. 색시처럼.
물한계곡은 완만한 오르막인데다 등산길도 넓직, 산행이 편했다. 산행 시작 즈음에는 그래도 비가 오는 듯 마는 듯, 부슬부슬 맞을만 했는데 대략 1시간 30분쯤 지나자 기대와 염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할 수 없이 우의를 입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심 총무께서 오매불망 그리던, 하늘에 별을 보초로 세운 산속 야영은 '꽝'이겠구나. 산에서 침낭 '비박'을 하려고 했는데. 비를 맞는 '비박'을 할 수는 없잖아. 두 비박 모두 안되겠구만.
4.
물한계곡을 꾸역 꾸역 오른지 약 2시간만에야 겨우 백두대간 능선 궤도에 올라섰다. 삼마골재. 지난 산행 때 삼도봉에서 30분가량 나무계단을 내려와 폭우에 눈물을 머금고 물한계곡쪽으로 하산했던 지점. 가랑비와 안개비가 흩날리고 사위가 온통 안개로 뒤덮여 시야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허정균 선배가 카메라가 젖을까 조심, 단체사진을 한 컷 찍고 서둘러 동북쪽 방향의 대간산행에 본격 나섰다. 다들 우째 그리 잘생겼노.
이번 산행은 지난 산행과 똑같았다. 복사기로 복사한 것 같았다. 날씨와 느낌 모두다. 대간길이 밀림 정글을 방불케 했다. 얼굴과 가슴과 팔을 부딪히며 비에 젖은 풀과 나뭇가지들을 헤쳐나가야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안개때문에 시계거리는 50미터 내외 밖에 되지 않고. 옷은 축축해지고, 답답 그 자체였다.
이 대간구간은 충청, 전라, 경상도 3도가 맞붙은 곳이어서 경치가 빼어나다고 하던데 도대체 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다음에 개인적으로 꼭 한번 와봐야지. 인간으로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비 맞고 갈 수 밖에, 그냥 앞 사람의 뒷모습만 보고 갈 수 밖에, 그냥 주변의 나무와 식물들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갈 수 밖에. 그것도 좋네.
삼마골재를 떠나서 대간 능선을 따라 기복이 그리 크지 않게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쉼없이 발길을 내딛었다. 고갯길인 밀목령을 지나서 두 시간쯤 지나자 안개가 잔뜩 휩싸여있을 뿐 비는 멈춰섰다. 건너편 봉우리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시계거리가 조금 넓어졌다. 대신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어른 키만큼 자란 억새와 잡목과 풀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초록빛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이 바람도 색깔로 비유하면 '초록 바람' 이겠지. 바람이 무슨 색깔이 있냐, 이헌태 니도 시 쓰냐.
북풍한설의 눈보리가 거세게 휘몰아 칠 때처럼 흰 안개들이 바람에 밀려 산위를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휩쓸리고 있었다. 너무 신비롭고 환상적 장면이었다. '연약한 갈대'가 아니라 '연약한 안개'였다. 휘청 휘청 넘어지는 억새풀 군락 속에서 멋진 포즈로 기념사진도 찍고 모처럼 자연을 음미할 시간과 여유를 되찾았다.
심상준 선배는 "백두대간에는 기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면서 기받기에 한창이다. 다른 산에 가면 느낌이 영 시큰둥하다고 하네요. 아무렴. '백두대간 정기'가 보통 정기이겠습니까. 이헌태도 일단 대간 기를 듬뿍 듬뿍 받는다고 봐야죠. 대간 기를 많이 받아서 좋은 데 쓰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암흑천지'처럼 백색의 '안개천지'도 주변이 하나도 보이지 않네. 로보트처럼, 똥개처럼 그냥 걷고 또 걸었다. 잡목과 풀을 힘들게 헤쳐나가면서 미리 이 길을 낸 사람들에게 감사했고 또 이 길이 사라지지 않도록 나또한 이 길을 밟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굉장한 발견'이네. 나도 뒤에오는 사람에게 더 나아가 후손에게 기여한 바가 있네.
중국 루신의 '고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입니다. /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 그곳에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억새풀 군락도 지나고 암능도 지나고 봉우리도 지나고 안부도 지나고 숲길도 지나고 헬기장도 지나고---다양한 형태의 산길을 거쳤다.
앞뒤로 보이는 숲과 길, 옆과 위는 하얀 안개뿐. 엉뚱한 상상을 발휘. 백두대간 길이 우주를 달리는 '은하철도999' 처럼 우주하늘을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실크로드'가 아니라 '스카이로드'. 그 '스카이로드' 위를 우리 대간팀이 걸어가고 있구만. 대간길을 옆으로 벗어나 발을 내딛으면 끝도 모를 무한의 '우주 안개' 속으로 사라질 같은 신비와 공포. '스카이로드'에는 울창한 나무와 풀들만이 존재하는 세상, 인간이 잘도 헤쳐나가는 구만. 식물만세. 식물은 동물과 인간 없어도 살 수 있는데 동물과 인간은 식물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네요. 어느 것이 더 소중한 지 더 말하면 피곤. 동물을 신으로 삼는 토템이즘의 시대는 벌써 갔지만 앞으로는 식물숭상 종교가 태어날 판.
이번 산행의 최대 성과는 만발한 야생화를 만끽한 것. 8월은 '식물피크기'라고 하네요. 9월 결실의 계절로 가기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건가. 이름도 모르는 앙증맞은 30여개의 야생화가 흰색부터 파랑색, 노랑색, 자주색, 보라색, 빨간색의 화장을 하고 산천을 아름답게 꾸몄더라구요. 황대권씨의 '야생화편지'라는 책에서도 나오지만, 그런데 그분은 야생초를 김치 담가먹고, 차 끓여먹고 난리더라구요. 진짜 그래 먹어도 되나요. 쓴 맛일 것 같은데.
그분은 '잡초'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야초'를 쓴다. 지구상에 알려진 식물종은 약 35만종이고 인간이 재배해서 먹는 것은 약 3천종. 나머지는 그럼 잡초라는 것인가라는 반문을 하면서. 에머슨학자의 정의가 좋다며 소개를 했죠. "잡초는 그 가치가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 이헌태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가지 풀". 별 볼일 없는 풀이란 뜻이 아니네. 한국 국어사전의 수준이 높구만, 또 인간적이네. 흔히 '잡초 같은 인생'은 강인한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어 더 눈길이 가지요.
야생초 편지의 키포인트. 야생초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 1)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2) 토양침식과 오염을 방지하고 3) 이산화탄소증가 억제에 기여하고 4) 환경과 경관이 좋아지고 5) 먹거리가 다양해지고 영양원이 풍부해지고 6) 다양한 생필품재료를 얻을 수 있고 7) 자연과 공생하면서 조화롭게 살고 자기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게 된다고 하네요. 맞습니다, 맞고요.
