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14) - 봉화산

1.

4월 12일 토요일, 백두대간 종주 여덟번째 발걸음에 나섰다. 저녁 10시에 강동구 길동 청산학원앞에서 전세버스가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이미 30분전부터 바로 길 건너편 감자탕집에서 술잔이 팽이처럼 잘 돌고 있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감자탕을 맛있게 만들더라구요.

이상한 것 하나. 감자탕의 주재료는 바다바위에 야무지게 붙어있는 해초처럼 뼈다귀에 역시 야무지게 붙어있는 살이잖아요. 분명 감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감자탕이라고 하죠. "장수군에 장수없고 효자동에 효자없다더니 감자탕에도 감자가 없구만" 보너스 하나. 카드사에는 카드가 없죠. 포커 치는 카드말이에요. 요즘 언론에 보면 카드사, 카드채란 말이 넘치더라구요. 카드사란 카드치는 도박회사인가요. 카지노회사인가요. 카드채는 카드를 치다가 돈 떨어진 사람에게 빌려주는 사채를 말하나요. 외국사람들이 '정부에서 5조원 지원' 등의 카드사 관련 , 한국언론기사를 보면 깜짝 놀라겠어요. 아무리 줄여서 말하는 초스피드 시대라해도 '신용카드사'라고 해야죠. 질문하나. 카드사에 다니면 포커를 어느 정도 잘 쳐야 하나요. 끝까지 농담할래. 죄송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소위 남한에는 사람들이 남남처럼 개인플레이하면서 뿔뿔이 살아서 남한이라고 했나. 그래서 가족공동체가 붕괴되고 의리와 신의도 사라지고 이웃도 모르는채 담쌓고 살면서 인정이 이렇게 매말랐나. 서로 모른채하고 사는 남남의 남이 아니고 남쪽이란 뜻의 남이라구요. 이헌태. 시작부터 말갖고 장난치지 말아라.

결국 저녁 11시쯤에야 눌러 앉아서 퍼 마시는 술자리를 파하고 털고 일어섰다. 나는 감자탕이 맛이 있어 소주 1병 정도를 들이켜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버스에 탄 뒤 자면 되겠지". 이번 산행에는 유영래 대장님을 비롯 팀의 종마들인 나, 허정균, 심상준선배등 15명이 참가했다.

전세버스는 중부고속도로와 대진고속도로를 통해 새벽 3시 반쯤, 지난 산행때 멈췄던 복성이재에 다다랐다. 이곳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의 복성이마을과 남원시 아영면 성리의 상성마을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복성이재, 이름이 얼마나 복스러운지. 복실아. 내 사랑 강아지들, 이원교 이승은아. 누군 누구. 내 새끼들이지. 사람새끼를 강아지새끼처럼 취급하네. 엿장수 마음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마음대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보내 주니까. 정신나갔다구요. 강아지새끼하면 귀여운 말투인데 왜 개새끼하면 갑자가 욕으로 돌변하지요. 개들은 어른이 되면 개새끼가 되고 급기야 보신탕집으로 끌려가고. 잉. 개들은 어릴 때가 좋구먼.

근래 제가 사는 일산의 호수공원에 가면 '사람반 개반'이지요. 이런 개들은 대접이 진짜 장난이 아니래요. 우리도 선진국처럼 되어가는 가 봐요. 아직 가난한 사람도 많은데 이 문제 해결하고 난 뒤 개 키웁시다. 정부에서 개 키우는 집은 가난한 사람 한 명씩과의 결연증이 있어야 허가를 내줍시다. 나 원 참. 앞으로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 소위 OECD공식통계에 개사육수도 포함될 날이 멀지 않겠지요. 보신탕 애호가가 갑자가 늘어나서 사육개가 크게 증가하면 어떻게 되냐구요. 키우는 개와 잡아 먹는 개를 구분해야지 뭐. 키워서 잡아 먹으면 어떻게 되나. 모르겠다. 따지지 마라.

집안에서 같이 살며 자식이나 형제처럼 개를 키우는 가정들이 확실히 늘어났죠. 죽으면 슬픔이 이만 저만이 아니래요. 사람이 죽은 것처럼 한달간 넋을 잃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사람은 안 늘고 개만 늘고 있구만. 나중에 개가 인간보다 수가 많아져 세상이 '개판'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처자들이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으니. '개판'이 될 지 모른다는 우려를 한번씩 하면서 삽시다. 정부에서 자식 낳으면 지원금 준다고 하네요. 그래서 더 놓을 것 같으면. 이상형의 남, 녀 소개시켜 주면 한타스씩 놓겠지 뭐.

복성이재에 도착하고 나서 차안에서 눈을 잠깐 붙혔다. 잠은 오지 않고 앉은 자세도 불편해서 몸이 찌부드드했다. 역시 늙다 보니 몸이 영 예전하고 다르구만. 10년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님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아이고 나도 늙어 몸이 말을 안 듣네"라고 한마디 뱉었다가 "아비 욕보이느냐"고 핀잔을 받았던 게 문득 생각나네요. 어른들 앞에서 '나이가 들어서"내지 "늙어서" 라는 말 조심하세요.

차안에서 잠시 자고 바로 산행에 나서는 소위 '무박' 산행은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뒤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하산시간이 빨라진다. 상춘 피크기간이어서 고속도로가 막힐 것을 우려, 서둘러 귀경길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무박'은 샐러리맨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구세주인 로또복권 '대박'의 반대말인가.

일행은 1시간 뒤인 오전 4시 50분에 장정에 나섰다. 차에서 내리니 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었다. 흑색.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어린이들의 궁금증, "왜 하늘이 푸른데 검다고 합니까" 노자의 주된 테마인 '현'을 철학적으로 따지지 맙시다. 밤에 보면 검잖아요. 아시겠어요. 심각하고 어려운 정답은 의외로 간단한데서 찾아야 합니다. 이헌태 니 똑똑다.

랜터불을 켰다. 산에 올라서자마자 왼쪽에는 목장 철조장 울타리가 이어졌다. 흑염소 방목장이라고 한다. 소나무와 진달래의 호위속에 20여분가량 부지런히 걸으니 첫 봉우리인 매봉이 나왔다. 사방이 어둠속에 형체만 보인다. 검은 옷을 입은 채 우람한 산들이 겹겹이 빙 둘러서 있다. 주위는 온통 새벽 안개가 쫙 깔리면서 더욱 신비감을 자아냈다. 북쪽방향으로는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화산이 웅장하게 서있고 왼쪽으로는 장수군 번암면의 마을, 오른쪽으로는 큰 저수지를 안고 있는 남원시 아영면의 마을이 각각 내려다 보였다. 사람이 모여살고 있다는 표시인 전기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밝기도 해라. 놀라운 문명의 결실. 그러나 자연에 까불지마라. 모두들 이 시간에 잠을 자고 있겠지. 좋은 꿈 꾸세요. 요새는 좋은 꿈을 꾸라고 하면 로또대박 꿈 밖에 없는 것같아요. 선남선녀가 사랑에 빠져있는 꿈도 있잖아요. 돈안되는 꿈이라구요. 알겠습니다.

"이헌태, 니는 남들 자는 시간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뭐하기는 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삶의 환희와 인생의 추억'을 쌓고 있죠. 자는 사람이 등신이고 바보지. 하루 평균 8시간을 잔 사람이 만약 60살까지 산다면 20년은 잔 것이죠. 엄청나구먼. 어떤 노인이 돌아가셨을 경우 "연세가 몇인데"라고 묻잖아요. 이제는 "몇 살까지 사셨고 하루 평균 잠자는 시간이 얼마냐"고 구체적으로 물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헌태, 니나 슬픔에 잠겨있는 상주에게 그렇게 고치고치 물어라.

저의 논리는 90살까지 살아도 하루평균 8시간씩 자는 사람은 하루평균 4시간씩 자고 대략 72살까지 산 사람과 눈 떠 있는 시간은 같죠. 아니 이럴 수가. 오래 살았다고 자랑할 게 아니네. 얼마나 알차게 살았느냐가 중요하구먼. 이헌태의 결론, 쓸데없는 잠을 자지 맙시다. 그러면 잠자지 말고 거리를 싸돌아 다니나 뭐하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마음의 양식인 책을 읽으면 좋잖아요.

'지적 소유권' 아시죠. 예전에는 식량이 부의 척도였는데 지금은 지식과 정보가 부의 척도로탈바꿈했습니다. 조상들이 "책은 마음의 식량"이라고 한 이유가 다 있었구만. 시대를 앞서 본 분들이네. 시대가 흘러 독서광들은 곳간에 식량이 가득한 집이겠네. "하머하머". 착취와 기아에 성난 군중들이 포악한 지주의 식량창고를 털었다는 것은 서점을 털었다는 뜻인가. "하머하머". 책과 백두대간종주의 공통점이 아닌 것은. 1) 비용이 안든다 2)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3)이헌태가 좋아한다 4) 행복을 준다 5) 팔아도 괜찮다. 정답은 5번. 책은 팔아도 되지만 백두대간을 팔다가는 매국노.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잠과 관련해서도 예외가 있더라구요. 첫째, 잠자면서 돌아다니는 몽유병환자의 경우 돌아다니는 시간은 잠에 포함시켜야 하나요, 빼야 하나요. 둘째, 극심한 불면증환자가 불꺼고 누워있으면 잠도 아닌 것이 시간 체크가 힘들잖아유. 대충 잠으로 취급하지 뭐. 셋째, 잠을 자지않는 시간이라고 해서 모두들 열심히 사는 사람은 아니더라구요. 도둑질이나 사기치는 놈들도 있잖아요. 이헌태 너무 따지지 마라. 일반적인 얘기를 하는거지.

