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삼천리 방방곡곡 삼천만의 조선 동포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 맞서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날. 뜻 깊은 날, 우리 '백두대간 한걸음 이어가기' 종주팀은 지리산을 찾았다. 솔직히 말해 특별히 '3.1절'을 기념해서가 아니라 평소대로 가는 백두대간 종주산행날이죠.킥킥.
살다보면 별다른 생각없이 한 행동들이, 남에 의해 거창하게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왕왕 있더라구요. 그래서 겸연쩍죠. 노무현대통령이 가까운 지인들을 청와대와 정부부처 고위자리에 적극 발탁하자, '학력과 경력의 파괴, 신선한 바람'이라고 좋게 평가하더라구요. 가깝게 지내던 사람도 챙기고 그럭저럭 괜찮은 평가도 받고 일석이조인가. 그게 아니고 성향이 맞고 아는 사람들이 모여 '책임정치'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라구요. 미국도 그렇다면서요. 열심히 해보세요.
노무현정권의 핵심세력의 면면은 '지인일색', '진보일색'. 박정희대통령이 5.16쿠데타로 집권한 뒤 '측근일색' '군인일색' 이었던 시절이 연상된다. 그 당시 군인들은 사회의 최고엘리트들. 따라서 노무현정권은 같은 민주화투쟁출신의 김영삼, 김대중정권과도 큰 차이가 난다. 아마 이런 식의 인사는 해방후 처음이 아닌가 싶네요. 국정경험들이 약해 걱정이네요. 그러나 양김씨세력을 제외, 제도권에 편입된 순수혈통의 민주화세력들에 대한 능력심판이 시작된 거죠. 5년후에는 15년간의 세번 연이은 민주화출신대통령에 대한 총평이 기다리고 있겠죠. 그때 해방후 이어진 보수세력보다 더 못한 세월이었는지 더 나은 세월이었는지 윤곽이 드러나지 않겠어요.
80년대초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일부 젊은이들의 이상이, 농민과 노동자들의 무장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청년의 힘'과 인터넷을 바탕으로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실현되었다. 물론 사회주의의 깃발은 내렸지만. 그만큼 이땅의 기득권 보수세력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허약했는가를 잘 반증하는 셈이다. 노무현정권, 잘 되길 바란다. '노무현정권의 희,비'가 바로 '국민들의 희,비'로 연결되기때문이다. 나도,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슬로건과 깃발만 내세우고, 이념과 의지만 내세워서 잘 된 케이스가 없다. 결과는 국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상처뿐이었다. 중국 송나라때 국가사회주의정책을 폈던 왕안석의 신법정치시절도 그랬고, 60년대,70년대 사회주의국가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절도 그랬죠. 모두 다 '서민과 백성을 위한다'는 구호였다. 둘 다 좋은 뜻으로 밀어부쳤다. 그 결과는 참혹했는 거 아시죠. 전자는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 국민의 4분의 1이 굶어죽고 후자는 거의 2천만명이 사망했다고 들었어요. 이 당시의 나라는 국민을 살리는 나라가 아니고 국민을 죽이는 나라죠. 쉽게 말해 나라도 아니죠.
우리 일행은 지리산국립공원의 건조기 산불통제 때문에 대간의 다른 코스로 전전하다가 지리산을 다시 찾았다. 작년 12월 20일 이후 실로 두달 열흘만이다. 이미 지리산구간은 세번 갔다 왔는데 이번 지리산행으로 백두대간 지리산코스는 완전 종료된다.
1일 오전 아들과 영어공부를 잠깐 한뒤 오후 3시 약속장소인 길동 청산학원 앞으로 갔다. 평소보다 참여 회원수가 적었다. 남원 현지에 미리 내려가 있는 허정균선배를 빼고 10명.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시작한 이후 가장 적은 수다. 단출해서 좋다.
떠나기 앞서 슬픈 사연하나 소개한다. 회원 한 분이 산행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랬고 더구나 준비에 만전을 기했으나 결국 가족들의 눈총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사실 1일은 토요일, 2일은 일요일 따라서 연휴다. 날씨마저 화창하다. 이런 좋은 날에 가족을 내버려둔 채 홀몸으로 빠져나와 산을 찾는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가히 '목숨을 내놓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소위 '간 큰' 남자다. 가정에서 내놓은 남편이고 언제가는 쫓겨나 피눈물을 흘려야하는 남편이다. 특히 노후에 버려질 '0순위' 남편이다. 그분은 고생길보다는 일신의 편안과 목숨을 보전하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ㅋㅋ, 농담. 그분이 오히려 저보다 속이 더 깊은 분이겠지.
저를 비롯 장가가서 가정이 있는 분들은 사실 산행 때마다 괴롭다. 가족들 때문에, 특히 마누라때문에. 대역죄인마냥. 남편들 신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나. 오호 통제라.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게 아니라 차라리 아담이 이브의 갈비뼈로 만든 게 아닌가. 구약성서를 새로 써야할 상황이다.
이처럼 남편들이 불쌍하게 된 이유는. 가장 근접한 답은. 1) 여성운동가들의 피나는 여성운동 덕분에 2) 마누라들이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강화되고 남편들이 약화되면서 3) 인류가 태어나서는 지금까지는 남성우위사회, 지금부터 인류종말 때까지는 여성우위사회로 한번씩 교대로 살아보라는 신의 계시에 의해 4) 인류가 흘러 흘러오다 보니 그냥 이렇게 되었다 5) 인류가 전대미문으로 맞이한 불안정한 직장과 노후생활의 걱정때문에 6) 무능한 가장이 늘고 생활력을 갖춘 유능한 주부가 늘면서 7) 가족끼리 아기자기하게 사는 현대판 풍속이 급속히 번지면서. 모르겠다. 다 맞는 것같다.
남편과 이혼했거나 이혼위기에 있는 사람 3명의 여자연예인. 최진실, 이경실, 오미희씨. 이들은 남편들한테도 맞았지만 남편들도 이구동성으로 이들로부터 맞았다고 기사에 났더라구요. 남편도 맞는다, 참 세상 많이 변한 듯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매맞는 남편이 많다면서요. 말로 합시다. 서로 때리고 치지 말고.
최근 여자들은 기세가 등등하다. 남편들은 고양이 앞에 쥐꼴이다. 얼마전까지 여성들의 마음속에 굳게 세겨져 있는 '남편은 곧 하늘이다'를 주장하다가는 맞아서 노랗게 하늘을 보게될 지도 모른다. '미망인(未 亡 人)', 이것은 남편 따라 죽지 못한 죄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따라 죽기는커녕 남편이 죽자마자 바로 재가요 남편이 살아있을 때도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세상이다. 과거로 돌아간 것일까. '복고의 시대'를 맞아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여자의 힘'이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조 이전시대에는 여자들의 파워가 대단한 시절도 적잖았다. 한국여성들의 시조인 웅녀는 활기차고 용맹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근래 웅녀가 부활했나. 신라시대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도에 여자들이 참여했다. 신라시대 선덕, 진덕, 진성여왕,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고려시대는 여자들도 자신의 성을 물려주기도 하고 재산도 상속받았고 부모제사를 모시기도 했다고 하니 말이다.