'야식 (野 食)'얘기. 밤참 야식이 아니고, 야생초 먹기. 야생초 편지를 보니 들에 마구 자라나는 들풀도 먹는데 하물며 산속에 피는 산풀이야 오직 맛이 더 할까. 조선총독부 식물도감을 펼치면 서문에 조선인은 구황식의 풀들만 해도 150여가지여서 쌀 1천만섬을 긁어가도 끄떡없는 民族이고 그것이 고려인의 기질이라고 적혀있다고 하네요. 임진왜란때 된장만 갖고 산으로 올라간 조상들이 도대체 내려오지 않아서 왜놈들이 두손 들었다고 하지요. 산에 지천으로 깔린게 야생초인데 뭐. '대단한 民族'이야. 곰이 조상이 아니고 토끼가 조상인가. 한국을 세계최고의 '풀민족'으로 임명합니다.
이번 산행 때 야생화를 가만히 들여다 보니 저갆은 특징들이 있더라구요. 대게, 잎사귀가 투박하면서도 거칠어 싱싱하고 강한 인상을 주고 있고 가지와 줄기는 올곧은 선비처럼 가늘면서도 늘씬하더라구요. 꽃은 화려한 원색으로 스스로 잘난 척하면서 뽐내고 있고 크기는 작으면서도 우주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뻗어 기품이 있더라구요. 야생화가 '매력덩어리'이더라구요. 집에서도 야생화를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일상의 집속에서 백두대간의 정취를 느끼며 살아가는 거지 뭐.
노란 원추리꽃, 카드섹션마냥 둥글게 꽃을 펼친 하얀 참취꽃. 취나물은 나물의 여왕. 맛도 최고 꽃도 최고 향기도 최고. 참취나물 만세. 모양이 천태만상인 야생화. 대간길에 양옆에 쭉 늘어서서 새색시처럼 예쁘장하게 홍자색으로 치장한 며느리밥풀꽃. 갓 시집간 새댁이 조롱조롱 밥알을 물고 있는 듯한 모습.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그 슬픈 전설을 소개.
독한 시어미니가 하루는, 밥뜸이 잘 되었나 밥알 몇 알을 물고 있는 며느리를 보고 "야, 이 망할 년아, 네 년이 감히 어른들도 손대지 않은 음식에 손을 대"라며 호되게 쳤는데 어찌나 호되게 쳤는지 며느리는 부엌 모서리에 부딪쳐 그만 죽어버렸다고 하네요. 며느리가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자 이 사정을 알고 있는 옥황상제는 그 못된 시어머니를 지옥에 보내고 며느리는 꽃이 되어 세상에 뿌려졌다고 하네요. 믿거나 말거나.
야생초가운데 며느리쪽 이름이 더러 있죠. 며느리밑씻개, 잉, 이름도 야하네. 며느리배꼽, 며느리주머니. 아무리 뒤져도 시어머니쪽 이름은 없는 것 같네요. 아들꽃, 딸꽃, 자식꽃도, 부모꽃, 할배꽃은 없죠. 할미꽃은 있네.
야생화 꽃이름에서 한국전통사회의 '통고과 질곡의 며느리사(史)'가 흔적으로 남아있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죠.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눈치를 보죠. 그래서 서로 편하다면서 남남처럼 사는 경우가 늘었다고 하네요. 그래서야 되나. 사랑하는 남편을 낳은 엄만인데.
예외 또 하나, 사위관련 꽃은 있더라구요. '사위질빵'. 꽃 이름도 특이하구만. 사위가 인사 드리러 처가에 들렀지만 죄가 많아 바로 대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을 기웃하면서 집안 동태를 살피는 형상이라고 하네요. 사위노릇(사위질)이 빵점이라 그런 것 아닐까 걱정해서 나온 이름인가. 하얀색의 참 예쁜 꽃이네요. 장모님의 사랑을 듬뻑 받겠어요.
5.
저녁 7시쯤 되자 해가 지면서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저녁 7시에 목표지인 우두령에 도착할 것이란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쉼없는 빗속 강행군이었는데도 언제 도착할 지 기약도 없다. 우리 대간팀이 일반 여느 대간팀보다 걸음걸이 늦은 모양이다. 보통 20-30%의 시간을 더 잡아먹더라구요. 대간길에서 마주치다보면 다른 대간팀은 거의 '청솔모'처럼 날라다니는 수준이더라구요. 미쳤나, 와, 그러는데. 죄 지었나, 누가 잡으러 오나.
저녁 7시 지나가는데도 우두령에 도착하기는 커녕 "이제는 진짜로 마지막 봉우리겠지"라고 기대하면서 바짝 힘을 더 쏟아 넘으면 또 봉우리가 나오고 진짜로 지루하고 힘든 산행이 계속되었다. 걷고 또 걸었다. 속고 또 속고. 산이 속였나, 지가 속였지. 나중에는 만사를 포기하고 자동적으로 다리가 대딛었지만, 대간을 타기 시작한 이후 이렇게 징그러운 산행은 처음 겪어본다.
'타다'가 나오니 한 말씀. 가장 좋은 것은 '스키 타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시류를 타는 것'이라고 하네요. 세상이 바뀌면 또 아부하는 사람들 있잖아유. 집에 불 타면 안되는 것은 기본. 불조심, 여름철에 무슨 불조심이냐구요. 노출의 계절이니 남녀간의 '애정불조심'하자는 것. 요새는 남녀간에 불이 나니 여러 가정이 쉽게 깨지고 장난이 아니라면서요. 조만간에 '이혼률 세계1위'를 정복할 날도 머지 않았죠. 한국에 세계 1위 또 하나 추가하겠네. 그런 것은 꼭 안해도 되는데.
산행이 지루해지고 고단해지자 백신종 선배는 '시간과의 싸움', '시간 죽이기'라고 말했다. 시간만 죽으면 해결될 문제라는 것. 시간이 흐르면 해결된다는 뜻이리라.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 시간을 죽이면 '살시자'인가. 벌레 한마리라도 죽이는 것은 금합시다. 모두다.
중국의 산해경에는 동이족, 즉 한민족을 가르켜 '호생불상생 군자지국'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하네요. 생명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民族이라는 뜻이겠죠. 조상들의 생명사상이 중국대륙에 까지 널리 알려졌구만. 지금은 모르겠으나 초반 民族성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네. 나중에 갈수록 개판으로 되어가서 그렇지.
나와 심상준, 허정균,백신종선배 4명은 후미그룹을 형성했는데 앞팀은 일찌감치 앞서가고 있었다. 후미그룹은 저녁 7시부터 8시까지는 렌턴없이 가다가 저녁 8시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렌턴을 켜고 나아갔다. 안개 때문인지 하늘에 달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다. 달빛이 그립다.