대통령령으로 발표해서 전국민들이 하루 일과를 잠자는 시간과 잠 깬 시간으로 구분, 기록해서 몇 살까지 살았는 가를 과학적으로 체크합시다. 신문사의 부음난에도 나이상으로는 몇 살까지 살았지만 잠을 잔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몇 살 분의 인생을 살았다고 구분해서 표시합니다. 일기도 안써는데 이헌태 니나 해라. 알겠습니다. 국민들의 뜻이 그렇다면 저도. "저는 늘 국민과 함께 하겠습니다". 말만 번드르하게 잘하네. 그런 말은 그런데 쓰는 게 아니야.

말이 나와서 그런데요. 하루하루를 기록하다가 나중 세월이 흘러 다시 보면 어떨까요. 삶의 궤적이 아련하게 다시 떠오를 것이고. 인생이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사연들로 가득찬 행복꾸러미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베스트방법은 일기를 적어가는 것이고 더 양보해서 책상용 카렌다에 메모형식으로 간단하게 기록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죠.

참 특이한 분을 봤습니다. 그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자신이 받은 명함을 다 모았어요. 명함 뒷면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만났는지를 기재하고. 분량이 몇 박스나 된다고 하네요. 혁명 후 60년대 새파랗게 젊은 김종필씨의 명함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명함을 주고 받은 사람은 이 박스 안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죠. 이만큼 완벽한 보존은 없을 것이죠. 아이구 섬뜩해. 인간은 잊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매력인데. 안그러면 신이지. 룸싸롱에 가서 아가씨한테 받은 명함도 가지고 계시는가요. 그런 적 없다구요. 알겠습니다. 한국 성인남자 가운데 그런 사람 몇 명 되겠노.

그분이 보유하고 있는 명함은 몇 명쯤 될까. 여러분은 평생 몇 명과 명함을 건네주고 받으며 인사를 나누셨나요. 일찍이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는 사람은 극단적일 것이고 정치인들처럼 남발해서 명함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는 것은 이헌태의 인생철학인 '추억쌓기' 측면에서 보면 좋죠. 저도 기자출신이라서 그런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죠. 돈으로 바꿀 수 없는 큰 행복을 누린 셈이죠.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5억 내지 10억원쯤 되지 않을까 싶네요.

만남이 나온 김에 최근 '엽기적인' 만남을 소개할께요. 근래 우리나라 스포츠 신문들이 너무 심하더구만. 외국인 영어강사가 한국 여자들 수백명하고 뭐했다는 기사가. 키 크고 잘 생긴 모 신인가수가 여자들 수백명하고 뭐했다는 기사가 일면톱으로 대문짝만하게 났더라구요. 저처럼 결혼한 사람은 괜찮지만 청소년기 특히 처녀, 총각들에게 무슨 영향을 줄려고. 그렇게 하라는 것인지, 그렇게 못하면 바보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죄절감에 빠지겠어요. 나 원 참. 그런 만남은 어떤 분에게는 '환상적인 현상'이겠고 어떤 분에게는 갈 때까지 간 '말세의 현상'이겠죠. 나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와서 인류역사상 처음 나타나는 현상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죠. 이런 기사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것도 인류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싶네요. 그것도 남녀노소 온 국민들이 지나가면서 다 쳐다보는 지하철 가판대위에서 버젓이. 기사를 내는 것까지는 좋은데 작게 취급합시다.

2.

첫 봉우리를 넘어서고 나서 10여분이 지나자 먼동이 트면서 날이 밝기 시작했다. 새벽 5시 50분쯤에는 일행이 준비해온 만두 만한 몰랑빵에다가 치즈와 얇은 햄을 얹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배를 채웠다. 행군에 다시 나섰다. 날씨는 포근, 산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르락 내리락하며 치재와 꼬부랑재, 다리재를 계속 지났다.

백두대간 산행이 자꾸 거듭되면서 일행들도 서서히 도인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탁무권 선배가 우리 '백두대간 한걸음 이어가기' 팀을 '헝그리 산악회'로 명명했다. 자발적 빈곤 내지 앙상한 뼉다귀. 자연에 들어와 속세의 때를 버리고 우주의 기를 집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질문하나. 기는 한정되어 있지 않나요. 나의 기는 훔쳐가지는 마세요. 유영래 대장도 내려오는 차안에서 이미 "우리 몸의 살은 욕심이고 뼈는 영혼이다. 그래서 죽으면 영혼만 남는다"면서 욕심을 버리자고 일갈했다. 뼈가 영혼이라면 과음한 뒤 자주 찾는 뼉다귀 해장국은 '영혼 해장국'이겠네. 어 무서워. 소름끼쳐.

산을 오르내리면서 이런 저런 얘기끝에 유선배가 또 "인간세상사 다 새옹지마야"라고 읖조렸다. 아시죠. 변방의 늙은이.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고. 보통 죽을 때까지 몇번 되풀이 되려나. 한 번도 있을 수 있고 수십 번도 있을 수 있고.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종치는 게 최고지 뭐.

노자도 세상에 양면이 있다고 했죠. 화속에 복이 있고 복속에 화가 있다고. 화속에 화만 있고 복속에 복만 있다구요. 돈만 있으면 화도 복이 되고 복은 계속 더 큰 복이 된다구요. 알아서 사세요.

살아보니 '딱' 이더라구요. 저는 학교 다닐 때 민주화운동하느라 땡땡이만 쳐서 그런 직장에는 엄두도 못내었지만 대학 졸업한 1987년쯤에는 증권회사 취직이 '짱'이었거든요. 그때 증권회사 들어간 친구들 지금은 거의 다 나왔죠. 또 작년까지만 해도 국내 굴지의 카드사에 우수한 인력들이 대거 몰렸는가 봐요. 신입생 연봉기준에서도 최고였나 봐요. 대게 같은 재벌회사인데도 다른 계열사 과장 월급을 받았나 봐요. 지금은 카드사가 어려우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겠죠.

최근 카드사의 부실채권이 국가경제에 큰 악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나라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죠. 카드사도 문제지만 가장 큰 책임은 마구 쓴 사람이죠. 남의 돈을 빌려 썼으면 반드시 갚아야지. 돈을 갚지 않는 층이 젊은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언론이나 정부에서 어릴 때부터 경제와 금융교육을 시켜야한다며 열을 올리고 있더라구요.

한국 사람들이 욕한번 듣지 않고 빌린 돈을 제 때 잘 갚나요. 최근까지 언론이나 정부가 빚을 심하게 독촉한다고 카드사를 얼마나 공격했어요. 때렸어요. 팼어요. 그러니 연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밖에. 인터넷 상에서는 '빚 갚지 않고 버티면 정부에서 무슨 대책을 세울 것이다'는 주장마저 나왔으니까. 남의 돈을 썼으면 갚아야지. 자본주의의 근간을 깨는 위험한 발상을 하더라구요. 이게 무슨 '농가부채'인가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카드사의 부실채권이 나라경제의 안정을 크게 깨고 있잖아요.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케이스는 깍아주더라도 원금하고 적당한 이자는 본인이 못 물면 가족이 물든, 누가 물든 반드시 갚아야죠. 언론에서 마구 쓴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그게 무슨 언론이야. 사회약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약자나 보호하지.

하기야 당시 정부는 경기부양에 열을 올렸죠. "막 써라. 막 써". 지금 미국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미국도 이 같은 진통을 다 겪었어요. 똑똑한 정부의 엘리트들이 미국의 시행착오를 왜 되풀이되도록 방치했는지. 그것도 약간의 시행착오가 아니라 나라경제가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지진처럼. 어떤 때 보면 똑똑한 民族같기도 하고 어떤 때 보면 진짜로 '똘' 같기도 하고, 결국은 똑똑은 똑똑인데 '헛똑똑'이 아닌가 생각해요.똑똑과 똘에 또가 같이 들어가 있네. 역시 극과 극은 통해.

특히 머리가 좋아서 행정고시에 합격한 정부의 고위관료 여러분. 경술국치에 버금간다는 충격을 던져준 97년 외환위기 직전에도 "한국의 펀드멘탈, 즉 기초경제는 튼튼하다"면서 오히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역성을 냈죠. 또 작년 경기부양때 마구 남발되는 카드사가 문제된다는 지적이 나와도 "소비만이 살길이다"며 길길이 날뛰었잖아요. 60년대-80년대 고도성장때는 공무원들의 능력과 열정이 크게 기여했다고 하더라구요. 요즘 보면 오히려 방해만 되고 방해가 아니라 망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네요. 앞으로 머리 제일 나쁜 사람들을 경제관료에 임명합시다. 매사 잘 풀릴 것 같아요. 나라에 암적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힘을 완전 더 빼든지. 월급도 적게 주는 관료들을 너무 나무랐나. 모르겠다. 애국심을 갖고 진짜 좋은 나라 만들어보세요. 좋은 보답이 있겠죠. 열심히 하세요. 평소 일도 잘하고 똑똑한 것 같은데 결정적일 때 보면 일을 망치는 사람들을 뜻하는 '공무원스럽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새옹지마'에 대해 할말 많고 한많은 일군의 사람들. 70년대 서울대공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 가서 유수한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고 와서 대덕연구단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시는 분이 있거든요. 지금 땅을 치고 통곡해요. 의사가 되지 못한 게. 그 당시 의사는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하네요. 이제 직장에서 쫒겨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네요. 최근 고등학교 이과에서 공부 좀 잘하면 무조건 의대에 진학하려고 한다면서. 그 놈의 돈 때문에 나라 망하지.

이분과 같은 과학기술분야 연구원들 때문에 나라가 이정도라도 먹고 살지. 고맙습니다. 한번 더 '새옹지마'가 되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늙어서도 행복하세요. 특히 자녀들이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대통령이 과학연구단지에 애정을 기울여야한답니다. 역대 대통령중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 많이 방문했다고 하네요. '독재정치'도 했지만 '과학입국'도 했구만. 노무현대통령이 농촌을 자주 방문하겠다고 했는데, 사실 과학기술연구단지를 더 많이 가야지.

3.