신라시대 처용가 아시죠. "서울의 밝은 달밤에/ 밤 깊도록 놀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아내 것이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 당신이 처용이라면 어떨까. 눈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여자들한테는 멋진 신세계, 남자들한테는 모욕적인 세상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처참한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들어와서 여자들이 작살났죠. '시집살이' 민요를 보면 단번에 알수있죠. '여인통곡사'라고. "무남독녀 외딸아기 금지옥엽 길러내어 시집살이 보내면서 어머니의 하는 말이 시집살이 말 많단다. 보고서도 못 본 체 듣고도 못 들은 체 말 없어야 잘 산단다. 그 말들은 외딸아기 가마 타고 시집가서 벙어리로 삼년 살고 장님으로 삼년 살고 귀머거리 삼년 살고 석삼년을 살고 나니 미나리 꽃 만발했네. 이 꼴을 본 시아버지 벙어리라 되보낼제---"
세상이 달라졌다. 일요일 날 가족들하고 놀러 가지 않으면 뭐 죄지은 느낌을 받는다. 내 나이 42세, 어릴 때 낡은 사진첩을 다시 뒤적일 필요도 없이, 태어나서 청년으로 클 때까지 대략 20여년동안 아버지와 몇 번 놀러 갔나.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열손가락 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버지에게 깎듯이 대하고 정성껏 모시려고 노력했다.
일요일을 '가족 나들이날'로 까지 스케줄을 잡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하고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아마 나의 아버지와 평생 나들이 간 수와 나의 자식들과 일년 나들이 간 수가 비슷할 것이다. 마누라와 자식들이 감사하고 고마워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릴 때 하고 비교하지 말라구요, 요새 아이들한테 가난하던 아버지 어린 시절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잔소리해도 전혀 씨도 안먹혀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알겠습니다. 하도 억울해서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잘 적응하라구요. 알겠습니다.
가족끼리 아기자기하게 놀러가는 것이 '3시 3끼' 밥 먹듯이 기본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마 단군이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이 아닐까.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조상분들이 지금 장면을 내려다보면 느낌이 어떨지. 1)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가정이 화목한 게 제일이라며 칭찬한다 2)노예처럼 사는 남편들이 불쌍하다며 동정한다. 3) '꼴깝 떨고 있네'라며 남편들 거시기 다 잘라라며 가정내 반란과 폭동을 부추긴다. 4) 너거세상에 너거들끼리 잘 의논해 살아라며 무덤덤해한다. 답은 나중에. 나중에 죽거든 조상님들한테 물어볼께요. 대략 50년후쯤 되지 않을까. 이헌태, 오래 살아라. 벽에 똥칠하도록.
마누라한테 들은 얘기인데요. 근래 국민학교에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공부를 훨씬 더 잘한데요. "드디어 올 것이 오고 있구나".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수천년간의 진리가 무참히 깨지는 것 아닌가 몰라. 제발 그런 시절이 내 죽은 후에나. 신라때든 고려때든 여성파워면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해볼 때, 단군이래 첫 '여성전성시대', '여성막강시대'죠.
지난 50년간 한국에서는 '단군이래 처음'이란 표현이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 지난 4천 3백여년간 조상들은 뭐했나. 놀기만 했나. 사회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거죠. 박정희대통령에 대해서는 한강기적을 통해 국부를 융성시킨 사람은 단군이래 처음이라고 하고, 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대통령에 대해서는 그 같은 세계적 명성의 상을 받은 사람은 단군이래 처음이라고해요. 나쁠 거야 없지 뭐. 그렇게 못한 사람들이 배아파서 하는 것이지 뭐.
50년 만에 확, 우뚝 일어선 것은 틀림없죠. 세계적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넥스트 소사이어티'라는 책에서 "한국이 기업가정신으로는 세계에서 1등국가다. 왜냐하면 40여년전만해도 한국에는 기업이라고 부를 기업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한민족의 시대'가 도래하나. 예?이, 농담이지. 잘 되겠나 싶다.
작년 언젠가 모 일간지에 '여성파워시대'라는 시리즈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대학교수석졸업자나 각종 고시합격자에서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낸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를 보고 "직장에서는 여자들이 아직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을 지 모르나 가정에서는 남편들이 숨도 못 쉬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얼마나 여자들의 간땡이를 더 키우려고 저런 기사를 쓰나" 라며 '후-휴'라며 한숨을 지은 적이 있다. 가뜩이나 여자들의 힘이 센데 더 부추기고 있으니, 남편들은 죽으라는 것이나 똑같다. '확인사살'입니다. '확인사살'. 아프리카나 남편 어깨 힘펴고 사는 나라로 이민갑시다. 자녀 교육때문이 아니라 마누라 등쌀 때문에.
이런 엄연한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산을 기어코 찾아가니 어찌보면 맞아 죽어도 싸고 ,추측컨데 십년 안에 쫒겨날 사람들이다. 처자식의 품에 순응하고 아부하면서 목숨을 연명하는 99% 남편들과 대한남아의 기개와 호연지기를 갖고 있는 1%의 산사나이들,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눈이 세 개인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비정상이라면서요. 비유가 잘못되었다고요. 아니면 그만이고. 이헌태, 그런 식으로 살면 니도 당장은 물론 노년이 고달플거야. 친구들한테 "왜 마누라한테 절절매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지금 마누라한테 잘 못하면 늙어서 고생이야"라는 대답. 일본에서 주부들이 남편의 퇴직금이 나오면 나눠갖고 쫒아낸다는, 소위'황혼이혼' 기사가 큰 영향을 준 듯. 한숨, 한숨, 한숨. 그런데 우리집 얘기를 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제 마누라는 산에 가는 것 잘 이해해주는 편이죠.
산에 갈 수 있는 비법하나 가르쳐 드릴께요.등산가기 며칠 전부터 마누라의 눈치도 보고 비위를 거스릴 행동은 극도로 조심. 기분을 맞춰주면서 사전정비작업을 해야한다. 제 경우도 이번 산행을 위해 두 끼의 식사를 준비했으며 또 설거지까지 했죠. 아, 쪽 팔려. 그렇게까지 하면서 산에 가느냐구요. 좋아하는 산인데 그렇게라도 타협해야죠. 마누라도 이런 식으로 사전정지작업을 했는 줄 잘 몰랐을걸요.
남자들의 패기, 실종사망선고. 먼 장거리 산행을 갔다왔다고 하면 주변에서 첫마디로 '니 정말 대단하다" 예요. 힘든 코스를 용케 잘 갔다왔다는식의 '참 장하다'가 아니고요, "마누라가 가만히 있더냐"며 걱정하는 식의 '참 장하다'예요. 당신들이 비굴하게 사니까 나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거여. 너거들 정신차려. '현대판 노예들' 불쌍한 것들. 남편당을 만들어 총선에 출마해야겠다. 슬로건, "가정을 남편에 의한, 남편을 위한, 남편의 것으로 만들자". 다음 총선에서 제1당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마누라 때문에 후보등록도 못한다구요. 네. 조용히 살게요.
내 또래들 남편들은 정말로 재수없는 사람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퇴근하고 오실 시간이 되면, 어머니 말씀, "아버지 올 시간되었다"며 청소하고 밥하느라 갑자기 분주해진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부인들 왈, "때 맞춰 잘 왔다. 청소좀 해라." 남편들은 회사에서 죽도록 일하고 집에서도 쉴 틈이 없다.