나도 렌턴을 켜고 나니 마음이 다소 느긋해졌다. 해떨어지기 전에 빨리 도착해야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하고 서둘러졌는데 불빛이 앞을 비추니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등산화는 빗물이 들어가 철벅철벅 거리죠, 접혀진 두 발목은 통증이 계속 있죠, 우의가 완전 방수가 되지않아 바지와 상의가 다소 축축해졌죠. 죽을 맛이더라구요. 무리한 산행이었죠. 오죽했으면 이날 대간 길에서 단 한팀의 다른 대간팀도 만나지 못했으니.
물한계곡을 나선지 도상거리 대략 10킬로미터, 소요시간 장장 8시간, 대간길 위에서만 6시간. 변변하게 산경치 구경 한번 못하고. 삼도봉(1177미터)밑에서 출발해서 밀목령, 화주봉(1175미터) 가래골뒷산 (1207미터)을 지나왔다. 1100미터 안팎의 수평 능선이었다.
후미그룹은 저녁 9시 경북 김천시 구성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을 잇는 우두령에 도착했다우두령에 있는 서울우유 김천공장 입구에 미리 와 있던 선두그룹들과 조우를 했다. 산속 멀리서 불빛이 보일 때부터 어찌나 반갑든지. 선두그룹은 후미그룹보다 대략 40분쯤 일찍 도착해서 발발 떨고 있었다. 어찌나 미안한 지. 주변에 나뭇가지를 주워와 모닥불을 피워 몸도 녹이고 옷도 말리는 한편 즉석 '캠파이어'의 흥을 즐기고.
이번 산행은 모두가 '학'을 띤 산행이었다. 저녁 7시쯤 마쳐야 될 산행이 깜깜한 한밤중인 9시에 마쳤으니. 두시간 가량을 10분 단위로 계속 '이제는 끝이겠지'라는 생각을 해보세요. 거의 '고문' 수준이지. '산고문'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산악회 원로고문 같구만. 한때 '성고문'도 있었고 근래는 '권고문'이 고생하시더라구요. 이날 산행은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은 악몽이었죠.
대동여지도를 만든 조선이 낳은 영웅, '김정호'는 조선 팔도를 세 번 돌고 백두산을 17번이나 올랐다고 하네요. 걸어서, 대단하다. '백두대간 종주산행' 원조 선생님이네. 그분을 생각하면 이날의 고통은 鳥足之血, 새발의 피.
그분의 선생의 말씀, "나의 집은 조선의 땅, 바로 그것이다". 돌아다녀야 사는 '역마살'이 끼었나. 이헌태, 영웅을 그렇게 폄하해도 되나. 폄하가 아니라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돌아다니면서 좋은 경치 구경도 하고 역사에도 우뚝하게 남고, 일거양득이지 뭐, 좋지 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갖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전혀 상상도 못했던 엄청나게 좋은 결과가 있다는 이헌태 어른의 말씀. 못 말려.
여기서 밑줄 쫙. 인생에 주는 교훈. 어려움이 닥치면 언제가 좋은 날이 오겠지하고 신경을 꺼 버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 만사 오케. 이에 비해 매일 매일. 그 순간 순간 그 고통을 떠올리면 버틸 수가 없겠죠. 저는 좋은 경험했습니다.
또 다른 교훈 하나 더. 백두대간 종주가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 지리산에서 출발해서 추풍령근처까지 온 것만해도 이헌태는 대단하죠. 백두대간종주를 혼자 하시는 분은 정말로 존경할 만해요. 제가 몸소 직접 해보니.
제가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다고 하니 주변의 반응. 다 놀라는 분위기죠. 어떤 분들은 나도 가면 되지 않느냐고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백두대간 산행코스는 재미없고 밋밋하고 단조롭게 이어진 구간들도 많죠. 일단 한국의 국립공원 산들의 정상을 다 밟아보고 난 뒤에 대간산행을 시작하라고 권유합니다. 설악산 지리산 월악산 치악산 월출산 태백산 소백산 오대산의 정상은 밟아야죠. 이 산들은 한국의 대표산들로 정상의 경치는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국립공원이 왜 국립공원입니까. 공무원들이 추첨해서 지정한 게 아닙니다. 돈 받는 이유가 있더라구요. 아름다운 산 골라 모은 게 바로 국립공원입니다. 국립공원 정상을 다 마스터하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가는 게 맞습니다. 일년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국립공원 정상은 다 오를 수 있죠.
6.
우두령에서 불을 쬐고 기다리니 2차팀 9명을 실은 전세버스가 왔다. 심상준 선배가 다소 아쉬워하는 눈치지만 야영은 불가능한 것. 함께 전세버스에 타고 상촌 읍내로 내려가 청학동 식당에 가서 화려한 만찬을 가졌다.
돼지고기도 구워먹으면서 이 식당의 기가 막힌 곱창전골과 칡냉면도 먹으면서. 폭탄주가 계속 돌아가고 얘기꽃이 만발했다. 모처럼 모이니 나이 불문, 모두 어린이마냥 떠들고 노래도 부르면서 즐겁게 흥겹게 놀았다. 동지 가운데 산에서 만난 '산동지'가 최고라고 하더니. 어느 모임의 사람보다도 더 정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구만.
공사현장 노가다출신인 남편따라 이 시골까지 왔다는, 인심 좋은 대구출신의 이 식당 주방장 아줌마까지 가세해서 새벽 2시,3시까지, 난리가 났다. 선배님들 모두, 체력은 좋구만, 저는 도저히 잠이 와서 자정을 넘기고 버티다 버티다 못해 상 뒤로 토껴서 그냥 누워 잤습니다.
식당마루에 침낭을 깔고 19명이 술에 취해 시체처럼 푹 쓰러져 잤죠. 모두들 각자 준비한 침낭을 이용했으니, 좋은 일박 방법이더라구요. 심상준 선배, 섭섭해 하지 마세요. '절반의 야영'은 한 셈입니다요. 산이 아니라 식당에서. 저는 후배한 놈이 내 침낭을 갖고 자길래 뺏들수도 없고 밤새 발발 떨면서 잤습니다.
이날 저녁 만찬장, 유영래대장의 '양반론' 강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보너스, 양반은 대인이고 쌍놈들은 소인으로 보면. '소'와 '대'에 대한 이빨을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흔한 것은 역시 '소변', '대변'. 어휴, 냄새 난다고요. 죄송합니다. 오줌이 왜 '소'이고 응이 왜 '대'인가. 왜 그렇게 지었나 모르겠네.
유가에서는 학문을 '소학'과 '대학'으로 구분. 물뿌리고 빗자루를 쓸고 사람이 오면 응하고 대하는 것, 즉 응대지절을 포함한 일상생활의 도를 가르치는 게 '소학', 자연의 도, 정치의 도를 가르치는 게 '대학'. 소학교(초등학교)와 대학교의 차이하고는 완전 다르구만.