새벽 6시 30분쯤 되자 나도 모르는 사이 환하게 빛나는 해가 동쪽 저편에 떠있었다. 산으로 빙 둘러쌓인 남원시 아영면의 마을과 도로, 큰 저수지를 쳐다보면서 능선을 따라 계속 행군했다. 드디어 인근에서 가장 우뚝 솟아있는 봉화산 (919.8미터)에 도착했다. 새벽 6시 48분. 지나온 백두대간 주능선이 또렷하게 보였고 억새군락 탓에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으로는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고 남으로는 시리봉과 지리산의 반야봉이 까막득히 겹쳐져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바삐 가야 할 백운산이 기다리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의 품을 떠나 처음으로 사방으로 훤하게 탁트이게 보인 만복대와 비슷했다. 봉화산은 '제2 만복대'였다.

봉화산밑으로는 임도가 나있다. 산불이 나면 즉각 대응하기 위해 산에 길을 닦아놓았다고 한다. 10여년전부터 전국 각산에 본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산악카레이스들의 좋은 코스라고 한다.

억새풀이나 키 작은 관목만이 산위를 덮고 있는 마루금을 따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줄지어 행군하는 장면은 언제봐도 멋있다. 징키즈칸 군대인지, 고구려 군대인지, 신라 화랑도인지 아니면 비장의 카드,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7형제인지. 이 능선 길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선이다. 한발은 전라도를 딛고 있고 한발은 경상도를 딛고 있다. 산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구분을 인간 세상에서는 왜 그토록 나누어서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지. 인간은 산보다는 훨씬 한 수 아래. 거대한 산이 속세를 볼 때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까불기는. 한심하기는. 언제 철들래"

넓은 평원 같은 능선 주변에 소나무가 초록색을 내뿜으며 무리를 짓고 있는 모습이 한폭의 풍경화를 연상케한다. 강원도 대관령의 목장처럼. 저 아래 이름 모를 새 6마리가 후루룩 떼지어 날아간다.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위에서 쳐다보니 그것도 볼만하구만. 신선이 인간들의 행동을 쳐다보듯이.

아침부터 새들이 마구 지저귄다. "자연을 깨우는 생명이 소리". 야, 멋진 표현이다. "먼저 일어난 새가 먼저 먹이를 먹는다"는 경귀 때문인지 아침 일찍 일어나기 운동이 벌어졌나. 백두대간 종주를 작년 가을부터 시작한 이래 오늘만큼 새들이 많이 지저귄 적이 없었다. 꿩소리는 알겠는데 이름도 모르는 다양한 새들이 참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며 지저귄다. 깍깍, 지지배배, 짹짹, 어떤 새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리소리 비슷하게 내는 새도 있다. 참 희한하지. 보통 새가 운다고 하잖아요. 왜 그래요.

개미나 물고기는 소리를 내지는 않잖아요. 개, 돼지, 닭, 새는 소리를 내죠. 소리를 내는 동물들은 뭔가 영혼이 있을 것 같아요. 소리 내는 동물가운데는 새소리가 가장 났죠. '인간의 소리'를 제외하면. 소프라노 조수미의 천상의 소리도 있잖아요. '인간의 소리'가 가장 아름답죠. '인간의 소리' 가운데 '잡소리'는 '짐승소리'보다 못하죠. 가령, 일부 정치인들의 말도 안되는 소리나 특히, 특히, 특히,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같은 거. (당황해 하며) 허걱. (식은땀을 흘리며) '신의 소리'를 듣기 위해 종교인들의 기도가 간절하잖아요.

동물의 소리가운데는 새소리가 으뜸이니. 이는 아마 인간이 되기 전의 축생인가 봐요. 불교신자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잖아요. 개는 인간과 가장 가까이 사는 동물이기 때문도 있지만 윤회에서 인간이 되기 직전이 개라고 한다고 해요. 나는 새가 좋다. 모 가수의 노래 " 완전히 새되었네"가 아니고. 좋아하는 이유가 당연. 하늘높이 자유롭게 날고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자유인인데다가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에 내몰린 다른 동물들에 비해 처참한 꼬라지를 덜 보기때문이죠. 아름다운 영혼의 목소리도 가졌고. 가수 이문세'는 말을 닯았는데 이름은 새를 연상시키네.

억새풀과 잡목이 옆으로 쭉 깔린 길을 따라 걸으니 암릉도 계속 이어진다. 지리산 밑자락에서 사라졌던 산죽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산죽은 사시사철 늘 푸르러 또 나지막하게 겸손해서 좋다.

능선을 따라 가다가 큰 바위를 넘어서자 시선을 끄는 꽃이 있었다. 초록색 풀에 하늘색을 띤 길다란 나팔관처럼 생긴 꽃이 달린 앙증맞은 현호색 꽃을 발견했다. 바위틈에 피어나 살포시 수줍음을 타는 듯했다. 주위는 온통 현호색 군락지였다. 나는 현호색인지 호색한인지 모른다. 한약재상을 하시는 손석규선배가 가르쳐주었다. 염소똥 모양의 뿌리는 한방에서 가장 강력한 진통제로 사용된단다. 또 가다 보니 줄기가 실처럼 가는데 눈송이 모양의 흰꽃을 피우고 있는 야생화도 보았다. 머리가 큰 기형적인 사람과 같다고 보면 되죠. 이름을 모르면 무조건 야생화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된다는 거 아시죠. 이헌태씨, 이름이 없는 겁니까 이름을 모르는 겁니까. 당연 후자죠.

학교시절에 제가 받은 교육이 크게 잘못되었어요. 저도 공부를 그럭저럭 잘 한 편이었는데 산이나 들에 나오면 새, 나무, 풀 이름을 잘 몰라요. 도시에서 자란 탓도 있지만 누가 가르쳐 주지를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안 배우고 엉뚱한 거만 배운거죠. 인생과 우주와 자연과 생명을 기술과 지식보다 더 많이 배웠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99%를 배우고 고귀한 1%를 안배우니. 앞 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죠. 자연을 벗삼고 아름다운면서 깨끗한 심성을 길러야 '생명사랑'을 키우고 이것이 결국 '인간사랑'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어요.

교육부장관님, 교육을 확 뜯어고쳐주세요. 자식들하고 산에 들에 가면 겁이 납니다. 무서운 짐승들이 나타날 까 봐서 그런게 아닙니다. 지금 산에 호랑이가 있습니까, 곰이 있습니까, 다 멸종했죠. 나타나면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여간 반가운게 아니죠. 그게 아닙니다, 아니고요. "아버지 저게 무슨 나무에요. 저게 무슨 풀이에요. 저게 무슨 새에요. 뭐에요, 뭐에요"라고 물을까 봐. 쪽팔려서.

이번 산행에서 본 자연의 모습은 3주전과 비슷했다. 아직도 산천은 초록색보다는 갈색이었다. 온 산이 갈색으로 색칠된 가운데 여기저기서 초록색이 첨가되었다. 봄은 같은 봄인 것은 틀림없지만 다만 땅에 초록풀들이 더 많이 얼굴을 내비쳤다. 큰 차이는 보랏빛 진달래가 드문드문 향연을 벌이고 있다는 것. 서울에는 이미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만발해서 상춘객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지만. 산이 높아서 그러나. 늦구만 늦네.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능선 길을 가다보니 여름의 계곡바람이 시원하게 불다가도 뙤약볕의 태양에 땀이 연씬 흘러내리기도 했다. 산행을 계속하다 보니 소나무숲이 사라진 게 아닌가. 지리산 고리봉아래 주촌리 윗산에서 시작된 소나무 군락이 봉화산 밑자락에서 끝겼다. 그 이후에 소나무도 있었지만 참나무계통이 훨씬 많았다.

참 이상하지. 왜 소나무와 참나무가 조폭세계처럼 세력다툼해서 나눠먹고 있나. 해발이나 위도나 비슷한데. 이상하다. 흔히 우리가 부르는 '가랑잎'이 바로 참나무의 잎이라고 하네요. 한때 나의 18번이었는데. "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

지금 이런 노래 부르면 촌스럽죠. 이 기회에 저의 대표적 '18번'을 말씀드리죠. 해마다 자주 바뀐 편이죠. 기억을 되살려보면. 87년 사회에 처음 나왔을 때 최희준의 '하숙생'. 에게게. 쪽 팔려. 그리고 전선야곡. 광야에서, 상록수, 사랑으로, 서울 이곳은. 조용필의 '꿈', 라구요, 꼬마인형. 닐리리맘보. 서울구경등등으로 이어지죠. 이승철, 부활그룹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배우려고 하는데 어렵네요. 전반적으로 '아저씨노래'라구요. 알겠습니다. 이대로 살다 죽을께요. 제가 잘 하는 말 아시죠. "니 인생이나 잘 살어"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창밖의 여자'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등등 조용필의 주옥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거든요. 얼마전에 그의 마누라가 죽자 내 친구들과 "국모상을 당했다" 며 새벽 3시까지 조용필의 노래만 불렀어요. 노래방 노래책에 조용필 노래가 얼마나 많은지 다 못 불렀죠. 해방후에 가장 뛰어난 대중가수가 아닐까 싶네요.

4.

능선은 요철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듯이. '새옹지마'의 쉬운 풀이구먼. 탁무권, 허정균, 손석규선배와 나 4명은 앞에 부지런히 내달리듯이 가는 사람들을 향해 "산에 달리기 하러 왔나. 아름다운 경치구경하면서 즐겨야지"라며 비웃으며 주위의 온갖 풍경에 도취하고 야생화에 흠뻑 빠지고. 우리는 양반이고 앞에 간 사람은 머슴들. 정리가 잘 되네.

빨리 가나 늦게 가나 어차피 종착에는 만나는 것을. 인생도 마찬가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 느긋하게 관조하면서 살아가는 게 가장 행복한 인생. 초조하게 바둥대면서 살아가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인생. 맞습니다, 맞고요.

