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4) - 부친상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동안 내 인생에 있어 큰 슬픔을 맞았다. 지난 11월 7일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아버지가 여든의 나이에 별세하셨다. 흔히 말하는 호상(好喪)이신게 아닌가 싶다. 평생 정정하시다가 불과 7개월전부터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결국 돌아가셨지만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자식된 입장에서는 더 사셨으면 하는 심정이 오죽했지만 그나마 천만 다행이었다. 큰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면 어찌될 뻔했겠나. 평생토록 마음의 상처가 나에게 큰 짐이 되고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서울에 떨어져 직장생활을 하느라 대구에 계신 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다급하게 불려 나온 동네 일가분들이 지켜봤는데 눈을 잠시 크게 떴다가 감으면서 잠자듯이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가셨다고 한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무언유언'이라고나 할까. 말이 뭐가 중요하나. 오히려 무언이 더 큰 뜻이 있다. 아마 속으로는 "그동안 잘 지냈다. 그리고 너희들 잘 있거라. 내가 먼저 간다. 또 만나자"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느낌이 이상해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도 어떤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임종을 앞두고 60년을 산 두분이 손을 꼽잡으시는게 예술이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장례식을 치른 경북대학교 병원 영안실에서 염습할 때 아버지의 얼굴을 곁에서 보니 참으로 잘생겼고 깨끗했으며 더할나위 없이 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편안한 모습으로 저 세상을 가셨다니 위로가 되었다. 극락왕생하소서.

돌이켜보니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는 대단한 것같다. 우리 7남매는 가난속에서도 학비 걱정한번 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도 함께 생업전선에 나선 탓이다. 그러나 박봉에 7남매를 학교에 보냈다는 것은 아버지 당신은 돈 10원도 쓰지 않았다는 증거다. 철저한 자기희생이다.

또 1989년 대구에서 꽤 큰 서부국민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신 뒤에도 퇴직금을 매달 연금으로 받으셔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전혀 주지않으셨다. 연금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어머니 두분이 충분히 생활하셨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금전적으로 부담을 주지않는 것도 큰 복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집안일가중에서 처음으로 화장을 실천에 옮기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부터 늘 고조부, 고조모를 시작해서 증조부, 증조모등 고향 경북 안동 인근에 산재되어 있는 14위의 조상 묘를 모두 화장해서 고향 마을 산에 가족 납골당을 만들어 모셔라고 당부를 해두셨다. 또 산에 터를 닦는 그 일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훗날 자손들이 그 많은 묘를 관리하지는 않을 것이란 염려와 또 매년 행사처럼 되고 있는 벌초의 번거러움 때문에 내린 궁여지책,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어쨌든 돌아가시면서까지 따뜻한 배려를 자식들에게 베풀어주셨다.

이번 장례식때 아버지의 화장방침을 들으신 어르신네들 대다수는 "돌아가시기 전에도 늘 화장하겠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참 잘하셨다"는 반응을 보이시기도 했지만 일부 어르신네들은 충격을 받은듯 고개를 돌리며 "허참, 허참" 하시며 몹쓸 행동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화장에 대해 찬성하신 작은 아버지도 아버지의 시신이 막상 대구시립 화장터에서 재로 되어나오자 "화장을 하다니, 형님에게 씼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며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늘 그렇듯이 처음은 결단이고 고통이다. 화장을 하신 아버지는 우리집안에서는 선구자였다. 존경합니다.

최근 보면 화장문화는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지도층을 중심으로 화장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평소 판단에 신중하신 아버지가 아니신가. 아버지의 결단은 이미 화장문화가 대세로 기울었다는 반증으로 받아들여졌다. 요즘 30%정도가 화장을 한다고 한다. 예전보다는 큰 폭으로 증가했다. 앞으로 더욱 늘어갈 추세고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본다.

나는 확실히 믿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매장보다는 화장이 훨씬 더 나은 것 같다. 소위 유교를 숭상하는 어르신네들의 논리대로 시신을 불태우는 게 큰 죄라면 차가운 땅속에 시신을 얼게 내버려 두는 매장은 큰 죄가 아닌가. 시신을 불태워 티끌도 남김없이 우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얼마나 멋있고 철학적인가. 우주와 인간, 생과 사, 훨씬 의미가 깊은 것 같지 않은가.

나는 화장찬성론자다. 불교는 화장을 하는 종교다. 기독교는 화장이나 매장이나 뚜렷한 지침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유교만이 매장을 고집한다. " 죽으면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또 예를 갖추어 제례를 지내야한다"는 공자의 말때인지 분묘치장문화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최근 매년 여의도의 1.2배 면적이 묘지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만약 화장제도가 없었다면 전 국토가 묘로 뒤덮을 뻔했다. 전산의 묘지화가 되기전에 화장붐이 일어나 그나마 다행이다.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신의 가호가 있었다. 아름다운 국토가 죽다가 살아났다.