동양고전을 보면 자주 눈에 띠는 게 '소인'과 '군자'의 구분법. 논어에 따르면 "군자는 의(義)를 따르지만 소인은 이(利)를 따른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좌우명이 불현듯 생각나네요. 대도무문 (大道無門). 영화제목이 아니고요. 그분은 대통령 때나 퇴임후나 거침없이 가더라구요. 너무 거침이 없어 보기가 안 좋지만.
공자가 제자인 자하에게 "소인유(儒)가 되지 말고 군자유가 되어라"고 당부했죠. 여기서 군자유는 자기를 수양하는 구도자, 소인유는 지식을 얻는데 급급한 학자를 일컫고 있죠. 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군자유보다는 소인유가 많다고 하네요. 지식이 잘 먹고 잘 살기위한 방편으로 바뀌었으니 오직 하겠어요.
앞의 두가지 '소인과 군자의 구분'은 이헌태를 비롯 한국의 지식인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항.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성현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원칙으로 돌아가고 본질로 돌아가야 하지만.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자살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네요.
하나만 더, 장자왈. "구만리를 날으는 대붕을 보고 종달이는 오히려 비웃으면서 '보아라. 저 붕의 놈을. 저 놈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야. 우리들은 기껏 날아봤자 5, 6간 정도 날고 내려와서 다북쑥 사이를 날아 다니며 그것으로도 충분히 날으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데 그런데 저 놈은 어디까지 날아 가려는 것이냐' 라고 찍찍거린다. 요컨대 왜소한 자에게는 위대한 것의 존재의식을 알 리가 없다. 대와 소의 차이점이다"
이헌태의 생각은 장자와 쬐금 다릅니다. 대붕도 좋고 종달이도 좋고. 이헌태의 행복은 잡식성. 다 좋다. 대붕이 종달이를 우습게 보고 종달이가 대붕이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행복은 자그마한데 또 일상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구요. 제 친구가 저한테 그래요. "니의 장점은 자그만한데서도 행복해하는 것같다". 맞습니다, 맞고요. 그래라도 행복해 해야지 안그러면 우얄낀데.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놈이.
이런 식으로 '대'와 '소'의 대조적 사례를 들다가는 한도 끝도 없겠어요. 여기서 일단 중단. 다음으로 '소'와 '대'의 관계를 정리하는 말. "소국이 대국을 받든다는 것은 하늘의 도리로 당연한 것이고 대국의 입장에서 소국을 받든다는 것은 '하늘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늘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존할 수 있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 얼마나 좋아, 강대국과 약소국이 서로 받들었으면. 요즘 미국은 센 힘을 앞세운 거의 '횡포' '조폭' 수준이더라구요.
소인이라고 무시하지는 마세요. 인도에서는 "큰 사람과 비교해 작은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 바늘로 할 수 있는 일을 큰 칼로는 할 수 없으니까". 소인의 용도도 있다고 하니, 참고하세요. 논어책에 나오는 소인과 인도의 소인과는 다르다구요. 알겠습니다.
아침 일찍 기상해서 보니 가관이더라구요. 소주 한박스, 맥주 한박스 엄청 마셔댔구만. 시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널브러져있고, 밖에는 비가 또 내리고 있네. 아휴, 오늘도 또 '꽝'이네. 우째 이런 일이. 이헌태의 '즉석여론조사결과', 이날 산행은 포기하자는 분이 거의 90%에 육박. 산행강행파는 대장과 총무 두분 뿐. 나도 발목에 통증도 계속 있고 해서 총대를 메었다가 깨갱. 대장께서는 '택도 없는 소리'라며 일축하신다. 제가 힘이 있습니까, 모두들 슬슬 따라나서네요.
대장님은 독재자. '멋진 독재자'. 앞으로 무조건 따라하겠습니다. 또 좋은 독재자가 한 분 더 계시죠. 간디왈, "내가 이세상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독재자는 내 속에 있는 양심이다". 멋있는 말씀이네요. 양심은 요지부동, 타협을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이라는 뜻이겠죠. 이헌태도 가난하고 능력이 없어도 양심하나만은 붙들고 살렵니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뒤 아침 8시 전세버스를 타고 20분쯤 달려가니 어제 하산했던 우두령이 나왔다. 단체기념사진을 찍고 8시 30분에 마음을 다져먹고 다시 대간 산행에 나섰다. 정병일 선배는 회사일 때문에 산행에 불참하고 바로 상경했다. 잘 가셨나 모르겠네.
산행을 시작하니 어제 보다는 날씨가 훨씬 양호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어 주변경치는 볼 수 없었지만 비가 그친 듯했고 날씨도 선선한게 등산하기에는 괜찮은 편이었다.
이번 산행은 한마디로 여름을 끝내고 가을을 맞는 '가을맞이산행'으로 이름을 붙이면 적절할 것같다. 가을을 천문학적으로는 9월 23일경의 추분부터 12월 21일경의 동지까지를 말하나, 24절기(節氣)로는 입추(8월 7일경)부터 입동(11월 7일경) 전까지를, 기상학에서는 이보다 조금 늦추어서 보통 9-11월을 가을이라고 한다.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꺽이며 가을의 기운이 선을 보이는 '입추'가 지난 8월 8일이었고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며 본격 가을이 시작된다는 '처서'가 바로 다가오는 8월 23일이다.
이번 주말에는 벌초인파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 이유, 성묘하기위해. 그것은 인륜적 차원이고요, 자연적 차원에서도. 처서가 지나면 풀이 더 자라지 않는다고 하네요. 또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처럼 모기의 극성도 사라지죠.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확 바뀐다는 뜻이죠.
앞에서 걱정했지만 다가올 '처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는 속담 때문이죠. 농부들이 땀 흘려 키운 곡식이 결실을 앞두고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의 기운을 받아야 할 때 비를 받아 여물지 않으면 1년 농사가 망칠 수 있거든요. 여태까지 비가 자주 와서 농민들의 가슴을 애태우게 했지만 남은 기간이라도 햇볕이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24절기로 보나, 낮밤의 기온으로 보나 대한민국, 아니 내가 사는 고양시에도 이미 가을이 시작되었다. 8월 들어서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특히 한밤중의 아파트 거실에는 한기가 점령했다. 가을이 부지불식간에 찾아 온 것이다. 이번 열네번째 대간산행에서도 가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을하면 무수한 시와 노래가 떠오르죠. 김영랑의 '북'이란 시에는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라는 참 멋진 표현도 있죠. 가을은 익어가고 결실을 맺는 계절이니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가 아니라 고은 작사 김민기 작곡의 '가을 편지'가 대중적이죠. 곡이 머리속에 흐르는 것같아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외로운 여자', '모르는 여자', '헤매인 여자'. 외로운 여자로서 모르는 여자고 헤매는 여자이면, 합치면 '딱'이네. 고은 시인도 이 시너지 효과를 생각했을까.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성인 남녀들은 모두 바람 피우도록 유도했으니 '2003년 대한민국 가을'은 여느 해와 달리 볼만 하겠구만. 인생 조지고 신세 조지는 사람 많이 생기겠구만.