유영래선배의 '양반론'. 양반은 손으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되고 어쩌고 저쩌고, 매 산행때 마다 '양반은 말이야"가 대략 20번쯤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질리게 듣는다. 공자의 한국이민 후손쯤 되나. 유영래의 유씨가 유교의 유자인가. 나 원 참.

'양반론'의 간판인 공자도 먹을 때 깐깐했더구요. 잠깐 소개하면. "밥은 정한 것을 좋아했고 회는 가늘게 썬 것을 좋아했고 밥이 쉬어서 맛이 변한 것과 생선이 뭉그러지고 고기가 썩은 것은 잡수시지 않으셨으며 색깔과 냄새가 나쁜 것은 잡수시지 않으셨다. 익지 않은 음식은 잡수시지 않으셨고 때가 아니면 음식을 잡수시지 않으셨으며 음식을 썬 것이 반듯하지 않으면 잡수시지 않으셨고 간이 맞지 않은 것도 잡수시지 않으셨다. 고기를 비록 많이 잡수신다하더라도 밥 기운을 누를 정도까지는 잡수시지 않으셨다. 오직 술만은 일정한 양이 없으나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는 드시지 않으셨다. 주점에서 산 술과 시장에서 산 말린 고기는 잡수시지 않으셨고 생강 잡수시는 것은 그만두지 않으시되 많이 잡수시지 않으셨다"

돈도 없었을텐데 음식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요즘이야 집에서 마누라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간이 맞든지 안 맞든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맛있게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쫒겨나죠. 제가 볼 때는 공자가 서기 2003년 한국에 태어났으면 이혼당하기 십상이다. 좋은 시절에 태어났구만.

여러 책에서 공자가 인육을 더러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더라구요. 제자인 자로의 시체가 저민고기로 만들어져 나오자 공자가 이에 질겁을 하고 그 후로 인육을 먹지 않았다고 하네요. 진짜인가. 믿을 수 없네. 만약 그랬다면 인간도 아니지. 하기야 실제로 중국에서는 인육만두가 있었다고 하니. 대국이다보니 하는 짓도 스케일이 크네. 미친 짓도 스케일이 크구.

심상준선배에 따르면 유영래 선배가 지금은 걸핏하면 '양반론'을 펼치지만 10여년 전에는 '하등동물'을 입에 달고 다녔다네요. "하등동물 같은 놈". 그럼 고등어는 고기가운데 가장 고등동물인가.

양반이든 머슴이든 고등동물이든 하등동물이든 우리 '백두대간 한걸음 이어가기' 팀 앞에 영광이 있어라. 이 만남이 영원히. 세계의 카우보이노릇을 했던 1980년대 미국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히트친 연설, "여러분과 나는 운명적으로 만났습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따씩, 운명적으로 만나긴 개뿔이 만나. 운명적으로 안만났으면 좋겠다. 말만 번드르하게 해서. 운명이란 단어가 얼마나 심오하고 철학적인 말인데 그런 정치적인 연설에 사용하면 되나.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태어나고 내가 나온 모든 학교와 내가 다닌 직장과 회사도 모두 운명적 만남이겠네. "하무하무". 정치인들이 유권자에게 운명적 만남을 역설하는 것은 너무 낯간지럽잖아요. 그것도 "하무하무". 장자크 루소가 좋은 말했더라구요. "국민은 선거 때만 자유로울뿐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노예가 된다"고요. 심한 표현이지만 선거 때만 되면 온갖 미사여구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당선되면 나몰라라 한다는 뜻이겠죠. 그렇다고 선거를 6개월에 한번씩 할 수 없잖아요. 하지 뭐. 재미도 있는데. '선거공화국'

'운명'이란 화두. 인생이란 운명지어졌는 것인가 아니면 선택하는 것인가. 두개 들음직한 명언을 소개합니다.

먼저 인도의 사두가 "길을 잃었다"고 한데 대한 답변. "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는 신의 계획에 따라 어딘 가로 가고 있는 중이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넌 분명히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지름길로 가게 하려고 일부러 길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또 인디언의 주술가 '구르는 천둥' 왈.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나는 그것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모든 병과 고통은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지나간 어떤 것, 다가올 어떤 것의 보상이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성장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일이 그곳에 있는 한 우리는 그 길을 따르고 그 길을 존중하고 그 길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 둘다 비슷한 얘기도 같네요. 넘어갑시다.

정치인 연설 얘기가 나온 김에. 미국대통령 가운데 기억에 남는 명연설들이 많잖아요. 링컨대통령은 남북전쟁의 와중인 1863년 게티스버그에서 266개 단어만을 가지고 2분이라는 짧은 연설에서 "(어쩌고 저쩌고)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고 연설했다. 정치인 여러분, 짧은 연설도 역사에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연설은 짧아야 듣는 사람이 편하지. 잉.

케네디대통령은 1961년 취임사에서 "자, 미국 국민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참 말 맞다. 그때야 미국을 비롯 전세계가 순진한 백성들로 가득찼으니 "맞아 , 맞아" 했겠지만 요즘에 그런 얘기하면 "나라가 뭐 도움이 돼야지"라며 오히려 투덜투덜. 조국과 民族에 대한 고마움은 갈수록 약해지니 참 걱정이야. 이헌태, 니나 잘해. 네. 뭐 말을 못하게 하는구만.

1558년부터 45년간 영국을 통치, 대영제국의 기틀을 만든 엘리자베스1세는 마지막 의회연설에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 더 유능하고 더 지혜로운 여러 군주들을 모셨을 것이고 앞으로도 모실 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을 나보다 더 사랑한 군주는 없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얼마나 기가막힌 말인가. 나도 이것을 동창모임이나 회사조직등에서 한번 활용해서 써 먹을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더라구요.

제가 정치부 기자할 때 공부를 쬐금 해보니 미국이나 영국등 정치선진국의 경우, 정치인들의 연설이 문학적이고 너무 감동적이죠. 교육 탓이 아닐까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문학과 철학과 사상작품을 읽고 토론하고 체화한 교육방식과 고전을 제대로 읽지 않고 교과서만 달달 외우기만 외운 암기식에 찌든 교육방식의 차이가 아닐까요.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을 공격할 때는 "저 사람하고 10년 동안 일해 보았지만 감동을 받은 적이 없어"라며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데 비해 우리는 "저 새끼 돌대가리더라"라고 원색적이고 직설적이죠. 그러니 피튀기게 싸울 수 밖에. 유아 및 청소년기의 교육을 확 뜯어고쳐야 합니다. 첫째, 자연과 벗하는 생명교육. 둘째 창조성을 키우고 사고폭을 깊게 하는 독서교육. 셋째 토론과 승복문화를 가르치는 민주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 아시죠. 비폭력 흑인해방운동을 펴면서 196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68년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피살되었죠. 연설가운데 단연 압권은 1963년 워싱턴 DC 링컨기념관앞에서 25만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행한 'I have a dream'의 내용이 담긴 연설이죠.

이날 연설은 "우리는 명복뿐인 수표를 현금으로 바뀌기 위해서 수도 워싱턴에 모였습니다"로 시작되었죠. 100년전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했지만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죠. 헌법과 독립선언서의 화려한 문구, 생명권과 자유권, 행복추구권의 약속어음이 부도처리 되었다는 뜻.

"(전략)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되는 꿈입니다.---"

또 하나 멋진 연설. " 뉴햄프셔의 높은 산꼭대기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 콜로라도의 눈덮힌 로키산맥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미국의 모든 산허리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킹 목사의 연설은 '영혼이 깃든 시' 같죠. 킹 목사의 연설핵심은 "우리는 물리적 힘에 대하여 영혼의 힘으로 대처하는 당당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 이 연설 덕분에 이날 집회는 우려했던 소요나 충돌없이 너무나 평화적으로 진행되면서 백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으며 주요언론에서도 당초와 달리 대서특필했대요.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위로 평가되었다고 하네요.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으로 이라크를 초토화시켜 우리를 '충격과 공포'로 몰았던 미국 부시대통령이 지난 대선때 킹 목사의 연설을 배꼈죠. "나는 무슨 무슨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신에 "나는 무엇 무엇을 하겠습니다"며 'I will?'이란 표현을 동원했죠. 연설때 노예해방의 기수인 링컨대통령이 공화당출신이었다면서 이전 공화당후보와 달리 흑인표도 구애를 했죠. 진짜 본심인가. 선거에 이길려고 별 짓을 다하네. 원래 선거는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구요. 알아서 사세요.

5.

지리산국립공원을 나오면서 시작된 남원시를 지나 이제야 함양군까지 올라왔다. 좌로는 장수면 장수읍이고 우로는 함양군 백전면이다. 오전 8시 30분 아침을 먹었다. 라면에다가 김밥, 맛나게 먹었다. 쐬주 한잔을 곁들여서. 심상준선배는 가끔 계룡산에서 만들어왔다는 생식 '단' 을 먹는다. 생식재료를 갈아 꿀을 넣어 건조시켰는데 단추크기만 하다. 한봉지에 5개 정도 들었는가, 하여튼 한끼 식사대용으로 충분하단다. 맛도 괜찮으니 살빼는 사람에게 좋겠구만. 도인들이 먹던 것을 이제 도시인들도 먹어도 되겠구만. 도시인을 줄이면 도인이네. 나도 도인이네. 말장난하지만. 한문이 틀려. 네. 심선배는 이 단을 '동결건조된' 게 아니라 '생명건조된' 것이라고 극찬한다.