유교는 불교나 기독교처럼 내세를 믿지않는다. 솔직히 종교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이 출범해서 중기까지만 해도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이단시하면서 탄압했으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불교는 사라지지않고 계속 존속했다. 세종, 세조, 성종때는 왕비들이 오히려 더 믿기도 했다.

특히 성군인 세종대왕은 유교문화의 기반을 튼튼히 한 왕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절을 만들고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들 때는 부처님앞에 기도도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불우했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 집안쪽이 아버지 태종에 의해 척결된데 대한 아픔. 형인 양녕,효령대군을 제치고 왕이 된데 대한 불편함, 그리고 태종이 어머니 민씨를 훗날 버리면서 이를 지켜본 괴로움등등. 그래서 말년에 병든 어머니 민씨의 건강회복을 위해 약사여래불 부처님께 기도를 했으며 그토록 사랑했던 심씨가 죽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에 내불당이란 절을 지었다. 둘째아들 수양대군을 시켜 '석보상절'이란 책을 짓도록 했으며 본인 스스로는 '월인천강지곡'이란 불교관계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는 유교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유교는 바라는 소원을 빌고 망자의 영혼을 달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내세관이 없다. 결국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이처럼 헷갈리자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고 불교는 몸을 수행하는 근본"이라고 고려초기 학자 최승로가 딱부러지게 정리를 했다.

유고와 불교를 적절하게 활용한 이도 있었으니 그 이름하야, 중국의 대시인 백낙천. 그는 외적으로는 유교를 받들고 내적으로는 불교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하네요. 산수풍월과 시, 풍류.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있었지만 정신은 저 세상에 가 있었다고 하네요.

유교는 종교도 아닌 것이 조상신은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지 이번에 또한번 느꼈다. 전통상례라는 책자를 보고 그대로 적힌대로 따라한다면 현대후손들로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을 준수한다면 부모가 돌아가시자 마자 오랜 기간 모든 일상은 생업은 물론 딴 일은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직 상만 치러야 한다. 하여튼 유교의 조상신 숭배는 알아주어야 한다. 옛날 우리조상들은 상을 당하고 제사를 기다리기 위해 존재했는 것같다. 장의사가 초상집생기기를 바라는 것처럼.

유교의 조상숭배는 가히 감동적(?)이다. 종교도 아닌 것이 종교보다 더 야단법석이다. 원래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어설픈 사람들이 더 무섭다고 했다. 종교 비슷한 게 종교 흉내내면 못 말린다.

유교의 상례,제례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때 많은 목숨을 앗아간 사화와 당쟁들을 보면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등 상기간, 상복종류, 상례참가자등 상례문제때문일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그 싸움의 이면에는 양반은 늘어나는데 비해 벼슬과 땅은 한정되었기 때문에 이를 서로 차지하기위한 것도 큰 요인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당쟁을 비난하면 그것은 일제시대때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눈을 부라리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봐도 솔직히 비판 받아도 살 만하다. 부끄럽지만 바른 말 해야지. 솔직히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는 우리 역사발전에 해악을 끼친 게 훨씬 더 많다고 나는 판단한다. 참 이상한 게 최근까지 유교를 만든 중국보다 이를 베낀 우리나라가 유교문화를 더 숭상해왔다. 공자가 죽어 저 세상에 있다면 이민해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었을 것같다. 대접을 좋게 받은 곳에 살고 싶으니까. 공자는 문화대혁명때는 조국으로부터 아주 대역죄인으로까지 몰리지 않았나. 공자는 살아 있을 때도 조국 노나라는 물론 인근 여러나라에서 대접을 받지못하고 어떤 경우는 배를 쫄쫄 굶기까지 했는데 죽어서 까지 조국에서 대접을 못받으니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다. 그래도 한국은 공자를 최고로 대우해주었다. 호주제폐지가 잘 안되는 이유도 공자라는 분이 뒤에서 배후조종하고 있기때문이 아닌가싶다.

하여튼 공자는 국조인 단군보다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상황이 크게 달라지고 있어 하늘에 계신 공자도 당혹스러울 것이다. 원래 세상사가 다 그렇다. 공자답게 이해해주십시오.

얘기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났다. 나는 유교문화를 전면적으로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유교근본주의자 어른신네들의 화장에 대한 극도의 반감에 대해 나도 거부감을 갖고 있어 한마디 했을 뿐이다.