비슷한 감상의 가을 대표시가 있죠.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을이 되면 모두다 멀쩡히 있다가도 외로워지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등신되는 것 같고, 웬지 책 한권 끼고 사색해야 인간구실하는 것 같고. 희한한 계절이네. 빨려들어가지 맙시다. 그저 살아온 데로 삽시다. 하여튼 계절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묘하게 영향을 끼치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헤 다다른 까마귀같이.."
산행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어제의 악몽을 되새기면서 누군가가 목표인 궤방령이 다 와 간다고 농을 친다. 지독한 고문이다. 대장께서 "어제 산행은 생존산행이었다"며 프로산악인인데도 몸서리를 쳤다. 잉, 대장님도 힘들 때가 있구만.
나폴레옹도 알프스산을 넘을때 넘어가면 땡잡는다고 군사들에게 뻥을 쳤다고 한다. 천하의 인물인 '삼국지'의 조조도 군사를 일으킨 뒤 진군하다가 군사들이 갈증을 호소하자 눈앞의 산을 가리키며 "저 산만 넘으면 매실이 열려있을 것"이라고 해서 군사들로 하여금 입안에 침이 돌게하여 갈증을 해소시켰다고 하네요. 대장들도 가끔씩 뻥쳐야하는 구만.
7.
짙은 흰 안개에 둘러싸여 경관은 보지못하고 있지만 그럭 저럭 괜찮은 날씨덕분에 능선산행이 순조로웠다. 북쪽방향으로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하면서 3시간 가량 계속 나아가니 바람재가 나왔고 이어 형제봉(1030미터)으로 이어졌다.
이 능선 길들은 억새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에 눕는 억새, 멋있다. 어떤 지역은 억새보다 더 강한 풀들이 설치고 있다고 하네요. 억새도 약한 모습 보이네. 독종들이 들어와서 그렇다구요. 식물들의 세상에도 이렇게 변종들이 설치고, 이게 다 환경변화 때문이라고 하네요. 다시한번 외칩니다, 환경을 보호합시다.
한시간 반가량 더 나아가니 낮 12시 55분,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황학산(일명 황악산) 정상인 비로봉(해발 1111미터)에 도착했다. 바로 밑으로 하산하면 김천의 직지사(直指寺)가 나온다.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출가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사찰이다.
직지사 이름의 유래는 세가지 설. 첫 번째는 신라 눌지왕 무렵 고구려인 아도화상이 직지사를 창건할 때 손가락을 곧게 뻗어 '큰 절이 들어설 자리'를 가르켰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다. 두 번째는 고려 태조때 능여선사가 직지사를 중창하며 측량을 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쟀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세 번째는 선종에서 나오는 말인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참된 마음 곧, 불성을 똑바로 깨치고 밝히면 부처를 이룬다)'이라는 말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모두다 의미심장한 말이구만.
이헌태가 손을 가리키면 그것은 '손가락질'이라서 보기좋지않아 가능하면 하지말라고요. 알겠습니다. 저도 대구에 계신 울 엄마집에 가면 하늘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들이야. 왜 이래. 좋은 비유를 하나 들께요. 포수가 한 마리의 새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면 포수입장에서 보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새 입장에서는 전우주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모든 생명이 중하다는 것을 아시겠죠.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논리네. 미물이라도 살생하지 맙시다, 다 식구가 있어요.
보너스 하나. 한국이 세계만방에 문명국의 기상을 높인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1377년 고령우왕 3년 인쇄). 2001년 9월, 유네스코 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죠. 세계최초 공인금속활자인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보다 무려 78년이 앞선 것. 옛날 한때 한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네, 보통 민족이 아니구만. 똘똘한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700년만에 인터넷이나 문화나 철학,예술등등 으로서 다시한번 빛내 봅시다. 그런데 우야노. 이 인쇄본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니. 대도 조세형은 뭐했노. 조국을 위해야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면 되나.
얘기가 옆길로 샜네. 직지심체요절도 '직지'네. 당연하지. 고려말 승려인 백운화상(1298-1374년)이 선가의 주옥같은 법어와 일화들을 묶어 참선수행교양서를 만들었죠. 책의 주제가 바로 '직지심체'였죠. 그 제자가 그 책을 금속활자로 찍었나봐요. 청주 흥덕사에서. 청주가 '세계 인쇄의 고향'이구만. 청주하니까 청주 술이 생각난다. 캬 좋다. 따라서 앞으로 직지하면 '직지사'보다는 '직지심체요절'을 떠올려야죠. 사명대사가 백운화상에게 밀리는 구만. 개인적으로 유명하지만 '직지'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지.
황학산 정상 공터에서 대간산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 비가 또 설렁 설렁 내리네. 비야 밥 좀 묵자. 제발. 불꽃이 이는 버너위 코펠에 방울 방울 떨어진다. 여기서 이런 말이 나왔구나. '너희가 재즈를 아느냐'가 아니고. '너희가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봤느냐'도 아니고. 그럼 뭐꼬. "너희가 빗물에 젖은 밥을 먹어 봤느냐". 알지. 별로지 뭐. 딩동댕. 정답입니다. 빗물이 뭐 약수냐.
설익었지만 인스턴트포장 북어국에, 김치와 깻잎, 라면에 허기를 채웠다. 꿀꿀이 김치죽도 만들어 먹었다. 반주도 한잔씩 곁들이면서. '캬', 너무 좋다.
대장님의 즉석 '간이강연'도 있었다. 노자의 '지인자지 (知人者智) 자지자명 (自知者明) '에 대한 것. 책을 찾아 잠시 원문을 인용해본다.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 /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있는 사람이고 /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 넉넉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 힘서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사람이다 /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은 그 지위를 오래 지속하고 /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사는 것이다"
'양반론'의 대가이신 대장께서 '자지'라는 욕을 하시다니. 그럼 나온 김에 '보지'는 없나. '보배로운 땅'의 보지(寶 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이헌태, 니는 머리에 똥만 들어있는 놈. 국어사전에 보면 '자지'라는 단어는 많더라구요, '보지'가 세개 있어요. '옥문' 이외에 保持(보전하여 잘 지님)와 報知(알려줌). 이헌태, 진짜 황당한 놈이네. 제가 생각해도 그렇네요.
여기에도 경제학이론에 나오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는 '그레샴의 법칙'이 통하네. 한 '보지'가 다른 두 '보지'를 쑥스럽게 만들면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니. 야한 책을 보면 남녀간의 섹스를 '운우지정(雲雨之情)' 으로 표현을 하더라구요. 적절하고 기가 막힌 표현이죠. 참조하세요. 참조할 것도 아니라구요.