도 닦는 사람들에 따르면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과음을 하지 않는다면 도시인들은 하루한끼 정도의 음식분량만 먹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과식한 뒤 억지로 빼느라 야단법석이고 몸을 가만히 놔주지를 않는다. 몸을 혹사시키고 있다. 앞으로 '단' 같은 생식음식이 개발되면 크게 히트칠 것으로 보인다. 술이나 음식 같은 저급문명이 사라지고 차원 높은 학문이나 성찰이라는 고급문명이 꽃피우면 밥 먹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 아닐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하루에 먹는 시간이 총3시간인 사람하고 하루에 먹는 시간이 총30분 사람하고 비교하면 10년은 더 사는 셈이다. 이헌태, 니는 먹고 자는 시간을 자꾸 줄이라고 하는데 실천이 그렇게 쉽나. 그것들은 삶에 있어 기쁨의 원천들인데. 니나, 그렇게 살아라.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그것을 실천하면 제가 도인이죠. 도시인은 맞지만.

오전 8시 40분 다시 길을 나섰다. 한밤중에 산행을 시작한 지 벌써 4시간이나 지났다. 지나온 능선을 보니 참으로 멀리 왔다. 인생도 마찬가지, 한발짝 한발짝 부지런히 한참을 가다가 뒤돌아 보면 언제 왔느냐는 식으로 참으로 멀리 온 삶의 흔적들, 또 다시 진전할 수 밖에 없는 삶의 나날들. 잠깐 숨만 돌린 뒤 바쁜 발걸음을 또 내딛는다. 목표를 향해서. 죽음을 향해서.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진시황이 장생불로초를 구하느라 애쓰고 온갖 좋은 약재를 먹어도 불과 50세까지 밖에 살지 못했으니. "니도 오래 살 수 알았지. 택도 없는 소리지". 그게 인생이야. 따씩. 그래도 삶이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심한 것 같아요. 또 1년이 사라지고 즉 죽고 유년시절이 죽고 청년시절이 죽고 이런 식으로 세분화하면서 매일 아니 매 순간이 죽고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매순간 변화하는 것이고 이는 매순간 죽음이 계속된다는 것이고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네요. 그러면 매일 매일 아니 매분 매초마다 탄생의 신비와 환희에 빠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물학적으로 봐도 우리 몸의 세포들은 매일 죽어가지만 그들을 위해 세포별로 장례식을 치르지는 않잖아요. 한 세포의 죽음이 다른 세포의 탄생이니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했죠. 그래서 죽음을 수용하고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해야 한다는 논리로까지 비약될 수 있죠.

이헌태, 이론이 그렇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나. 알겠습니다. 난 또 매 순간마다 탄생의 기쁨을 노래하라고 하는줄 알고요. 그러면 죽음을 슬퍼할 시간도 없이 탄생의 기쁨만 노래하다가 인생 종치겠다. 종교가들이나 명상철학가들은 이럴 때 보면 삶에 죽음을 갖다붙이며 너무 의미를 부여해서 피곤하단 말이야. 인생이 죽음을 향해서 간다는 것은 말은 맞지만 너무 서글퍼잖아요.

죽음을 강조해서 뭔가 깊은 성찰을 깨닫는 종교인들이나 명상철학자들에게 맞는 말이지. 혹시나 우리 같은 속세 범인들에게 죽음을 자꾸 이야기하면서 겁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죽을때 죽더라도 삶의 환희를 느끼는 게 맞다고 보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행군도중 유영래선배가 딱다구리소리가 나자 뜬금없이 "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라는 노래를 부른다. 밤마다 몸부림 치는 여인네의 통곡소리인가. 여러분 이 노래가 '잡노래' 같죠. 맞긴 맞는데요, 엄청난 진리가 들어가 있거든요. 만공 종헌스님은 이 노래로 입이 벌어지는 설명을 달았죠. "범부 중생은 부처와 똑 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즉 누구나 원래 뚫린 부처 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터구리들이다. 뚫린 이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불법이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소위 탐 진 치의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이다" 진짜 야한 노래에서 불법의 진리를 찾았으니. 대단한 스님이야.

광대치를 지나자 해발이 높아지면서 가을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숲에는 잎들을 전부 떨군채 휑한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참나무들이 울창했고 대간 길에는 퇴색된 낙엽이 퇴비처럼 두껍게 쌓여있었다. 숲 전체의 분위기가 겨울이 오기 직전 같아 계절이 헷갈렸다. 힘들게 치고 올라가니 저 아래 중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건너편은 백운산이다. 어떻게 저 아득한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나. 아휴, 죽었다. 이헌태, 죽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만. 일반 사람들도 많이 쓰는데요. 저는 늘 "국민과 함께". 이헌태, 그말도 그런데 쓰는 말이 아니야.

겨우 겨우 정말로 겨우, 산 정상 부근에 오르자 오른쪽에는 대간길에서 3백미터 벗어난 월경산(980.4미터)이 우뚝 서있다. 이름도 참. 넘어가겠습니다. 일행은 저 발아래 중치를 향해 하산길에 나섰다. 참나무가 빽빽했고 참나무에 기생하는 새집모양의 겨우살이가 푸르게 잘 자라고 있었다. 야비하고 치사한 기생충 같은 식물. 보라빛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피기 시작했다. 진달래는 잎보다 꽂이 먼저 핀다고 하네요. 성질 급하기는. 철쭉은 진달래꽃보다 대게 한달쯤 후에나 핀다고 한다. 5월이나 되어야.

촌놈이 아니라서 진달래와 철쭉을 참 구별하기 쉽지가 않더라구요. 비슷비슷해서. 같은 진달래과로서 사촌형제간이니. 진달래는 먹을 수 있어 '참꽃', 철쭉은 먹을 수 없어 '개꽃'이라고 한다네요. 같은 진달래과인데 어떻게 그렇게 팔자가 다른지. 진달래 꽃 하나를 직접 따서 입안에 넣고 씹어보니 입안에 향내가 화하게 퍼지면서 참 맛있네요. 예전에 배고팠던 시절 진달래를 따먹었다고 하네요. 저는 그런 적은 없었지만. 노란 팝콘이 흩뿌려져있는 듯한 생강나무(새로 난 가지를 꺽으면 생강냄새가 난다고 해서)도 눈에 띕니다. 산수유로 착각하기 쉽다고 하네요.

생강나무는 동백나무 또는 산동백나무라고 하는데 겨울철에 붉은 꽃을 피는 동백나무와 다르다고 하네요.김유정의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나무는 바로 이 생강나무라고 하네요. 물론 생강나무 열매기름도 동백기름처럼 여인네 머리에 발랐다고 하네요. 같은 나무 이름인데 다른 나무가 있구만. '동명이인'이 아니고 '동명이목'이구만.

산아래에 미끈하게 쭉 뻗은 일본산 소나무, 소위 왜송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일부러 심었나.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그런게 아니고 소나무도 한국산 소나무가 더 멋있는 거 같아요. 절개와 기품, 철학이 담겨있는 것같아서. 송이버섯도 한국산 송이가 가장 향기가 좋고 맛이 있다고 하네요. 한국이야 만세다.

6.

오전 10시 22분, 중치에 이르렀다. 이정표에는 해발 650미터, 복성이재로부터 12.1킬로미터, 앞으로 갈 영취산까지 8.2킬로미터로 적혀있다. 이번 산행계획량의 반을 더 지났구나. 미리 도착한 분들이 양말을 벗고 편하게 쉬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밑이라서 그런지 따스한 햇볕이 마구마구 내리쬐면서 나그네의 긴장을 풀어준다. 간식을 먹었다. 오렌지도 나왔다. 나는 달걀과 찹살떡을 준비했다. 개그콘서트의 히든카드 '우격다짐' 김정수가 아니고 나의 히든카드 삶은 달걀. 나는 늘 삶은 달걀 10개를 가지고 온다. 인기다.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내가 직접 삶는다. 지난번에 반숙이 잘 되었다며 칭찬을 들었다. 내가 산행을 위해 집을 나설 때 하는 사전준비작업 두가지. 달걀 삶는 것, 청소 내지 설거지, 간혹 식사준비. 그래야 마음 편하게 집을 나선다. 불쌍한 이헌태. 산행이 죄인가. 산악인들은 범죄자집단인가. 중요한 포인트. 마누라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고 이헌태 스스로 미안해서 한다. 인간이 되었구만.

모두가 박장대소한 유머하나 소개. 내가 삶은 달걀을 내놓자 평생 농담한마디 하지 않을 도인 같은 허정균선배가 능청스럽게 왈. "삶은 달걀", 즉 "라이프 이즈 에그" . 썰렁한 유머인가, 포복절도할 유머인가. 여러분의 판단은 어떠하십니까. 삶은 달걀처럼 둥글둥글 살아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두들 23분 가량을 쉰 뒤 오전 10시 45분에 산행을 다시 올랐다. 초입에는 소나무와 산죽,진달래가 영접했다. 이번 코스에서는 백두대간 종주팀을 많이 만났다. 5팀 정도나 될라나. 중치에서 백운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멀리 쳐다봐도 아찔하지만 실제로도 지리산의 품을 떠난 뒤 가장 힘든 길이었다. 백운산까지 장장 2시간 30분가량을 오르막만 있었으니 고역이고 고통이었다.

백운산에 올랐을 때는 진이 다 빠졌다. 땅만 쳐다보고 1부터 100까지를 세면서 한걸음 한걸음 터벅터벅 올라가는 소위 '100세기 고행'이 수없이 동원됐다. 자기와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여기서 지면 이헌태, 인생은 진다"며 입을 깨물며 한발짝 내딛고 또 내딛었다. 이헌태, 의미부여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저는 원래 그렇게 살아요.

고통을 잊는 법 가르쳐 드릴께요. 인디언들의 방법이 있고 티벳스님들의 방법이 있습니다.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죠. 마음을 먹는다, 맛이 어떨까.

티벳스님들도 추운 벌판에서도 얼어죽지 않고 오히려 땀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이름하여 '열기요가'. 그 테크닉을 소개합니다. 티벳의 밤은 영하로 떨어지면 살을 에는 듯이 춥고 눈까지 내리지만 티켓 라마승은 벌거벗은 채로 가만히 서있다고 하네요. 일반 사람들 같으면 얼어죽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자신의 육체가 불덩이 속에 있고 이에 땀을 뻘뻘 흘리는 장면을 상상하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 '상상력'은 힘이고 에너지이고 마음은 상상력을 통해 움직이며 육체도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 우리 나라로 보면 '정신일도 하사불성' 방법이죠.나는 그렇게 못할 것같다. 얼어죽기 싫어.