어릴 때 듣고 배운 것은 마누라한테 폼잡는 것인데 지금 막상 남편이 되어 폼은 커녕 눈치밥먹고 있으니 이렇게 원통할 수가. 차라리 이조 때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방적 우위의 위치에서 살든지 아니면 요새 청소년들처럼 남녀가 평등한 친구처럼 지내도록 익숙하게 자라든지. 조상대대로 내려온 남성우위사회, 20년 미리 태어나든지. 남녀가 친구처럼 사는 남녀동반자사회, 20년 늦게 태어나든지. 왜 하필 이때, 어중간하게 태어났는지. 이렇게 정신적 갈등을 겪는지. 결국 팔자가 좋지 않아, 재수가 없어서로 귀착.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입센이 쓴 '인형의 집'. 남편이 집나가는 노라에게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팽개치고 남편과 자식을 버릴 셈이냐"고 질책하자 노라 왈,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전에 먼저 하나의 인간으로 살고 싶어요"라고 버럭 일갈.
지금은 어떤가. '노라, 인형의 집을 나오다'가 아니고 '노라 남편, 인형을 집을 나오다'로 바뀔 처지다. 아마존의 여인천하 '아마조네스'가 재등장할지. 소설가 전경린씨는 '새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소설을 통해 "누가 나를 좀 내다 버려주면 좋겠어. 공터에다 남몰래 내다버리는 망가진 냉장고처럼"이라고 외쳤다. 주부들이 '부부의 집'이 아니라 '남편의 집'을 떠나고 싶단다. 지금은 '아내의 집'을 떠나고 싶다는 남편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유교경전에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이미 '암닭이 울면 집안이 흥한다'로 바뀐 지 오래다. 만약 옛날 애기 하다가는 뼈도 못추린다.
30년만의 '남녀지위 역전현상'을 보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잠이 안와요. 농담이고요. 여자들이 오랫동안 시련과 고통을 겪다가 정상을 찾은 셈이죠.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되어야죠. 남편들도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하는 무거운 '가장의 죄'에서 쬐금 벗어나고 주부들도 재미없고 힘든 '가사노동의 죄'에서 쬐금 벗어나서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삽시다.
참 이상한 게 있어요. 예전에 "다음 세상에 무슨 성으로 태어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통계를 보니 남자가 남자로는 예상대로 90%가량 되었지만 여자가 여자로라는 대답은 절반가량. 한국처럼 여성차별사회에서 여자가운데서도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구요. 집안살림살이가 힘들어도 좋은가 봐요. 다소곳한 여성상과 너그러운 모성상을 희구하는 분들도 적잖다고 봐야죠. 따라서 무조건 일방적으로 남녀평등사회도 꼭 맞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남자처럼 살고 싶은 여자들한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닌지.
동물의 세계에서도 암컷들이 힘센 경우가 많대요. 몇 식구가, 끼리끼리 산다고 이름지어진 코끼리떼는 나이가 제일 많은 암컷이 리더하며 대장노릇을 한다네요. 여타 곤충처럼 나비도 암컷이 수컷보다 크다. 인간세상이 코끼리, 곤충들 닮아가나. 생물학적으로 더 후퇴하나 그럼. 하기야 해만 지면 여자찾아, 남자찾아 거리를 헤매는 불나방들이 많더라구요. 남녀노소, 전국민의 불나방화.
충고하나. 한국의 마누라 아줌마 여러분, 얼마나 좋은 세상이 왔습니까. 가전제품으로 인해 가사노동이 크게 해방되었죠. 또 성질 한번 부리면 남편들이 슬슬 기잖아요. 이런 지상낙원에 그 막강한 파워를 남용하지 말고 좀 너그럽고 통 크게 삽시다. 제발 부탁.
우려하나. 남편들이 마누라 치마폭에 파묻혀 있다가 '나라꼬라지'가 어떻게 되려나. 수천년동안 이름도 없었던 가난했던 한국이 일약 세계를 향해 웅비했던 지난 40년동안, 특히 70년대 샐러리맨들은 가족들을 내팽개친 채 오대양육대주를 누볐다. 하지만 최근 남편들 하는 행동거지 보소. 처자식만 챙기면 '가족적 처사', 이는 곧 국가와 민족을 조각조각, 동강이를 내니 '반민족적 처사' 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리한 발상. 취소하겠습니다.
이제 가정과 사회, 민족과 국가를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일등', '직장에서도 일등',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일등'. '3관왕 일등'이 가능하다고요. 소설 쓰고 계십니까.
공자는 '논어'의 양화편에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역설했다. 일단 가정부터 잘 다스리고, 더 나아가 나라를 잘 통치하고 천하의 태평을 이룩하라는 순차적인 의미. 네 가지를 한꺼번에 동시에 실천하면 안되는지요. 쉽게 되나. 수신제가와 치국사이에 사회와 직장이 생략. 그당시에는 사회와 직장개념이 취약. 벼슬을 하는 학자들의 지침서라서 그랬나. 하여튼 사회와 직장을 이롭게 하는 소위 '이(利) 사회'라는 말이 삽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우리의 목표. "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자식, 좋은 친구. 좋은 직장인, 좋은 시민, 좋은 국민, 좋은 세계인" 8개항목중 당신은 몇 개. 8개라구요. 뻥치지 말고. 하나도 없다고요. 겸손하긴. 진짜라구요. 자랑이다, 짜식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을 한 공자도 생활에 쪼달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요즘식으로 하면 '수신제가'가 잘 안된 것 같은데. 입만 살아서. 죄송합니다, 공자님. 그러나 존경할 대목도 있다. 공자일행이 진나라에서 머물다가 식량이 끊겨 수행제자들이 거동할 기운조차 없자 제자인 자로가 분개해서 "군자 역시 궁지에 몰리는 겁니까"라고 묻자 공자왈, "물론 군자도 궁지에 몰리는 일이 있지. 그러나 소인이 궁지에 몰리면 자포자기로 되는 것과는 다르지. 군자는 비록 궁지에 몰리고 역경에 처하더라도 뜻을 낮추거나 몸을 욕되게 하지는 않는다"라며 선비의 기개를 과시했다. "집에다 돈 잘 못 벌어주는 이헌태를 제2의 공자로 임명합니다" '제2의 공자'는 무슨. 이헌태는 학식과 인품이 없기 때문에 '생활무능력자'로 임명한다고요. 알겠습니다.
시대가 복잡다단해서 그런지 하나만 잘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가족만 잘하든가 직장과 사회, 조국에는 도움이 안 되는 경우, 반대로 직장과 사회, 조국에는 도움이 되지만 가정에는 별로 잘 하지 못하는 경우. 그 조합이 너무나 다양하다. 다시말해 1) '수신제가'만 잘하는 사람 2) '치국평천하'만 잘하는 사람, 둘 다 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둘 다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
근래 내 새끼, 내 마누라 , 내 가정만 챙기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제가'만 잘하고 '수신'과 '치국평천하'는 개판이라는 거죠. '가족애착 중증병' 이라고나 할까. 얼마전까지 부유층에서 병역을 기피하고. 긴급속보. '수신제가치국'은 별로인데 '평천하'만 내세우는 나라가 있더라구요. 혹시 들어보셨나요, 미국이라고. 나라안 살림살이도 할 일이 적잖게 있는 것 같은데 나라밖 이역만리 이라크까지 크게 신경을 기울이더라구요. 자국의 국민과 나라안전 때문에 그렇다고 하네요. 제가 뭐 압니까. 알아서 사세요.
카터정권때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레진스키가 쓴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책에서는 미국은 거대한 장기판위에 차와 포를 어떻게 움직여서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다고해요. 자기 마음대로 차, 포를 움직이고. 그렇구나. 무섭고 막강한 나라구나. 마마나 호환보다 더 무서운 거여.