오후 1시 50분 다시 길을 나섰다. 대장께서 "종마가 늦는 바람에 늘 늦게 끝난다"면서 종마를 혹독하게 나무라신다. 여기서 종마란 저, 이헌태입니다. 흑흑.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나이 사십이 넘어서 술을 세게 마시니까 다음날 대간산행에 지장을 주기는 하지만. 저도 산행속도를 빨리 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가능하고요. 설악산 대청봉을 수십번 갔다온 이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대간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또 인생의 참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는 걸 모르시나요. 우리 대간팀은 다른 대간팀과 달리, '사색 대간팀', '음미 대간팀', '철학 대간팀' 입니다. 다른 대간팀이 40번만에 완주하면 우리 대간팀은 45번에 완주하면 되고. 똘마니가 무슨 힘이 있나, 살아남으려면, 대장님 말씀 잘 들어야지.
8.
나이 40얘기가 나왔으니 뱀다리 사족. 나이드신 분이 40살을 넘기니 몸이 영 예전하고는 다르더라고 말씀하죠. 제 경우는 두 살 더 먹은 42살, 올해 들어오니 그 같은 현상이 쬐금씩 나타나더라구요. 그 정도 오차는 있을 수 있다구요. 알겠습니다. 막 퍼마시는 과음양의 절반만 마셔도 그 다음날 몸과 위가 바로 이상이 오고요, 발목을 접쳤는데도 정상으로 회복하는데도 더 시간이 걸리고요. 40살을 넘기면 또 세월이 화살처럼,총알처럼 빨리 간다고도 해요.
근래 평균수명을 80살로 보면 40살은 전반전을 마친 하프타임, 반환점을 돈 '꺽어진' 40대죠. 그렇다고 기가 꺽이면 절대로 안됩니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했는데 알아주지는 않고 갈 길은 막막하고. 외롭습니다, 외롭고요. 허무합니다,허무하고요.
심리학자 레빈슨은 40세 들어서면 '중년으로 향하는 과도기'라고 정의했죠. 성인 전기, 중년기를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하네요. 이헌태는 아직 중년은 아니구만. 그 젊은 이헌태가 벌써 '중년반열'에, 너무 끔찍하구만. (발더둥 치며) 나는 중년이란 말이 너무 듣기 싫어. 싫어, 안되이.
'40대 의미'와 '40대진입'을 소재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더라구요. 대충 정리해보면 40대에 들어서면 체력적으로나 정력적으로나 정신,심리적으로 큰 변화를 야기한다고 하네요. 스트레스, 우울증, 불륜, 출세와 야망, 구조조정의 위험, 노후등등 착찹한 시기죠. '위기의 40대'. 특히 밑줄 쫙, 노후 준비를 시작하는 나이라고도 하고요. 끔찍한 얘기지만 치매가 시작된다고도 하는데 진짜입니까. 설마.하여튼 인생을 한번 점검할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한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나이'. 요즘은 불혹하지 못하도록 갖가지 유혹들이 끝없이 괴롭히죠. 그래서 '유혹의 나이'라고도 한다네요. '애인유혹', '가출유혹', '출세유혹'등등.
청소년기를 '사춘기'고 하죠. 40대를 '사추기'라고 한다네요. 봄,가을. 가로늦게 헤매는 것이죠. 누가 꽉 잡아줘야하는데.
'나이 40'을 가지고 쓴 시가 있어요. 슬픈 파티의 주인공, '도연명'이 자신의 슬픈 처지를 보면서 지은 '40을 바라보니'라는 시. 이헌태는 도연명이 보다는 백번 낫구만. 이헌태는 잘 나가고 있구만.
"어려서부터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 / 육경을 벗하여 즐기며 지냈더니 / 세월이 흘러 나이 사십 바라보메/ 머무르고 머물러 이룬 것이 없구나 / 끝내 굴하지 않는 절개만을 품은 채 / 굶주림과 추위만 지겹도록 겪었구나 / 기우는 오두막엔 슬픈 바람 드나들고 / 거친 잡초는 앞뜰을 덮었구나 / 베옷 한 벌 걸치고 지새우는 긴긴 밤에 / 새벽 닭마저 울려하지 않고 / 선비를 알아주는 맹공도 없으니 / 가슴은 끝내 어둡기만 하여라"
평균수명이 40살이었던 과거에는 충분히 살만큼 살고 관속에 들어갈 나이지만. 그래서 나이 마흔이면 불혹이 아니라 '부록'인생이라구 했나. 지금 세상에서는 나이 마흔이면 앞으로 살 일이 까마득하죠. 여태까지 산만큼 산다고 해보세요. 아휴 지겨워. 잉. 지금 마음속에 뭐든 하고 싶은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도 언젠가 큰 성공을 거둘 것 같은 자신이 생기는 긴 시간이죠.
왜 자살이 유행이죠. 이해가 안가네. 하기야 자살은 거장들의 애용품이었죠. 훼밍웨이, 고호. 세계에서 최고봉으로 더 올라갈 곳이 없으니 허무하기도 하겠지, 그래서 이승말고 딴승으로 가고 싶겠지, 저승인지는 모르겠으나. 나 같은 범인들이 자살하면 미친 놈이지 뭐.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성이고.
보너스, 참 이상하죠. 서양철학사에 나타난 특이한 '3총사'가 있죠. '광기의 역사'의 저자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억압적인 틀을 비판하면서 '인간은 죽었다'고 선언한 푸코는 에이즈로 죽었죠. '짜라트라투스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로 절대적 우월자인 신앞에 꼼짝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을 비판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매독으로 죽었죠. 이들의 현대판 계승자인 들뢰즈는 자살했더라구요. 이들은 자살과 몹쓸병, 정상적으로 죽지를 못했더라구요. 남이 죽었다고 함부로 얘기할 게 아니더라구요. 다만 이분들의 말씀의 취지는 어느정도 고개를 끄덕끄덕할 대목이 많더라구요. 모든 억압해서 해방되는 인간자유의 실현을 다시한번 바라면서.
9.
우리의 작은 거인, 이헌태가 대장님의 눈물 쏙 빠지는 잔소리를 듣고 뒤에 호랑이가 쫒아오는듯 마냥 앞만 보고 무조건 내달리기 시작하는데. 다른 일행들도 별수 있나, 마찬가지. 숨소리 하나없이 모두들 그냥 걷고 또 걸었다. 비로봉에서는 계속 내리막 길로 이어졌으며 백운봉(710미터)과 운수봉 (680미터), 여시골산(600미터)을 거쳐 막판에 급경사 산길을 쭉 내려 하산했다.
마침내 오후 3시 40분, 그 길고도 긴 지리하고도 지리한 산속 안개 속에서 벗어났다. 꿈에도 그리던 궤방령에 도착한 것이다. 눈 앞에는 대규모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 궤방령 도로와 반대편 마을과 야산이 한눈에 그림처럼 들어왔다.
속세에 컴백한 것이다. 이날 산행 도상거리 12킬로미터, 무려 8시간을 안개 속을 헤매었는지 좌우지간 걸었다. 바로 지옥으로부터의 탈출, 해방이구나. 천국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각 장애인들이 개안을 하면 어떤가. 바로 이 느낌일 것이다.