이번 상기간동안 문상객도 많았고 내내 날씨도 좋았고 아무런 사고나 애로 없이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뒤에서 도와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백두대간 종주기를 쓰면서 부친상을 얘기를 꺼내 매우 죄송합니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의 별세는 일생에 있어 심각한 사태다. 또 덧붙여 산과 묘, 화장은 깊은 관계가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 흩어져 있는 묘가 여간 못마땅한게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기때문이다. 우리나라 산은 묘지때문에 흉측하기 짝이 없다. 머리에 뻐끔뻐끔 흉터가 난 것마냥 볼썽사납다. 화장문화는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되어야 할 것같다.

나는 불혹의 나이인 40을 갓넘긴 41살이지만 상복은 처음 입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장례식 절차도 처음으로 상세히 알게되었다. 돌아가신 다음날 성복제를 지낸후 삼일 째 발인제, 성분제 그리고 나흘째 초우제 닷새째 삼우제를 거치면서 대충 5번의 큰 제를 지내는 것 같았다.

옛날 3년상하고 비교하면 초스피드, 초약식 장례다. 앞으로 49재라는 절차가 남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불교행사란다. 따라서 삼우제를 끝으로 장례식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 상을 종료하는 탈상을 오래전에는 3년을 지낸 후 끝냈으며 현대 가정의례준칙에는 백일로 줄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삼우제로 종료된다. 혁명적 축소다.

옛날처럼 3년상을 치루거나 백일상을 치룬다면 상주는 실업자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기집, 일가, 남의 집 제사를 지내거나 상가집 돌아다니면서 숙식을 하다가 일년을 다 보냈단다. 하얀 바지, 저고리 땟물이 배여 새까맣게 될 정도로. 어떻게 보면 조상숭배가 지극 정성이고 어떻게 보면 한심한 노릇이다. 조상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을 비판하기도 머쓱하다. 호로자식이 될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유교문화가 남들이 트집잡기 어려운 명분잡는데는 귀신인 것같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두가지 병이 있다. "살아계실 때 잘할 걸" 이란 후회병. 모두들 주위에서 이 말을 자주 들으면서도 한때뿐인 건망증병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효도를 더 못한 게 죄스럽다. 유교못지 않게 불교에서도 효는 매우 중요시 여긴 듯하다. 부처님도 절에 불지르고 탑을 무너뜨리고 삼보(불보, 법보, 승보)를 헐뜯고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이 무간지옥에 간다고 했다. 불효가 그만큼 중요하게 취급했다.

부처님과 효, 어쩐지 어울리지 않은 것같다. 그러나 부처님이 의외로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모님의 은혜는 10가지라는 것. 잉태하여 잘 지키고 보호하여 주신 은혜, 낳으실 때 고통받으시는 은혜, 낳으시고 근심을 잊으신 은혜,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먹여주신 은혜, 아기는 마른 자리에 누이시고 자신은 젖은 자리에 가신 은혜, 젖을 먹여서 길러주신 은혜, 더러운 것을 씻어주신 은혜, 자식이 먼 길을 가면 걱정하시는 은혜, 자식을 위해 애쓰시는 은혜,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은혜. 2천 5백년전이나 지금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나. 특히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다. 부모들은 자식이 실업자가 되어도 소위 장애인이 되어도 무조건 "내 새끼"다. 나도 부모되어 보니까 알겠다.

그런데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참으로 특이하다. 보통 밑으로 내려가는 '내리사랑'의 형태다.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그 부모에게 돌려주지 않고 대신 그 자식에게 쏟는다. 기브 앤 테이크라는 경제논리에 비춰보면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방식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언뜻보면 부모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마음을 넓게 가지면 이해가 가는 대목도 있다. 부모들도 또 그 위 부모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테니까. 제일 재수없는 경우는 부모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식들로부터도 효도를 받지 못할 때다. 제일 운이 좋은 경우는 부모들로부터도, 자식으로부터도 모두 사랑을 받았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보면 '내리사랑'이 가장 평범한 케이스가 될 성싶다.

어쨌든 부모가 살아계실 때 잘 모시는 게 정답이다. '내리사랑'으로 위안 삼지 말고. 위에 계신 부모에게도 사랑하는 '치사랑'도 합시다. 나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효자는 절대 아니지만 면피는 했다. 우리 부부는 한번도 외국여행을 안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두번이나 외국여행시켜드렸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인의 심각한 고질병 "살아계실 때 더 잘할 걸"이란 생각이 또 든다.

우리 어머니는 불교신자다. 우리나라 대다수 할매들이 믿는 그정도 수준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스님이 오셔서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그분은 무상계등이 적힌 소책자를 주면서 계속 읽으면서 아버지가 좋은 곳에 가시라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무상계는 열반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고 생사고해를 건너가는 자비의 배이며 부처님도 이계를 의지해 열반에 드셨고 중생들도 이 계를 의지해 생사의 고해를 건너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무상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머리카락, 골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눈물과 피와 정액 같은 것은 물로 돌아가고 따뜻한 체온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가니, 네가지 요소가 다 흐트러지고 나면 오늘날 그대의 허망한 몸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몸뚱이의 네가지 요소는 헛되고 거짓된 것이니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이다.