이헌태 니는 뭐냐. "수신도 눈꼽만큼, 제가도 눈꼽만큼, 치국과 평천하는 아예 꿈도 못꾸고 이사회가 생긴다면 역시 눈꼽만큼". 앞으로 고쳐야죠,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연초에 스스로 세운 결심 왜 안지키느냐"는 나의 말에 초등학교 1년생 딸의 대답이 생각나네요. "실천하기 어려우니 결심을 했죠. 실천하기 쉬우면 왜 결심해요. 올해 안에 고치면 되죠"라며 천연덕스럽게 넘어간다. 요새 애들하고 말하면 판판히 깨져요. 그아버지의 그딸인가. 부전자전이 아니고 부전녀전인가.
이헌태의 간곡한 부탁. 가족도 중요하지만 이웃, 나라와 민족도 꼭 생각하자는 것. 이헌태, 대충 이 급변하는 국제정세가 아니라, 급변하는 가정정세에 적응하면서 살아. 안 그러면 고생이 훤해. 알겠습니다. 참조사항. 위에서 제가 설을 푼 것은 2003년에 한국에 사는 보통 남편들의 얘기니까, 아닌 케이스도 많아요.
향후 바람직한 부부관계를 나타내는 좋은 말이 있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사랑한다는 건 우리가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이라고 꽥꽥. 참 맞는 거 같아요. 서로 마주보면 서로 피곤하잖아요. 각자 살면서도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국가정상회담에서 자주 쓰는 '동반자적 협력관계' 아니면, 말고.
산은 가고 싶어 미치겠는데 마누라한테 설득할 수 있는 논리중의 하나가 바로 건강을 끄집어내면 혹시 도움이 될까. "가족들 오랫동안 먹여 살리려면 건강해야 한다. 돈안들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등산이 최고다"라며 함께 갈 것을 권유하면 어떨까요. "건강을 왜 꼭 산에서 지키려고 하느냐"는 반박을 받고 씨도 안 먹혀 들어가면. 그거야 할 수 없고.
건강에는 등산이 최고죠. 골프도 나름대로 몸에 좋고 사교에도 좋지만 '단기 효과 건강'에는 등산을 따라올 만한 게 없다고 확신. 보너스, 탁월한 건강법 하나 가르쳐 드릴께요. 바로 낙천적으로 사는 겁니다. 스트레스와 과로, 우울이 암의 근원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 김대중대통령이 고령인데도 재직시 그나마 건강을 유지한 비결. 청와대기자시절, 직접 들은 얘기 소개. "저보고 잘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내가 대통령이 되었나하는 생각을 하면 꿈만 같고요. 저는 늘 긍정적으로 삽니다. 그리고 풀어야 할 과제가 있으면 오래 끌지 않습니다. 빨리 결정해버립니다. 오래 생각한다고 더 좋은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도 김대중대통령식 건강법을 한번 도입해보는게. 저의 슬로건과 같죠. "즐겁게 살자 "
석존의 가르침속에는 세가지 인간형이 있다. "첫째는 바위에 새겨놓은 문자와 같은 사람", 분노나 원한을 마음속에 끝까지 품고 있는 범부형, "둘째는 모래위에 써 놓은 문자와 같은 사람", 분노와 원한 같은 마음을 가끔 일으키지만 대충 잘 극복하는 수행자형, "셋째는 물 위에 써 놓은 문자와 같은 사람". 분노와 원한을 물에 흘려 보내고 깨끗이 털어버리는 불보살형. 현대에 복잡한 생활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세번째 인간형이 반드시 필요. 첫번째 인간형은 만병의 근원. 저의 장끼하나, 나한테 지랄하는 사람있으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다. 그럼 나도 도닦은 일은 없지만 어쨌든 세번째 인간형이네. .
노무현대통령도 낙천적인 스타일이 아닌가 싶네요. 정치생활하면서 가끔 "대통령 안하면 그만이지"라면서 소신있는 인생을 살았는 듯하고, 특히 작년 대선 투표일 전날밤 지지철회를 선언한 정몽준씨집에 찾아가 기다리다가 "대통령에 안되면 그만이지" 라며 성질나서 발길을 돌렸고, 또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꿈이냐 생시냐'는 순진한 얼굴을 하면서 너무 좋아하는 표정에서 잘 읽을 수 있었다. 대통령 내외가 "꿈인지 생시인지"라며 서로 꼬집지나 않았는지.
구름위에 떠있는 듯한 기분은 위험할 수도 있다. 피를 보면서 목숨 걸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또 다소 간의 약점을 가진 위정자들이 이를 만회하기위해 국정을 더 챙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노무현대통령은 주변세력이나 당선과정을 보면 막판에 잠시 내부에서 흔드는 세력들이 있었지만 1년만에 혜성처럼 나타나 공짜로 그저, 땡잡은 정권' 일 수도 있다. 풍운아라기보다는 행운아다. 그렇게 되면 진지성과 성실성이 결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통령이 나부터 주5일 근무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국민은 '주5일근무'하더라도 대통령은 시시각각으로 국민과 나라를 걱정해야한다. 국민이 5년간 최선을 다하라고 소임을 맡겼다. 5년이 지나 퇴임한 뒤 국민들의 생활이 더 나아지면 괜찮지만 더 못해지면 국민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무능은 차라리 대통령 안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대통령은 쉴 때도 있어야한다.이것은 더 정력적으로 일하기 위한 재충전이다. 충분한 휴식은 그 퇴임 이후에 해도 늦지않다.
아침에 눈을 떠, 해를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민을 위해 오늘 내가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대학에 나오는 말, " 군자는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스스로 앞장서서 일하고 자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정치"라고 대답. 맞습니다. 맞고요.
노정권 핵심세력들에게 한마디 더. "우리편은 선이고 다른 편은 악"이라는 이분법을 버려야한다. 산에 다니다 보니 밤과 낮 보다는 서로 섞이는 여명과 황혼, 일출과 일몰장면이 더 멋지다. 모든 세력들의 장점을 살려, 국민통합을 통해 국력신장에 나서야 할 때이다. 동양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태극사상. 지금은 5년전 환난위기때보다 더 힘든 상황이라는 우려도 있기에 더욱.
애써 하는 일 없어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헌태가 만든 '무위통치' 내지는 '무위천하태평'. 이는 로또복권 당첨을 기다리는 허황한 생각과 똑같다. '무위부자'. '무위' 좋아하다가 '무위도식인간'으로 전락하겠다. 노자,장자의 '무위자연론'을 욕보이는 '무위'는 사라져라.
서론이 너무 길었나. 오후 3시 40분쯤 청산학원을 출발한 전세버스는 중부고속도로와 대진고속도로를 경유, 88고속도로를 통해 남원시에 진입했다. 차창으로 비친 겨울산하의 풍경은 늘 그립고 반갑다. 차창을 통해 바라보니 산과 나무, 풀 , 흙으로 이루어진 스산한 자연은 휑한 겨울 분위기를 자아내며 똑같이 모래빛 옷을 입고 있었다. 산천초목의 자연이 아마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 것은 겨울뿐. 알록달록 멋진 치장을 하지 않는 나신(裸 身)이라서 그런가. 산은 겨울철이 웃통벗는 피서철이네.
음성휴게소에 이어 두번째로 멈춘 인삼랜드휴게소. 일전에 화장실 칸마다 폭탄주를 한국전통고유문화로 소개해서 이헌태한테 바로 적발되었던 그 휴게소. '부당 불편 불친절 신고'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부당은 정당하지 않다, 불편은 편리하지 않다는 뜻이리라. 참 이상하지. 거꾸로 된 '불편 부당'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이란 말과 완전히 다르네. '부당불편'은 나쁜 말이고 '불편부당'은 좋은 말이죠.