숲에서 나와 바로 도로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도로에 붙은 숲속을 따라가 15분가량을 더 가니 궤방령 도로에 닿았다. 해발 300미터에 위치해 있고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을 잇고 있는데, 저쪽 충북쪽 논물은 금강으로 흐르고 경북쪽 논물은 낙동강으로 흐른다고 한다. 백두대간은 큰 줄기이기 때문에 늘 道를 가르고 江을 가르는 분기가 된다.
김경순 후배가 맛있게 보이는 새빨간 산딸기 하나를 주면서 종마가 먹어야 한다고 한다. 종마를 행동으로 받습시다. 알갱이 하나만 떼어 맛만 본다.' 좋구만'. 지방도로변에는 가을의 대표선수, 코스모스가 벌써 한들한들 거린다. 계절이 바뀌었구나. 숲과 가로수에서 매미소리도 들린다. 계절상, 시간상, 딱 맞는 시가 있다.
강정일당의 '가을매미소리'. " 어느덧 나무마다 가을빛인데 / 석양에 어지러운 매미소리들 / 제철이 다하는 게 슬퍼서인가 / 쓸쓸한 숲 속을 혼자 헤맸네 ". 여름이여 안녕, 저도 슬퍼요,흑흑.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가을이 돌아오고 있군요.
도로에는 전세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만금갯벌 개발반대에 대한 글을 모아 '새만금 새만금- 갯벌이 사람을 살린다'(그물코)라는 번듯한 책을 발간한 '자랑스러운' 허정균선배가 다리를 다쳐 하산이 늦어지는 바람에 출발이 다소 지체되었다. 나는 여벌의 옷으로 갈아 입고 도로 옆 정자에 앉아 통증이 심해진 발목을 주무르면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쳐다보면서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오늘 하루도 좋은 추억을 쌓았구나', 아 행복해. 저 비도 나처럼 행복할까.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면서 나를 쳐다보며 함께 웃고 있네. 이헌태, 시 쓰냐, 짜식.
10.
오후 4시 40분 허선배가 도착하자마자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들판에는 나락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풍요로운 황금들녘을 간절히 바라면서. '영동 포도'가 맛있다고 하더니, 유달리 포도밭이 많구만. 주렁주렁 포도알이 영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비가 하도 와서 포도의 당도가 떨어지고 썩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있더라구요. 걱정이야.
운전기사분의 안내로 아무도 없는 상촌면 노인회에 들러 등목도 하고 샤워도 하고 모두들 흙과 땀을 씻고 난 뒤 지난 산행 귀경 때 들렀던 황간읍내 그 고기식당으로 갔다. 조껍데기술(이름도 야하기는)과 동동주를 한잔씩 돌려 마시고 맛있는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로 배를 잔뜩 불렸다. 산악인은 다이어트는 불가능, 운동을 해서 살이 빠질 것 같지만 체력이 좋아지니 술이 술술 들어가고 늘 고기를 구워먹으니 시쳇말로 '똔똔'이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는 뜻.
경부고속도로를 경유해서 저녁 9시쯤 서울로 올라왔다. 피서막바지, 벌초, 연휴가 몰린 일요일이어서 체악의 교통체증을 예상했지만 덜 막혀 다행이다. 전용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야 말할 것도 없고.
귀경길 버스, 유영래 대장님의 마지막 코멘트. "백두대간 산행은 하루에 대략 7-8시간은 반드시 소요되는 것 같다. 가기 싫다고 천천히 갈 수도 없다. 가다가 다른 길로 빠져 나갈 수도 없다. 백두대간 길은 오직 하나다. 싫든 좋든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백두대간 산행은 나와의 싸움이다. 인생은 자기를 알면서 뚜벅뚜벅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를 믿어야 한다. 대간 산행은 자기와의 대화이며 자기를 신뢰하는 것이다. 자기를 믿지 않으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맞습니다, 맞고요. 백두대간 산행의 '철학과 룰'이 들어 있네요. 다른 산행처럼 도중하차할 수도 없고 다른 짧은 길로 하산할 수도 없죠. 심상준 선배가 다음 산행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아무 말도 않는 '묵언산행'을 하자고 제안한다. 좋습니다, 좋고요.
'자기와의 싸움', '자기와의 대화', '자기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신 대장의 말씀을 들으니 '자기내부의 탐험'을 얘기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에 나온 좋은 문장이 떠오르네요.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컬럼부스가 되라.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 각자는 하나의 왕국의 주인이며 그에 비하면 러시아황제의 대제국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다".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하면서 마음내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항해하는 버릇이 생겼죠. 실제로 신세계도 발견했구요. 인디언은 없었지만. 아직도 항해중입니다만, 마음내부는 우주처럼 광대한 땅이니까요.
백두대간 산행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인생이란 '화'와 '복'이란 양대 축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지만 그 길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아쉽게 자의든 타의든, 도중하차하는 분들도 있지만. 인생을 살면서 인위적으로 10년을 단축할 수도 없고 10년을 늘릴 수도 없습니다. 역할을 쉽게 바꿀 수도 없습니다. 어린이가 어느날 할아버지가 되고 소녀가장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날 수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밖에 없죠. 간혹 더러 행운과 불운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자살은 삶을 회피하고 포기하는 최악의 '악질,저질 카드'죠.
인생도 대간산행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거기에서 인생을 음미하면서 만족하는 나름의 방법을 체득하면서 살아야죠. 대간 길이 늘 경치좋은 풍경만 있는 게 아니듯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얼마나 많은데. 반면, 날씨좋은 날 정상에 서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는 그 기쁨이란 대단한 것이죠. '힘들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언제가는 끝나겠지'를 기다리면서.
백두대간 산행과 인생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나요. 늘 좋을 수 없고, 늘 불행할 수 없는 것,그 가운데 추억과 기쁨이 있는 것, 그리고 세월은 흘러가고 운명된 시간을 마치는 것. 이헌태, 니 똑똑다. 대간산행을 하면서 인생의 깊이와 묘미를 체험하고 있구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두대간 산행을 권해 볼 만하다고 판단합니다.
죽기직전 살아온 인생이 '적자인생'이냐 '흑자인생' 이냐를 따져볼 수도 있지만 적자든 흑자든 모두 내가 산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죽기직전에 우아겠노.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서 로잘리가 삶에 지쳐있는 잔느에게 말하죠,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군요" 그래도 살만 한 것 아니겠어요. 개똥위에 굴러다녀도 이승이 낫다고 하죠.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사색하다 보면 떠오르는 단어가 대충 4개로 압축되죠. 생과 사, 선과 악, 죄와 복, 이승과 저승. 이들을 모두를 아우르는 기가 막힌 명문이 있어요. 인도의 승려 법구가 인생에 지침이 될 만큼 좋은 시구들을 모아 엮은 경전인 '법구경'에 나오죠.