인디언들은 발톱을 뽑는 풍습도 있나봐요. 그들만의 고통 참는 법. 인디언들은 몸의 마음을 잠재우고 대신 몸바깥으로 나간 영혼의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고통을 바라본다. 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육체의 마음뿐이고 영혼의 마음은 영혼의 고통만을 느낀다. 쉽게 얘기해서 아픈 생각하지 말고 딴 생각한다는 것인데. 우리 같은 사람은 잘 되겠나 모르겠네.

마음하면 아시죠. 원효대사가 동굴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꿀맛처럼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라는 것, 그래서 "역시 마음이야" 라며 도를 깨우쳤다는 사실. 또 무지랭이 나무꾼출신인, 선종의 육조 혜능의 원초적인 깨달음도 마찬가지. 스님들이 "저건 깃발이 펄럭이는 것일세", "아니야 저건 바람이 깃발을 움직이는 것이니 바람이 펄럭이는 것일세"라며 서로 다투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에 혜능은 "그건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다. 펄럭이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다".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에서 해결된다는 것이죠.

보너스 하나. 당 고종때의 신동인 왕발은 '등왕각서'에서 "광주땅에 탐천이라는 샘이 있어 이 샘물만 마시기만 하면 욕심이 생긴다고 하지만 내 마음만 결백하다면 이 물을 마셔서 도리어 맑고 깨끗해짐을 느끼지 않겠는가".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와 정반대로 명분에 집착한 공자의 사례. 공자가 어머니를 이긴다는 뜻의 승모라는 마을에 닿았을 때 마침 날이 저물었으나 그냥 통과했고 목이 마른 상태에서 도둑샘이라는 뜻의 도천이라는 샘을 지날 때 목이 말랐으나 그냥 통과했다. 단지 이름 때문에. 공자 선생님 ,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그러니까 공자님에 대해 여러가지 안좋은 얘기가 나오지.

이럴 때 보면 공자님은 답답하죠. "공자 같은 소리"하면 두가지로 쓰이는 거 아시죠. 하나는 예의범절에 맞는 소리, 하나는 현실 모르는 속터지는 소리. '공자스럽다'는 말은 전자인가요. 후자인가요. 시의적절하게 알아서 써야지 뭐. 버릇없이 구는 '검사스럽다', 막무가내 밀어부치는 '부시스럽다', 도와주니 배신한다는 '놈현스럽다'. 다들 우찌 그리 되었노. 이 표현에는 가치가 개입된 말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근래 시중에 대유행인 '이헌태스럽다' 아시죠. 착하고 유머있고 능력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을 뜻하는 거. 처음 들었다구요. '개인피알'시대니까. 알겠습니다.

일체유심조와 비슷한 서양방법인 '쿠에암시법'을 하나 소개. 에밀쿠에의 주장은 "나는 이길 것이다라는 말을 천번 되풀이하면 결국은 이기게 된다"는 것. 암시와 최면에 바탕을 둔 것이겠죠. 그만큼 의지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성과를 거둔다는 설명으로 받아들이죠. "나는 로또복권에 당첨된다, 당첨된다" 천번이 아니라 만번을 해봐라 되는가. 총각여러분, "나는 쭉쭉빵빵하고 결혼한다, 결혼한다"고 천번 반복. 그런 것은 안된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나.

7.

산행길 주변은 찔레꽃, 다래넝쿨, 제비꽃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산전체를 둘러보니 갈색의 참나무, 초록색의 소나무, 노란 생강나무, 보라색 진달래, 산도 총천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가파른 오르막길만 계속되자 숨이 차 헉헉댄다. 놀라운 일을 겪었다. 나무와 내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다시피 인간은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나무는 정반대다. 나무는 식물의 대표, 인간은 동물의 대표. 대표선수끼리 숨을 주고 받고 있네. 나무가 알고 보니 굉장한 존재구만. 나무를 우습게 볼 게 아니네. 나무에 대한 찬양시가 많은 것은 당연.

잠깐. 인간이 동물의 대표라는 표현이 너무 심하다구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떻게 동물로 취급되냐구요. 동물하고 다른 차원이지. 원숭이하고 같은 계통으로 분류하면 안된다구요. 그런데 왜 쥐새끼, 개새끼처럼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많나고요. 저는 잘못 없습니다. 인간 여러분, 훌륭한 인간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인간 이하의 행동, 즉 짐승에 가까운 행동은 하지 맙시다.

'나무예찬시' 둘. 조이스 킬머의 시. "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 같다/ 대지의 달콤한 가슴에 / 허기진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하루종일 신을 우러러보며 /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에는 머리위에 / 개똥지빠귀의 둥지를 이고 있는 나무/ 가슴에는 눈이 내려앉고/ 또 비와 함께 다정히 살아가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가 짓지만 / 나무를 만드는 건 시만이 할 수 있는 일"

크리족 인디언의 예언자의 시,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뒤에야/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인간이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좋은 말 하나 더. 고문진보에 보면 여여숙은 '극기명'에서 " 천지간에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다 천지를 부모로 하여 오직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으니 모두가 한 형제요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서로를 해치며 어질지 못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일까". 알겠습니까. 모든 생명을 사랑합시다.

산정상으로 향할수록 바람이 더욱 세게 불었다. 늦가을 날씨같았다. 산위에는 진달래는 보이지 않고 노란색의 생강나무가 더러 더러 눈에 띄었다. 진달래는 산위에서 추워서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인 꽃인 진달래가 그 정도 겁내서.따식.

정오를 훨씬 넘긴 오후 1시 26분쯤, 백운산 (1278.6미터)에 당도했다. 얼마나 이를 깨물며 힘들게 올라왔는가. 대형 '브이'자 계곡 코스를 지나온 것이다. 한국의 산 이름가운데 가장 흔해 빠진 게 백운산이다. 흰구름이 떠다닌다. 차, 기가 막힌다. 남한에서 이름난 산만해도 30여개가 된다고 하네요. 강원도 영월의 백운산, 원주의 백운산,전남 광양의 백운산, 전북 무주의 백운산.경기도 포천의 백운산. 허정균선배가 또 필명을 바꾸었어요. 백운으로.

백운산에서 주변을 살펴보니 왼쪽으로는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1236미터)이 우람한 어깨선을 드러냈고 북쪽으로 육십령, 남덕유산(1507미터)을 품어 안고 있는 덕유산의 웅장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리산을 떠나고 나서 처음 맞는 큰 산악지역이다. 아 덕유산. 그 지리하던 지리산권이 지나고 마침내 덕유산권에 들어왔다. 지혜가 많은 산에서 덕이 많은 산으로 바뀌었다. 지혜도 좋고 덕도 좋고.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여덟번째 행군 끝에 이제 지리산권이라는 한 채프터의 장을 접었다. 중치까지 지리산권, 백운산은 덕유산권에 속하는 모양이다. 빨리 가자 설악산 향로봉까지. 마음은 벌써 향로봉에 가서 대장정 종료의 만세를 부르고 있는 듯하다.

설악산 향로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남한쪽 백두대간은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등 7개권역으로 나눠진다. 총계 도상거리 672㎞ 실제거리 1,240㎞. 이제 겨우 전체의 10분의 1을 넘겼다. 병에 반쯤 든 물도 "이제 겨우 반이야"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벌써 반이 되었네"라는 긍정적 시각이 있듯이. 벌써 10분의 1만큼 왔네. 20분의 1도 아니고.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가자 가자.

우리 일행이 걸어온 지리산권을 대충 정리하면

" 지리산(천황봉)→장터목산장→촛대봉→세석산장 4.4/ 8.1

세석산장→선비샘→벽소령→연하천산장→총각샘→토끼봉 11.5/ 21.2

토기봉→뱀사골산장→임걸령→노고단→고리봉 →헬기장 12.8/ 23.6

헬기장→만복대→정령치→수정봉→입망치 13.5/ 24.9

입망치→여원재→고남산→상사바위→매요마을 11.5/ 21.2

매요마을→이실재→새맥이재→시리봉→복성이뒤재→꼬부랑재 11.6/ 21.4

꼬부랑재→봉화산→광대치→월경산→중고개재 11.8/ 21.8

소 계 77.1/ 142.2"

(이 자료는 김경순씨가 '백두대간 한걸음 이어가기'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것)

백운산정상에는 여러 팀의 아저씨,아줌마들이 이곳 저곳에 자리를 깔고 화려한 오찬을 하고 있었다. 상추쌈을 먹는 분들이 제일 부러웠다. 백두대간팀이 아니고 인근 지역에서 올라오신 분들도 많았다. 일행은 김밥과 초밥을 나눠 먹고 풀섶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나는 햇볕이 너무 강렬하게 내려 쬐는 통에 양산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잠이 바로 찾아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드르렁 드르렁" 코를 심하게 골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아줌마가 "저 아저씨 산에서도 코골며 자네"라고 한마디 거들고 갔단다. 우리 종주팀 사이트에 나의 자는 모습이 띄웠대요. 오랫동안 등산을 했지만 높은 산 정상에서 코 골며 자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높은 산 정상을 안방처럼 생각하고 잤으니 나도 이제 신선의 경지에 올랐구만. 한마디로 '신선놀음'

한숨 자고 일어나니 몸이 훨씬 가벼워진 듯하다. '꿀잠', '단잠'이었다. 허정균선배가 인대에 이상이 생긴 심상준선배와 함께 오느라 늦게 도착했다. 보통때는 백두대간팀에서 내가 늘 꽁지에 뒤쳐져 왔는데. 나는 씨말이라는 뜻의 종마(種馬)가 아니라 늘 끝에 온다는 종마(終馬)구만. 늦게 오신 분들이 점심을 먹는 사이는 휴식을 취했던 사람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오후 2시 14분.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니 덜 힘들겠지. 워낙 올라오는데 질려서.