사장 아래서 '새끼사장'노릇을 하는 재벌그룹의 2세, 3세들이 거꾸로 되어 '사장새끼'로 되지않도록 잘 합시다. 미국 같은 정통 자본주의국가에서도 창업주의 2세, 3세들이 능력을 검증 받아야 경영에 참여한다는 데. 아들한테는 기업을 넘겨주어 회사 망하게 해서 여러 사람 애먹이지 말고 증여세, 상속세 확실히 낸 뒤 4분의 3은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준 사회에 반납하고 4분의 1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어떨까. 부자들의 '이헌태식 유산방법'.
이 방법은 망자는 천국에 갈 것이고 기업은 발전할 것이고 후손 또한 생계에 지장이 없을 것이고 사회는 화합이 넘치고 증오가 줄 것이다. 4자가 모두 좋아하는 방법, 이 얼마나 좋은 사회며 좋은 나라인가. 정부가 아무리 통치를 잘해도 '이헌태식 유산 방법'이 강물처럼 흐르지 않으면 사회통합은 요원하다는 게 '광수의 생각'이 아니라 '이헌태의 생각'
남원에 들어선 우리 일행은 저녁 8시 30분쯤 남원시 이백리에 있는 '정원황토방'에 도착했다. 고풍스런 정원과 정자를 비롯 전통한옥 황토방을 몇 채를 거느리고 있는 새로 세워진 황토방집이었다. 허기부터 채웠다. 촌닭, 허정균선배가 부안에서 직접 사온 돼지고기, 청국장 맛은 일품이었다. 시골김치, 파김치, 고추장, 된장 맛도 기막혔다. 제가 늘 말했죠. 촌사람들 가난하게 살아도 맛있는 것은 저거들끼리 다 해먹는다고요. 안주가 받쳐주니 술도 자연 술술 들어갔다. 술이 술술, 물이 술술도 아니고 국이 술술도 아니고.
황토방 별채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자그마한 두개방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잠깐 앉아도 궁둥이가 델 정도로 뜨거웠고 하나는 그냥 따뜻한 방이었다. 황토방은 풋풋한 황토냄새와 장작 때는 냄새가 어우러져 구수했다. 나는 뜨거운 방에, 또 돗자리가 누렇게 탈 정도로 뜨거운 곳에 얇은 이불을 깔고 누었다. 온몸에 땀을 몇 번이나 흘렸다. 찜찔방처럼.
다음날 아침이 되니 몸이 훨씬 상쾌해졌고 기분도 개운해졌다. 황토찜찔방이 효과가 있구만. 이헌태는 역시 조선놈인 모양이다. 선조들이 보면 놀라겠다. "평소에 사는 황토방을 돈 받고 이용하다니. 너거들은 어떻게 살길래". "저희들은 불쌍해요. 대게 아파트에 살아요. 시멘트독이 나와서 숨쉬어도 좋지않고 피부도 좋지않죠" . 생활이 편리한 만큼 그만큼 고통을 당해야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진리의 말씀. 자동차를 타고 가전제품을 많이 쓰면서 생활이 편리해 진만큼 그로 인한 환경파괴는 불을 보던 뻔한 이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몸을 뒤척였다. 땀을 흘리고 목이 말라 가끔 문을 빼꼼히 열고 황토방집 물을 마셨다. 차고 맑은 물이 내 속은 물론 영혼마저 시원하게 해주는 듯했다. 새벽 4시 15분쯤 '꼬끼요' 닭우는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과거, 보통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에 우는 닭소리를 듣고 제사를 종료했다고 한다. 새벽을 깨우고 나를 깨우는 맑고 칼칼한 닭소리를 몇 년만에 들어보나. 서울집, 새벽 6시면 내 방을 떠나갈듯이 외치는 핸드폰자동알람소리에 하루를 낭만도 없이 깬다. "꼬끼오를 낭만시계로 임명합니다"
새벽녘에 일어나 샤워를 한 뒤 일행과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오전 6시 36분쯤 지리산 정령치로 전세버스가 새벽을 가르며 달렸다. 남원시 운봉읍과 주천면에서 산을 따라 고불고불 올라오다가 정령치밑 650미터 지점 도로에서부터 쌓인 눈 때문에 차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전세버스는 되돌아가고 일행은 차에서 내려가 도보로 정령치로 발걸음 옮겼다.
사위가 아름다운 풍경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첩첩쌓인 산들을 안개가 신비롭게 뒤덮고 있었으며 왼쪽에는 눈덮힌 산들과 백색의 눈꽃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도로에는 30센티미터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고 겨울추위에 얼어버려 그 위를 걷자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어둑어둑했던 새벽이 이내 밝아 버렸다. 서울에서 올 때 이런 설경을 보게될 줄은 미처 생각치 못했다. 신께서 마지막 겨울선물을 주신 것이리라. 내가 또 마음에 새긴 말, "아침에 먼저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먼저 먹는다"가 아니고 "부지런한 사람이 추억도 많다"
해발 1천 2백미터, 정령치휴게소에 도착했다. 정령치란 기원전 84년 마한 왕이 정(鄭)씨 장군을 시켜 마한과 변한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는데서 유래된 말. 이 지명은 나이가 2천년이 넘었구만. 이정도 생명력을 있어야지. 한국도 만만찮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수많은 전란속에 사라져간 한국의 역사여. 예수님,부처님,공자 분들은 태어나신 지 2천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후손들이 극진히 모시고 있다. 질문하나, 앞으로 2천년 더 추앙을 받을 수 있나. 알 수가 없다. 신만이 아시겠지. 지금 이대로 가면 지구가 몇 백년을 못 넘긴다는 얘기가 일반적인 관측인데, 수십억년 지구를 다 망쳤거든요. 한심한 놈. 진짜 궁금하네, 2천년 후에는 지구가 있을지, 지금의 유력 종교들이 유지할 지, 다른 종교가 또 번창할 지. 그전에 종말이 올 지 모른다구요.
2천년은 지구의 나이로 보면 찰나처럼 금방 지나갈 건데. 지구의 나이가 다소간 차이가 나더라구요. 대체적으로 우주가 150-2백억년전, 지구가 50억년전, 지구에 생명출현이 30억년전, 인류가 3백만-5백만년전에 태어났다고 하네요.
정령치는 백두대간 주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와 주천면 고기리를 연결하고 있는 포장도로다. 적설로 인해 차량이 통제된 탓에 휴게소에는 인적이 없었다. 지난번 지리산 국립공원통제때문에 고리봉을 눈앞에 두고 가지 못하고 여기서 안타깝게도 도중하차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휴게소 바로 위에서 행글라이드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난번처럼 정령치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전경, 잔설이 남아있고 흙갈색의 시커먼 산악, 영원령 천왕봉 장터목 세석평전 명선봉 망바위봉 토끼봉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연봉, 장쾌한 파노라마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장엄하고 그윽하기 그지없다. 서서히 지리산 능선 위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오전 7시 정령치를 출발, 종주를 스타트했다.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운 눈꽃 숲을 헤치며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라갔다. 10분쯤 뒤. 저 멀리 천왕봉 뒤쪽에서 해가 벌겋게 떴다. 여느때의 일출과 달리 한낮의 해처럼 너무 강렬하게 빛을 내 뿜어 눈을 떨 수가 없었다. 능선에서서 보니 앞쪽에는 해뜨는 지리산이고 나머지 세 방면은 안개속에 쌓인 첩첩산중. 비경이 아닐 수 없다.