"살아서 걱정하고 죽어서 걱정하고, 악을 행한 사람은 두 곳에서 걱정한다. 이것도 걱정이요 저것도 두려움, 지은 죄를 보고 마음이 부끄럽다. / 살아서 기뻐하고 죽어서 기뻐하고,선을 행한 사람은 두 곳에서 기뻐한다. 이것도 기쁨이요 저것도 즐거움, 자기가 지은 복을 보고 마음이 편안하다. / 이승에서 뉘우치고 저승에서 뉘우치고, 악을 행한 사람은 두 곳에서 뉘우친다. 악을 행한 생각에 스스로 책망하고, 죄를 바로 받아 더 크게 고통받는다. / 이승에서 기뻐하고 저승에서 기뻐하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두 곳에서 기뻐한다. 선을 행했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복을 바로 받아 더 크게 기뻐한다"
백두대간을 가다보면 미리 대간 길을 닦아놓은 분들이 존경스럽고 한없이 고맙더라구요.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어요. 대간산행이 개척산악인들에게 의해 시작된 게 대략 15년쯤 되었다고 하는데. 80년초만해도 대간종주는 언론의 기사거리였다고 하네요. 삶도 마찬가지겠죠. 나라와 사회에 개척자가 필요하고 또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이헌태는 남이 뚫어놓으면 편하게 가는 '일반백성'이죠.
이헌태의 주장. 백두대간 산행이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라고 봅니다.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는 것. 불교에서 '삼독' 아시죠. '탐 진 치'.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그러나 저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욕심, 이를 위해 참고 견디는 것은 좋다고 봅니다. '탐 진 치'의 욕심은 허망하고 공허한 것이지만. 백두대간의 종주에 대한 욕심은 괜찮은 욕심이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집념과 인내, 노력의 결실이라고 봅니다.
전세버스는 저녁 9시를 넘겨 강남 고속버스터미날에 내려주었고 같은 방향인 김경순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나의 보금자리 고양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서니 이틀간의 악전고투산행이 대미를 장식. '이틀간의 고생끝'.
작년 10월 대간 산행의 닻을 올린 뒤, 비를 맞은 지난 두번의 산행이 그 이전의 열두번의 멋진 산행의 기쁨을 약간 까먹었다고 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틀 산행동안 안개만 실컷 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흰 안개. 1980년, 3김씨가 서로 봉황을 차지하기위해 싸우다가 날려버린 '안개정국'. 우리 民族 진짜로 착하더라구요. 세계 기네스북에 올려야해요. 그때 그분들 돌아가면서 다 대통령시켜 주더라구요. 다만 한 분은 충청도라는 땅이 작은 곳에서 태어나서 대통령은 안 되었지만 '일인지상 만인지하'라는 총리는 원도 한도 없이 잔뜩했죠. 이제사 또 다 미워하더라구요. 참 변덕심한 백성이구만. 전 세계에 이런 백성들 없죠. 백성들 수준이 높은 거요, 낮은 거요. 참 나도 모르겠어요. 나도 그 가운데 한명이니. 하여튼 한국백성들은 연구대상이야.
그러나 대간산행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 차원에서 행복은 계속. 그래도 행복. 사람들이 '고생속에 행복'이란 말과 기분을 알까.
종료하기 섭섭. 심 총무가 제안한 '묵언산행'에 대해 한마디. 쓸데없는 말하지 말자는 취지인듯. 지금은 '말의 공해'에 살고 있죠.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도 한몫. 지난 60년대만해도 바바리깃을 올리며 빗속을 걷는 말없는 키 큰 사나이가 인기였다면 요즘이야 유머가넘치는 다정다감한 사나이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듯이. '묵언'이 나오면, 누구보다 이헌태가 유념해서 실천해야 할 대목. 고개를 떨구며 '네'.
보너스 1. 오쇼 라즈니쉬의 '지혜는 어리석음을 먹고 자란다'는 책에 보면. '침묵'에 관해 몇줄 적혀 있더라구요.
"침묵은 지성의 폭발이다. 내면의 광활한 공간이라는 뜻이다. 침묵은 그대 마음속에 있는 온갖 상념 욕망 추억 환상 꿈들을 치워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그냥 존재를 직접 즉각적으로 바라본다. 그대는 그대와 존재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존재와 접촉한다.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내 마음이란 존재와 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깊이 있는 대화,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
"침묵은 세가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 단계, 자신의 말 가운데 90%가 쓸모없다는 데 놀라게 될 것이다. 10%만 가치가 있다. 말이란 우회하지 않고 직접 전달될 때 더 함축적이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경전은 간결하다.
둘째 단계, 본질적인 것만 생각하라. 그러면 그대는 99%가 비본질적이고 오직 1%만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세번째 단계, 오직 본질적인 것만 느끼는 단계다. 오직 사랑만 존재한다. 분노 탐욕 욕정 이런 비본질적인 것들로서 그대를 기생충처럼 착취한다. 사랑으로만 충만할 때 비로소 침묵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보너스 2. 채근담에 나오는 귀한 말씀. "낮은 곳에 살아본 뒤에야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위태로운 줄 알게 되고 / 어두운 곳에 있어 보아야 / 밝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 눈부심을 알 것이며 /고요함을 지켜 살아본 뒤에야 / 움직임을 좋아하는 것이 수고로움을 알게 되고 / 말없음을 겪어 보아야 / 말 많음이 시끄러운 것임을 알게 된다"
보너스 3. 다언을 경계하는 순자의 '권학편'에 나오는 말씀. '혼자 얘기 다한다'는 말을 잘 듣고 사는 이헌태가 특히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다들 제 얘기가 재미있다고는 하든데. 제가 얘기 안하고 가만히 경청해 보면 좋은 얘기도 안하더라구요. 재미나고 좋은 이헌태의 얘기는 자꾸 들어, 알았어, 부처님이나 공자께서 말씀하시듯이.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 바로 입으로 빠져 조금도 마음에 간직해 두지 않는다. 입과 귀사이는 네 치의 거리.--- 옛날 학문을 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배웠지만 오늘 배우는 사람들은 배운 것을 바로 남에게 말하여 자기를 위하여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 묻지도 않은 말을 끌어내면 이것을 시끄럽다고 하고, 하나 묻는데 둘을 말하는 것은 수다쟁이라고 한다. 어느쪽이나 나쁘다. 참다운 군자는 물음을 받지 않고서는 대답치 않으며 물음을 받으면 묻는 만큼 대답한다"
요즘 세상에 뭐, 이렇게 까지야. 순자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고요, 제 사촌누나 이름이 순자이고 또 한국에도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이순자'씨도 있지만, 순자선생님의 얘기 다 듣고 싶지가 않네요. 순자선생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는 알겠습니다. 알겠고요. 넘어가죠. 안녕 (8월 16.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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