백운산 하산길은 나보다 키가 더 큰 산죽이 끝없이 펼쳐졌다. 산 윗부분이 산죽으로 뒤덮여있었다. 한국 최대의 산죽 군락지인가. 한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의 길이 나있어 전진할 수 있었지 만약 길이 나있지 않았으면 밀림처럼 뚫고 나갈 뻔했다. 길을 만들어 주신분 감사합니다.

서산대사의 시 한 수가 생각난다. "눈 쌓인 벌판을 걸어 갈 때는/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이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되리니". 맞습니다, 맞고요. '선구자'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자식이 부모를 따라하고 후배가 선배를 따라하고 얘들이 어른을 따라하고. 그런데 따라하면 안된는 게 있어요. 이헌태의 백두대간종주기 같은 '잡글'은 이헌태로서 끝내야지. 겸손이라구요. 어떻게 알았어요.

앞서가는 사람들은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을 늘 생각하자는 얘기. 정치,경제,사회,문화,체육 모든 분야에서 적용되면 인간세계가 아니고 신선 내지 더 나아간 신의 세계지 뭐. 뒷사람을 생각하기가 쉽나. 뒤에 오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든 말든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 뭐.

하산길은 바로 가파르게 내려간 코스가 아니고 등선을 몇 차례나 오르고 내리는 일이 계속 반복됐다. 햇살이 따갑게 비쳐지면서 무더운 여름날씨 비슷했고 땀이 연씬 흘렀다. 시쳇말로 개기름, 육수가 흘러나왔다. 땀은 사람 기름인데 왜 개기름이라고 하지. 지존인 인간에게서 기름이 나오면 기분 나빠서 그런가. 이런 기름은 노폐물이기 때문에 마구 흘러 나와야 해요. 보통 10시간쯤 산행하면 개기름이 거의 다 나와 나중에는 땀이 찐득 찐득하죠. 산행을 마치고 얼굴을 씻으면 그렇게 깨끗할 수 없거든요. 전문산악인들을 보면 피부가 약간 탄데다 불필요한 개기름이 다 빠져 건강해보이고 윤기가 나잖아요. 이에 비해 도시의 샐러리맨들의 얼굴은 화장품을 발라서 겉만 번드르하지 윤기가 없고 퍼슥퍼슥하고 핼쑥하잖아요. '건강미인'과 '포장미인'의 차이이죠.

산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다득하게 밑에 뱀 모양의 에스자 도로가 보였다. 저기까지 내려가야 차가 있구나. 또 한숨이 나왔나. 백두대간 산행은 늘 너무 너무 좋지만 이렇게 너무 너무 고역의 순간도 있다. 산행은 인생과 어떻게 그렇게 같을 수가.

계속 이어지는 산죽 숲을 헤치면서 정신없이 한참을 가다보니 선바위고개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오후 3시 26분. 이정표에 따르면 백운산으로부터 3.4킬로미터를 지나왔고 바로 위 영취산까지 0.4킬로미터가 남아있었다. 유영래대장이 백운산정상에서 1시간쯤만 하산하면 된다고 하더니. 새빨간 거짓말. 아직도 갈 길이 먼듯했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기니 발이 너무 시원했다. 약간 쉬었다. 발, 양발, 신발 다 발이네요.

그러면 탁발도 발인가. 부처님도 탁발 생활했죠. 발로 걸어 다니면서 했으니 말되네. 말이 탁발이지 거지지 뭐. 부처님도 거지였다는 뜻. 원래 출가자는 모든 의식주를 탁발걸식에 의해 유지되었고 비구 비구니라는 말속에는 걸식하는 사람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네요.

출가자의 걸식과 거지의 동냥은 얻어먹는 것은 같지만 큰 차이. 어떤 농부가 "나는 일을 해서 곡식으로 끼니를 때운다"며 은근히 뼈있는 말을 하자 부처님 왈. " 내게는 마음이 밭이고 믿음이 종자요 계가 바로 비입니다. 지혜는 쟁기요 반성은 쟁기자루요 선정은 쟁기를 잡아매는 줄이지요. 바른 생각은 쟁기끝도 되고 채찍도 되고. 내게 있어서 노력이란 쟁기를 이끄는 소와 같다. 이것이 반야 깨달음의 경지로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오. 이와 같이 경작한 열매는 영원히 죽지않고 존재하고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경작의 의미라고 할 수 있소. 그렇게 때문에 나는 마음의 밭을 경작하는 사람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모르면 할 수 없고.

8.

드디어 오후 3시 46분 영취산(1075미터)에 도착했다. 눈앞에 남덕유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영취산 정상에는 백두대간 설명판이 있었는데 들여다 보니 영취산이 평범한 보통산이 아니었다. 이름도 뭔가 신령스러운 감을 던져주고 있지만. 아시다시피 영취산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 하신 산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곳곳에 영취산이라는 이름이 한둘이 아니다. 산정상에 비로봉이 많듯이. 다들 '불판'이구만. 불교의 숨결이 산천 곳곳에.

돌탑이 두개 있다. 나도 자그마한 돌 하나를 얹으며 내가 현재 살아 숨쉬고 있는데 대해 한없이 감사를 드렸고 백두대간 무사종주를 기원했다. 돈이나 권력, 명예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거렁뱅이가. 자손심 상하지.

백두대간은 시조산 백두산에서 장쾌하게 뻗어내려 넘실대는 남해바다를 목전에 둔 지리산에서 멈춘다는 사실 다 아시죠. 주요한 분기점이 있더라구요. 남한으로 내려오다가 태백산에서 한차례 갈라지죠. 동해안을 따라서 낙동정맥이 형성되어 있고요. 또 백두대간이 속리산에서 분리되죠. 문경새재를 거쳐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의 두갈래로 나눠지죠. 또 영취산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주화산까지 뻗어 북으로는 계룡산이 있는 금남정맥과 남으로는 무등산이 있는 호남정맥으로 갈라지죠.

한국의 지형은 '1대간 (백두대간) 1정간 (장백정간) 13정맥'을 이루고 있죠. 10개의 큰 강을 만들기도 하고. 중요한 포인트. 영취산 부근에서 남녘의 큰 강이 두개나 발원된다. 분수령이죠. 북으로는 금강, 남으로는 섬진강. 영취산은 큰 산맥의 분기점과 큰 강의 분수령. 와 대단한 산이네.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지리시간에 배운 내용을 철저히 현장에서 확인하고 있다. 나이 42살.불혹을 넘긴 나이, 불혹이 아니라 여분의 인생을 사는 '부록나이'라구요. 에이 무슨 말씀을. 직장생활하는 데 아무 필요도 없는 이 인문지리학에 이헌태가 이렇게 감탄을 하다니. 인문지리학이 이렇게 인간적이고 멋진 학문인줄 몰랐다. 모두들 돈 벌려고 눈이 벌겋게 충혈된 세상 잘못 만나 푸대접에 고생하고 계시죠. 이 모든 책임이 저한테 있는 것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인문지리학자가 대통령이 되지 않는 한.

무령고개쪽으로 대략 30분쯤 내려가자 전세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고갯길 도로에 도착했다. 오후 4시 30분쯤. 이번 산행에서는 특히 물이 부족해 다들 갈증에 시달렸다. 내려오니 샘터가 있었다. 물이 시원하고 기가 막히게 맛있어 배 터지게 마셨다. 이헌태가 가만 있었을 수 있나. 웃통을 벗고 등욕을 했다.

'물부족'사태를 짚고 가겠습니다. '식수부족'. 서울시민들 식수부족, 그런 어마어마한 사태가 아니고 등산할 때 물이 부족한 것 말입니다. 입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갈증의 고통. 산밑에 내려가서 시원한 맥주한잔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물이 떨어지니 주머니에 돈 10만원, 억만금이 있으니 무슨 소용인가.

좋은 말씀 몇 개 소개할께요. 배워서 남주나. 불교의 아함경에 나오는 얘기. 어떤 사람이 산길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어느 각도에서 날아 왔을까", "어떤 종족이 쏘았을까", "무슨 풀에서 뽑은 독약을 묻혔을까"등등 생각하는 틈에 독약이 스며든다는 것. 부처님 말씀, " 먼저 네 몸에 꽂힌 독화살을 뽑아라". 당장 필요한 일이 긴요하다는 뜻. 누구나 그렇게 하는 뻔한 말씀이지만 부처님이 하시니 더 그럴듯해 보이네.

장자의 '외물편'에 나와있는 '철부지급'이란 고사성어. 장자도 도찾다가 곤궁한 생활을 한 대표적 케이스. 지방관의 직책으로 잘 나가던 친구를 찾아가 돈을 빌리러 갔다. 그런데 이 친구왈 "이삼일만 있으면 관에서 받아들이는 세금도 있고 그때가서 삼백금 정도는 융통해줄수 있는데"라며 속을 뒤집는다. 장자는 당장 배고파 죽을 지경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찾아왔는데. 성질이 나서 "고맙다"며 건성으로 답한 뒤 " 그런데 내가 여기 오는 도중에 나를 불러 멈추게 한 놈이 있었단 말야. 누군가 하고 둘러 보니까 길 한복판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 붕어가 한 마리 있지 않던가. 그놈이 '이런 곳에 빠져서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고통스러워 죽겠습니다. 몇잔의 물을 떠 가지고 오셔서 저를 구해주십시요'라고 말하지 않나.나는 귀찮아서 '좋아 내가 이삼일만 있으면 남방의 오와 월에 유세를 가게 되었니까, 그 길에 서강물을 잔뜩 갖다 줄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라'고 말했네. 그랬더니 붕어 한마리가 '나는 지금 꼭 필요한 물 몇 잔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습니다. 물 몇잔만 있으면 생명을 건질 수 있는데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좋습니다. 후에 어물전에서나 저의 시체를 찾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지 않던가. 방해 막심했네. 실례하이"라고 했다네요. 지금은 제가 담배를 끊었지만 식사후 담배가 너무 너무 말릴때 싸구려 담배 꽁초하나가 비싼 담배 한 보루보다 더 귀하다는 뜻. 쓰레기통 뒤져 꽁초담배 피우던 시절 한번씩은 다 계시죠.지금 생각하면 미친놈이지.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한마디 걸쳤더라구요. "나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이고,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 궁금하죠.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 지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싱겁구만.