박현수선배가 옆에 있다가 "예전 도인들은 해를 먹었다더라. 니도 해를 먹어라"고 권유한다. 심호흡을 통해 해의 양기를 받으라는 것이리라. 나도 심호흡을 연신 내쉬며 해의 기운을 받아 마셨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몸에 좋은 해 요리는 얼마에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비싸지만 하늘이 인간에게 공짜로 준 선물. 공짜라서 연거푸 큰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었다. 최근 샤프회사광고가 멋지더라구요. "세상에서 제일 큰 해는 네 가슴속에 있단다". 또 "세계금융의 별이 되겠습니다"라는 국민은행의 광고도 등장, 갑자기 해와 별이 광고시장에서 뜨네. 21세기는 '우주의 시대'라더니 진짜네. 그거하고 관계없다구요. 알겠습니다. "하늘에 맹새코--라든지 하늘갖고 장난치지 말랬지. 해와 별도 하늘의 부속품이야. 예전에 20년전 게임기 초창기시절. '갤러그'를 잘하는 오락실 아저씨가 있었는데 스스로 '첨단시대의 첨병'이라고 하도 너스레를 떨길래.
정령치에서 800미터 가량 올라가자 큰 고리봉(1304미터) 정상이 나왔다. 오전 7시 24분. 여기서도 지리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제일 높게 솟아있는 동남쪽의 천왕봉. 백두대간 길에서 지리산전경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고리봉이다. 고리봉을 벗어나면 이제 천왕봉을 비롯 지리산의 주능선을 볼 수 없다. 눈에서 사라진다. '굿바이 지리산'. 백두대간 종주가 언제 끝날지. 지리산아, 그때까지 몸 건강히 안녕. 흑 흑. 자주 전화하고 편지도 하고 흑 흑. 야 이 미친놈아 지리산이 어떻게 전화하고 편지하니. 자연과 저는 대화를 해요. 인디언처럼, 도를 통해서.
고리봉에서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백두대간길= 능선"이라고 생각하면 착각. 고리봉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능선을 따라가면 세걸산(1207미터)과 바래봉(1165미터)으로 간다. 이는 백두대간 줄기가 아니다. 헷갈리기 쉽다. 왼쪽 방향인 운봉읍과 주천면쪽으로 하산해야한다.
바래봉은 지류능선에 속하지만 우람한 얼굴이다. '용꼬리가 될래요, 닭대가리가 될래요'라는 인류가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같다. 바래봉은 지리산의 지능선에 서 있지만 일반산과 비교하면 대장노릇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용을 자랑하는 산이다.
고리봉에서 북서쪽방향인 주천면 고기리마을까지는 급경사 내리막길. 쌓인 눈을 밟으며 산죽과 잡목이 핀 설화를 구경하며 신나게 내려왔다. 산중턱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운봉과 주천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논과 들, 집과 비닐하우스, 도로, 커다란 덕산저수지가 아기자기 꾸며져 있고 마을을 지나 우리 일행이 건너야 할 대간코스인 수정봉(804미터)이 오롯이 서있다. 산중턱밑부터는 온통 소나무 숲이었지만 간벌이 되지않아 빽빽하게 가늘게 자랐다. 미궁같아서 밀림을 헤쳐나가는 것 같았지만 소나무가 제대로 자라지않아 가슴이 아팠다. 마을바로위에는 목장철조망울타리가 넓게 쳐져있었다. 뭘 키울까. 그 유명한 지리산방목토종돼지를 키우는가. 맛있겠다.
이상하죠. 백두대간은 산으로 연결되어야지, 왜 마을로 내려갔냐고요. 백두대간 종주길 가운데 마을은 이 곳이 유일무이하다고 하네요. 일제시대 이전에는 산과 숲으로 연결되었는데 개간사업으로 많이 변형되었다고 하네요. '물길로 단절되지 않고 능선으로만 이어진' 백두대간이란 말을 만든 조상들이 거짓말 할까 봐. 의심할 것을 의심해라. 질문하나. 그러면 고려시대 다음이 이조시대라는 것을 어떻게 아냐, 당시 살아봐야 아나, 책에서 나오니까 믿어야지. 부시가 미국대통령이고 영국수상이 아닌 것은 어떻게 아나, 직접 만나봐서 물어봐야하나. 죄송합니다. 귀신씨나락까먹는 얘기를 해서..
고리봉에서 대략 3킬로미터가량 내려오니 오전 8시 42분, 마침내 주천면 고기리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 도로를 기준으로 동쪽이 운봉읍 주촌리이고 서쪽이 주천면 고기리다. 반대방향으로 가면 왼쪽은 뱀사골과 정녕치로 올라가고 오른쪽으로는 남원시내와 육모정으로 나아간다.
지리산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마을은 산에 의해 휘감겨져 있고 넓은 들이 펼쳐져 풍요로울뿐아니라 지리산의 정기를 받고 있어 '무릉도원' 동네로 불려도 손색이 없단다. 예로부터 운봉마을은 삼재를 막고 10승지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가운데 가장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 지리산이라고 한다. 지리산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을 가슴속에 품고 지리산을 닮아가겠죠. 부럽다. 눈만 뜨면 지리산이 보이니까. "자연을 내 집으로, 지리산을 내 집 정원으로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강토 전체를 '내 집'처럼, 살고 있는 고양시 화정동 내 아파트는 '휴게소' 처럼 생각합니다. 단단히 미쳤다구요.
지리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코스 가운데 첫 속세다. "세상속에서 살라. 하지만 세상에 속하진 말라'라는 인도의 한 수도승의 얘기가 떠오른다.
일행은 고기리삼거리를 출발, 도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백두대간 코스가운데 아스팔트도로는 이 구간밖에 없으리라. 대략 1킬로미터 된단다. 산으로만 된 종주를 걷다가 속세로 된 길을 걸으니 그 묘미도 괜찮았다.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가까이 다가서 본 산천초목은 이미 봄빛을 완연히 풍겼다. 흙은 언 땅이 녹아 생명을 잉태할 촉촉한 대지로 바뀌었고 파란색의 싹들이 이제 땅을 박차고 나오기 시작했다. 공기는 따뜻한 햇볕들이 차지했고 이미 시각, 후각, 청각, 촉각 이 4감각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봄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시골마을이 만물이 소생하는 기운으로 가득차 있었다. 봄이 온 것이다.
'봄바람'하면 생각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옛노래,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그대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하여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도로를 걷는 도중 농촌의 풍경은 정겹다. 손님 한명도 태우지 않는 남원버스가 지나갔다. 춘향이 때문인지 버스의 광고판도 '사랑의 남원'이라고 적혀있다. '사랑을 합시다'고 하면 불륜도 많은데 그래도 '사랑의 남원'으로 고집하고 있나. 남원시는 춘향이를 배워 남녀노소 모두다 사랑만 하는가.
구룡폭포 안내표지판이 서있는 삼거리버스정류장, 혹은 운천교회 안내판 앞을 통해 노치마을에 진입했다. 30여호 옹기종기 모여사는 노치마을 민박집에서 순두부를 시켜 막걸리를 몇 잔씩 걸쳤다. 소나무와 잔가지 땔감으로 땐 라면도 먹었다. 나도 모처럼 소나무가지를 아궁이에 넣었다. 참으로 잊혀졌던 고향풍경이다. 다소 살찐 아줌마가 인심도 좋았다. 10명이 실컷 먹고도 2만원밖에 되지않았다. 김치도 넉넉히 내주었다. 백두대간 종주팀들이 늘 한잔 걸치고 가는 곳인 모양이다. 예전 주막이리라. 잘 사세요. 왜 그런지 아세요. 이유는 간단. 내한테 잘해준 사람은 무조건 복 받아야 되니까. 나한테 나쁜 짓한 놈들은 당연 벌받아야죠.
노치마을은 재미난 마을이다. 노치마을앞 도로를 기준으로 오른쪽 논은 덕산저수지와 광천을 지나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으로 흘러가고 왼쪽의 논은 구룡폭포와 구례천을 지나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분수령'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왜 백두대간이 물길을 한번도 건너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셨죠. 백두대간 대단하다. 어떻게 그 먼 길을 물길로 한번 끊어지지 않느냐. 백두대간 나라에 사는 게 자랑스럽다. 백두대간 종주에 대한 결의를 마음속으로 다시 다진다.
또 노치마을 안에서, 오른쪽은 운봉읍 조촌리 원평마을이고 왼쪽은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이다. 민박집에서 아저씨 왈, "하늘에 비가 와서 떨어져서 재수좋으면 가까운 섬진강으로 가고 재수없으면 먼 낙동강쪽으로 간다"고 한 말씀 하신다. 전라도 분이라고 지역감정이 실린 말인가. 그분은 그런 뜻이 아니고 말 그대로 가까우면 빨리 강에 도착해서 좋지않느냐는 것이다. 물도 사람처럼 편한 걸 좋아하나. 멀리가면 귀찮으니까. 하기야 민초들이야 무슨 지역감정이 있으랴. 벼슬아치들이 그들의 선량한 마음에 불을 지른 것이지. 제발 그만해랴. 정치인들아.
우리 일행은 오전 9시 15분쯤 민박집 앞 노치샘을 출발했다. 노치샘 이정표에는 해발 550미터, 정령치로부터 6킬로미터 여원재까지 6.6킬로미터라고 적혀있다. 노치샘에서 저멀리 , 눈 때문에 하얗게 꼬깔을 쓴 바래봉을 위시한 길고 장쾌한 지리산 능선을 보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언뜻보면 '설산의 히말라야'라고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리봉에서 이어지는 저 능선은 백두대간 능선도 아니고 천왕봉을 끼고 있는 주능선도 아니고 지리산 지능선중의 하나지만 그러나 너무나 멋있다. 바래봉은 우리나라 이름난 철쭉군락지역이다. 저 아름다운 경치를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바래봉모텔이 있다. 참으로 멋진 모텔이 아닐 수 없다. 꼭 이런 때 모텔이야기를 해야하나. 죄송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오면 좋겠다구요. 한국에서는 이상하게도 모텔은 불륜장소로 찍혀있거든요. 세계에 이런 나라는 없을 거에요. 교회종소리가 온 마을을 울렸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시골마을 풍경이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노치샘물로 목을 축인 뒤 오전 9시 44분에 출발했다. 산입구에 신비스런 소나무 6그루가 운봉과 주천마을 수호신마냥 아래를 굽어보며 서있다. '6형제송'. 그 중 네 그루는 독수리5형제처럼 합체를 해서 둥그런 지붕을 하고 있었다. 한 그루는 장자인지, 형태도 신비롭고 껍질이 용비늘처럼 생겼다. 껍질사이 사이에 이끼까지 끼고, 나이는 대략 5백년정도는 된 듯하다고 유영래선배가 짐작한다.
우리 일행은 수정봉을 향해 가파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이 산은 소나무숲이었다. 산밑자락에서 정상까지 소나무 일색이었다. 솔향도 향기로웠다. 오전 10시 44분 힘들게 수정봉에 다다랐다. 과거 한때 수정을 캤다고 지어진 이름이란다.
왼쪽으로 남원시 이백면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능선을 따라 입망봉을 향했다. 따뜻한 봄기운속에 땀에 온몸이 젖어있는 차에 능선 저 아래에서는 여름바람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입망치를 거쳐 낮 12시 정오에 입망봉(705미터)에 도착했다. 서쪽방향으로 남원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여기서 각자 가져온 음식들로 배를 불렸다. 나도 준비한 빵, 삶은 달걀을 내놓고 소주 몇잔을 받아 마신다. 안개속에 희뿌옇게 펼쳐진 바래봉능선과 그 앞에는 수정봉능선이 무척 가깝게 보였다. 참으로 멀리 멀리 행군을 해왔다.
행군을 계속하면서 임도(산판길)을 거쳐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낮 12시 45분 여원암앞에 도착했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바로 옆 여원재는 고개가 도로로 잘려 있었다. 이 고개는 '함양-남원간' 24번 국도로 남원시 이백면과 운봉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여원재 (女 院 재)는 왜구가 이곳 내륙 깊숙히 침입해서 주모를 겁탈하려 하자 스스로 젖가슴을 도려내 자결했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여원재 도로에는 운봉의 옛이름인 '운성대장군' 돌장승이 사람처럼 서있다.
여원재 고개는 예전에는 영, 호남을 연결하는 주요한 도로였다. 따라서 전쟁 때마다 이 곳을 차지하기위해 공을 들였다. 특히 운봉읍일대는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섬멸한 역사적인 황산대첩이 벌어졌고 기념으로 붙여진 황산이 우뚝 솟아있다. 또 여원재는 신라때 수도 경주에서 학자나 스님들이 당나라로 유학갈 때 넘던 길로 역사책에 기록되어있다. 남원으로 가서 영산강하구 회진나루를 통해 황해를 건넜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비자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 미국처럼. 강대국들이 예나 지금이나. 개그콘서트를 빌자면,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나 정도는 되어야지, 옥동자에요"가 아니고 "덩치만 큰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나 정도는 되어야지, 자그마한하지만 예쁜 한국이에요".
여원재는 해발 440미터. 지리산일대는 다 높은 지역이다. 이정표, 지나온 노치샘으로부터는 6.6킬로미터, 갈 유치까지는 10.4킬로미터. 백두대간 곳곳에 안내리본이 달려있어 길 찾기가 쉽다. 오후 1시, 여원재 국도를 건너 뛰어 다시 백두대간 길을 재촉했다.
바로 장동마을으로 이어졌다. 마을 뒤, 야트마한 야산을 끼고 걷다가 짧게 마을길로 진입했다가 왼쪽방향으로 틀어 대간타기가 재개됐다. 지리산과 덕유산의 웅장한 산악들을 섭렵하다가 이런 야트마한 산과 마을을 걸으니 시시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백두대간코스는 틀림없고 오히려 사람냄새, 인심과 정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백두대간의 또다른 가치를 읽깨워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고나 할까.
마을 어르신네들 죄송합니다. 욕좀하려고요. 이 마을에는 왜 그리 묘지가 많은지. 보기가 흉할 정도였다. 한국을 '묘지공화국'이라고 하는 게 이 마을을 보고 하는듯하다. 조상을 잘 모셔서 그 복으로 모두 잘 사는가 모르겠네. 조상은 마음속으로 모셔야지, 국토를 이렇게 흉물스럽게 만들면서까지야. 마을 옆산을 우회해서 장봉까지는 소나무숲으로 된 자연휴양림을 걷는 기분이었다. 좋은 공기 마음껏 마셔야지. '흠' (숨 들이키는 소리), '후', (숨 내쉬는 소리). 가보지 못하신 분, 약오르시죠.