퀴즈하나 낼 께요. "세상에서 가장 큰 떡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정답은 "입안에 있는 떡". 선종의 도응스님이 말씀하셨죠. 즉 자기 입에 들어가야 진짜 떡이지. 그림 속에 떡이 엄청나게 많으면 무슨 소용. 자신의 입에 들어가야 떡이지. 도응은 깨달음도 마찬가지라고 했죠. 아무리 작은 깨달음이라도 자기 스스로 깨달은 것이 가장 큰 깨달음이라고 했죠.

저의 철학, "인생은 추억쌓기"라는 말도 자신이 직접 희로애락을 겪어야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경륜이 되고 삶으로 체화된다는 뜻이죠. 무조건 당당하게 정면에서 부딪히며 살아갑시다.물론 차는 피하고. 차를 박으면 잘못하면 죽어요.

9.

전세버스를 타고 내려오다가 인적이 없는 장계계곡에 들어가 남자 10명이 홀라당 벗고 집단샤워를 했다. 계곡물이 매우 차가웠지만 땀과 속세의 때를 벗어 내어서 그런지 너무 상쾌했다. 모두들 씻고나니 인물들이 훤했다. 잘 생겼구먼. 등산하면서 땀에 절인 뒤 계곡에서 씻고 나면 사우나에서 땀 뺀 것과 같은 기분이죠. 개기름이 다 빠진 후라 다들 말끔하죠. 유일한 여성 이수연씨는 차안에서 기다리고. 후회할 걸. 남자로 태어나지. '산행후 계곡욕', 이 즐거움을 누가 알겠느냐. "너희가 개맛을 알지는 몰라도 계곡욕의 맛은 모를거야". 개나 계나 비슷하구만.

차를 타고 장수군내 도로를 통해 이동하다보니 대곡호가 나왔다. 호를 둘러싸고 벚꽃 진달래 개나리가 활짝 피어있고 갖가지 새들이 날아다니면서 춤을 추고 있어 너무 여유롭고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옆에도 벚꽃과 진달래가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들과 밭에는 봄기운이 올라오고 있었으며 땅을 갈며 씨를 뿌리는 농부들도 보였다.

지나가다 보니 논개묘지와 커다란 논개입상이 보였다. 논개생가라고 한다. 행정지명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 논개는 기생출신,전국의 룸싸롱및 단란주점등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분들 성지처럼 일년에 한번씩은 찾아보도록. 일명'성지순례'. 우리 술집여성들도 잘만하면 사당을 지어주네. 나도 건수 하나 올려야지라고 생각하시는분. 그런데 아쉽게도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양반집 출신이라고 한다. 장수현감부인의 병수발을 들다가 최경희장군과 결혼했고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를 맡았던 최장권이 진주성에서 패하고 자결하자 왜장수의 목을 안고 남강에 빠졌다.

남편따라 간 것이구만. 남편 죽으면 바로 개가하는 요즘 세상에서야 대단한 용기와 결단과 희생이지만. 그 당시 가치관에서 보면 그럴 수도. "이헌태, 니는 매사를 고따위로 볼래". 아니. 훌륭하신 분이시지만. 하여튼 장수와 논개. 일본장수를 죽인 논개. 두 이름이 연관이 있구만. 장수군에는 장수는 없지만 장수를 죽인 여걸이 있었네. 그래서 장수군인가. 억지로 갖다붙이지 말고. 오래 장수하시는 분이 많으시라구 장수라고 지었나. 모르겠다.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퀴즈하나. 장수와 장사의 차이는 알겠지만 국수와 국시의 차이는 뭐게요.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고 경상도 사투리 밀가리로 만들면 국시지 뭐. 썰렁.

변영노의 시 '논개'를 보면 논개의 미화가 절정을 이루는 구만. 예술가들은 '미화의 대가'들이지.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후렴)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후렴)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후렴)" . 결론 논개님 우리 역사의 큰 인물이십니다.

노원문고를 운영하시는 탁무권선배가 버스안에서 "도시에 살다가 농촌에 나오고 이곳 저곳 다니니 이게 바로 극락"이라고 감탄한다. 최근 백두대간 산행에 맛을 들였나 봐요. 연씬 감탄, 감탄하니. 여태까지 농촌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처럼.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기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던 부자가 한 말, "사랑이 없는 인생은 위대한 인생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구요. 탁선배는 "자연과 호흡하지 않는 인생은 인생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일행은 오후 5시쯤 지난 산행 때도 갔던 박현수 선배의 친구가 운영하는 장계면내 '대갓집' 참숯불구이 고기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며 맛있는 촌삼겹살을 구워먹었다. 고수라는 향채가 나왔는데 하나 집어 씹어보니 냄새가 너무 독하더라구요. 손도 못대었죠. 제가 중국에 가서 향채 때문에 시껍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중국음식만 보면 그 냄새가 나고, 또 나는 듯해서 빵만 잔뜩 먹고 왔죠. 잘 먹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먹성 좋구만. 나는 식성. 먹성보다는 식성이 품위가 더 있어 보이잖아. 내가 하면 투자, 남이 하면 투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인간관계 남이 하면 뇌물. 내가 하면 '사랑의 매' 남이 하면 폭력.내가 하면 비판 남이하면 비난.내가 하면 멋쟁이 남이 하면 양아치. 내가 하면 적응잘하는 능력남아 남이하면 양지만을 찾는 철새.뭐 그런거죠 뭐. 끝도 없네. 하루종일 나가도 되겠다.

10.

모두들 얼큰하게 취해서 저녁 7시 가까이 장계를 출발해서 중부고속도로를 경유해서 서울로 올라오니 오후 10시 반이 넘어서 청산학원앞에 도착했다. 봄나들이 시즌을 맞아 고속도로가 막힐 줄 걱정했는데 쉽게 뚫혀서 다행이었다. 오는 도중에 차안에서 여흥을 즐겼다. 나도 '봄날은 간다'와 '라구요' 노래를 두 곡 뽑았다. 모두들 잘 놀더구만.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토끼 같은 새끼들은 자고 있고 여우같은 (나의 마누라는 늑대도 아닌 것이 여우도 아닌 것이, 고산 윤선도가 오우가에서 대나무를 보고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하리수는 여자도 아닌 것이 남자도 아닌 것이, 이헌태 착한 놈도 아닌 것이 나쁜 놈도 아닌 것이. 뭐야 도대체) 마누라가 " 잘 갔다 왔냐"며 반갑게 인사하고 자러 가버린다. 늘 고맙다. 앞으로 5년후부터 죽을 때까지 잘해줄게. 이헌태, 니는 5년안에 쫒겨나서 깡통 차지싶다.

"오늘도 무사히.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택시나 버스를 타면 운전기사자리 옆에 늘 기도하는 사진과 함께 붙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더라구요. '오늘도 무사히' 할 필요도 없어졌나. 욕심이 생겨서 그런가 봐요. "100살까지 무사히" 욕심도 많기는. 제가 볼 때는 얼마후면 100살까지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도록 과학기술이 발달할 것 같아요. 수백만년의 인류역사가운데 왜 하필 내가 태어난 시기에 이 같은 기적 같은 일들이.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정병일 선배가 차안에서 놀면서 말한 코멘트가 불현듯 생각나네요. KBS 개그콘서트의 세바스찬의 "놀아줘, 놀아줘, 놀아줘".

조만간에 인간들의 평균연령이 100살 까지는 갈 것같아요. 그 이하는 아깝고 그 이상은 알아서 사시고. 100살이 되어서 최후를 맞이한 사람 아시죠. 도시의 유명한 교수직을 던져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가 평생을 자연과 함께 흙을 일구며 산 미국의 자연주의자 '스코트 니어링'은 만100세가 되던 해 더 이상 육체가 창조적인 일과 사유를 감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음식을 끊음으로써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았죠. 최근 홍콩의 스타 장국영이가 호강에 바쳐 자살했죠. 그 사람에 비하면 너무 멋있죠. 100살 까지 사는 것만해도 행복한데. 어찌해볼 수 없나. 신들에게 로비하고 잘 빌면 되나.

개인적으로 노력하면 가능할 지 모르죠. 진짜 오래 살고 싶으면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요. 우리나라나 일본, 불가리아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촌에 가서 사는 거죠. 그들의 생활풍속을 함께 하다 보면 그래도 비슷하게는 살지 않겠어요. 이주 못하도록 누가 막겠어요. 가서 꼽사리 끼고 살면 되지. 꼭 그렇게까지는 하기 싫다구요.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고 또 오래도 살고 싶고, 얘이 도둑놈아.

당신 보니까. 인간이 덜 되었는데.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말 한마디 소개해주지. "너는 인간을 만드는 데는 아홉 달이 걸리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서 족하다는 문구를 알고 있겠지. 우리는 둘 다 혁명 사이에서 그것을 싫증이 나도록 알았다. 그러나 사람 하나를 만드는 데 아홉달 가지고는 부족하다. 60년이 걸린다. 유년 청년시대를 거쳐 그가 한 인간이 되었을 때는 그에게는 벌써 죽는 것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즉 인간이 되는 순간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 100살까지 오래 살 생각하지 말고 인간답게 살도록 모두 노력합시다. 안녕 (4월 12,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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