일행중 절반은 마을을 통해 이웃, 가동마을 한가운데 구 고남초등학교에서 전세버스와 함께 기다리기로 했다. 허정균선배는 모처럼 백두대간 주위에 사는 사람들을 취재한다며 그팀에 합류했다. 나와 유영래, 이원, 박현수선배등 6명은 정해진 백두대간 코스로 계속 행군을 계속했다. 마을뒤 송전철탑이 있는 장봉(561미터)을 거쳐 두시간을 더 산행을 계속하다가 랑데부를 하기위해 오후 3시쯤, 통신시설이 설치된 고남산(846미터) 바로 밑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을로 하산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아쉬움을 남긴 채. 기암괴석이 내려보일 듯한 훌쩍 솟아있는 고남산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의 또다른 절경은 다음 산행의 몫으로 남겨두면서.
하산길, 마주친 반가운 손님. 개구리였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산초입 논에서 개구리들이 떼지어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요란스럽게 합창하고 있었다. 경칩이 며칠후인 6일인데 미리 동면을 깨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봄이 일찍 왔나. 개구리가 갑갑해서 일찍 깼나. 짝짓기하느라고 저렇게 소리지르겠지. 짜식들. 개구리 소리는 봄이 확실히 왔다는 증거다. 오늘 나는 봄을 잡았다. 확실히. 이번 산행의 최대성과는 봄사냥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산밑자락 밭에는 농부 두 명이 농사지을 준비를 하려는지. 모터를 작동하고 있었고. 모터소리가 "봄이 왔습니다. 봄이 왔습니다"라고 외치는 것같았다.
산에 가는 쾌락과 묘미의 하나는 계절의 변화를 빨리, 확실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요일만 되면 가족들을 내 팽개치고 무작정 산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친구나 친인척, 가까운 사람들의 결혼식은 아예 신경을 꺼 버린 사람들이다. 산과 결혼한 사람처럼. 이들의 얘기에 따르면 "일년내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산에 가다보면 봄여름가을겨울의 게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주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이에 비하면 무감각, 무신경이다. 온감각과 온몸이 마비된 병자나 다름없다. 봄이 오면 봄이 왔나, 여름이 오면 여름이 왔나, 가을이 오면 가을이 왔나, 겨울이 오면 겨울이 왔나, 그저 그럴뿐이다. 불쌍한 중생들. 신이 내려주신 축복인 자연을 좀 느끼고 즐기면서 살아라. 도시민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기계에 불과하다. 자연과 호흡해야 인간이다. 이제 기계에서 인간으로 돌아가자. 기계를 다 부숴버리자. 영국의 '러다이트'운동인가. 21세기 러다이트운동을 벌이자. 기계인간에서 자연인간으로 모두가 탈바꿈하자. 이를 위해서는 저녁 9시 뉴스마다 자연의 변화를 톱뉴스로 올리면 좋을 것같다.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가동마을까지 하산길은 가까웠다. 대략 20여분거리. 가동마을은 여전히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이어서 가슴이 미어졌다. 무너져 내릴 듯한 흙담, 찌그러진 녹슨 양철대문, 허름한 슬레이트가옥, 외양간. 폐가도 있고. 일인당 개인소득 만불 시대의 농촌은 이렇게 아직도 피페한 얼굴이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의 고향인 시골이 처참하게 허물어졌어야. 더욱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농촌을 회생시킬 마땅한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에 손 쓸 방책도 없이 계속 내몰리고 있다. 그 무서운 세계화, 세계화에 대한 해법을 내놓은 나라는 없는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별수 있나. 한국이 먹고 사는 방법이 뻔한데. 수출도 잘 하고 농촌도 잘 살게하는 방법,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한다.
유영래선배에게 "농촌은 끝났다. 불쌍해 죽겠다"라고 말하자 유선배 왈, "저 땅을 두고 어떻게 떠나겠노" . 생명이 움트는 봄과, 그리고 이 마을의 땅을 보면서 나는 미국의 여류소설가 펄벅여사의 '대지'를 생각했다. 빈농이었다가 혁명의 와중에 대지주집 은화를 챙겨 고향으로 가서 부자가 된 뒤, 땅을 팔자는 아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땅으로부터 태어났다. 땅을 절대로 팔아서는 안된다"며 땅을 악착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던 왕룽.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한국제일의 거부가 되었을 텐데.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땅이 최고여. 그런데 이 농촌의 땅이 버려지고 있다니.
이에비해 최근 30년 도시개발덕분에 도시인근 가난한 농꾼가운데 떼돈 번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더라구요. 제가 아는 양계농부는 도시개발로 외곽으로 계속 쫓겨나면서 땅값상승으로 지금은 거의 1백억원대의 거부로 컸다. 공부 못해 촌에 눌러앉아 농사짓고 닭키우고 돼지키운 사람은 부자되었다.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란 말이 나왔을 정도로 똑똑해서 땅 팔고 소 팔아 공부시킨 사람들은 지금 다 먹고 사느라고 헉헉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예전 독립군 자녀들 생각나네. 독립군자녀는 교육을 제대로 못받아 계속 가난을 대물림하듯이. 아아, 지난 50년간 황당한 일들이 게속된 한국, 이것도 마찬가지. 땅소유자를 중심으로 백년전 이조말의 신분계층의 변화와 함께 30년동안 전무후무한 개발시대의 신분계층변화를 연구하면 재미있는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마을을 들렀던 허정균선배는 어느 집에 들렀다가 남은 술에다 안주까지 장만하려는 한 시골 할머니의 따뜻한 정에 감격했다. 백두대간길의 인심은 예전 그대로 풍성했으나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다. 너무나 대조적이었고 슬펐다.
구 고남초등학교앞에서 조우한 뒤 남원시 일원면으로 빠져나와 지리산 산행때마다 들렀던 아구찜식당에서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고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고 오후 4시 30분쯤 일찍 서울을 출발했다. 교통체증이 있었지만 저녁 9시쯤에 강남 고속버스터미날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니 저녁 10시10분. 오늘 백두대간 종주 산행도 대성공이다. 백두대간의 늠름한 자태와 인심이 넉넉한 마을을 보고 느꼈다. 특히 '지리하고 지리한' 지시산이 아니고 복지리탕처럼 담백하고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지리산 산행을 모두 마쳤다. 서울 시민들이 겨울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몰래 봄을 낚아온 게 큰 성과라면 성과.
비가 올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너무 좋았다. 산행하기에는 100점이 아니고 1000점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건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작년 소련 극방지역을 방문하면서 "1000%만족한다"고 했더라구요. 우리들은 고작 200%까지 표현을 하는데 김위원장은 통이 크네. 그것이 혹시 김위원장이 말하는 '통 큰 정치', '광폭정치'인가. 최근에는 세계의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싸우더구만. 대로마제국, 대영제국으로 이어지는 '대미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더니. 내가 볼 때는 무모하게 보이는데. 그런데 한가지 물어봅시다. 국민들의 고통이 극심한데 언제 개혁, 개방해서 국민들 고깃국에 쌀밥을 먹일꺼요. 참 답답해서.나중 백두대간 종주를 위해 북한으로 나아갈 때 길이나 좀 열어주시죠.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는 게속됩니다. 조태일의 시인 '국토서시'. "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밑을 서설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 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속을 거닐 수 밖에 없는 일이다---" ( 3월 1일,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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