몸은 지,수,화,풍 사대가 화합하여 형상이 이루어졌으나 사실은 환(幻)으로 된 것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의 육체는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잠시 빌린 형체에 불과한데 왜 거기에 집착하는가라고 묻는 듯했다. 인간들이 왜 서로를 미워하고 욕심을 부리고 어떤 것에 집착을 하는지. 다 부질 없다는 뜻같았다. 헛된 욕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선한 행업을 쌓으라는 것이리라.

불교에서는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 인연과 업의 이치에 따라 떠나기때문이다.실제로 부처님 자신도 열반시 그렇게 주문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죽으면 하느님의 나라로 가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렇게 열망하던 하느님의 나라 천국으로 가니까. '무위자연'의 노자는 자연으로 ,무로 복귀하기때문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계열의 장자의 부인이 죽었을 때의 얘기가 후대에 자세하게 전하지고 있다. 장자는 부인이 죽자 항아리를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기이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장자 왈, "아내가 죽었을 때 나도 슬펐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인간이란 원래 생명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혼돈속에 뒤섞여 있던 것이 변해 기운을 낳고 그 기운에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생명을 얻어 살아 왔을 뿐이다. 생명을 지녔던 형체가 또 변해서 죽어갔으니 계절의 순환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히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고 소리쳐 운다는 게 오히려 천박한 짓이다". 한 걸음 더나아가 죽음에 임박해서 제자에게 장자왈, " 하늘과 땅을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쌍의 구슬로 삼아 무수한 별을 장식으로 하고 지상만물을 부장품이라 생각하면 부족한 점이 무엇이겠느냐"며 무격식장례를 당부했다. 까마귀나 솔개가 유체를 해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에 " 땅 위에서 솔개나 까마귀의 밥이 될 것을 땅속에 있는 개미나 땅강아지에게 준다고 해서 더 나을 것이 무어냐"고 도인의 기개를 과시했다.

공자는 죽음을 천명으로 보면서 "상례의 경우는 슬퍼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주들은 조문객을 맞으며 무조건 "애고, 애고"라며 슬피, 통곡하는 곡을 해야하며 조문객들은 "어이, 어이" 라며 서러운 듯한 곡을 해야 한다. 이런 것까지 연구를 해놓은 유교문화가 놀랍다.

죽음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나는 이렇게 적절하게 표현한 시를 보지 못했다.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시, 예순 넷의 나이로 돌아가신 순진무구 그자체였던 천상병시인의 귀천이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좋은 소풍에 비유한 게 너무 인상적이다.

세상을 떠날 때 멋진 말들도 많다. 대로마제국을 연 아우구스투스는 "내가 코미디 한편을 잘 연기했더냐. 내 삶의 연극이 그대들을 즐겁게 해주었다면 박수를 치거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다방면에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폭군 네로 황제는 시종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면서 " 나같이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가다니"라며 황당한 말을 남기기는 했지만.

산에 오르다 보면 도인이 되어간다고 느낄 때가 많다. 뭐 아옹다옹하면서 사는가. 다 부질없다.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자동차와 아파트는 장난감처럼 보인다. 물론 사람들은 개미같다. 신선이나 도인들처럼 피식 웃으면서 "짜식들"이라면서 인간들의 바둥거리는 삶을 내려다 보는 것같다. 산에 가면 단순 공간이동에 의해 인생관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사실인지 몰라도 옛날 옛적 하늘을 붕붕 날아다녔다는 도인들도 다 산에 살았고 큰 스님들도 다 산에 있는 굴이나 산사에서 득도했다. 요즘 최고인기인 '개그콘서트'를 빌리자면. "스님들이 왜 산에서 도닦는 줄 아나". 답은 "아파트에서 도 닦으면 이상하잖아". 썰렁해서 죄송.

산은 도닦는 장소인 것같다.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느긋하게 바라보도록 한다. 산이 거대한 절이며 거대한 교회이며 거대한 성당인 것이다. 산에 가서 증오를 키우고 분열을 획책하고 욕심을 키우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산은 도를 깨치고 닦는 도장인 것이다. 산에 자주가야 한다. 국민들은 매달 한달에 한번씩은 반드시 산에 가도록 법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 4대의무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한다.

아버지는 부디 좋은 세상에 가셨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교육자로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오셨다. 나는 그분을 옆에서 지켜봤다. 아버지를 아시는 문상객들은 한결같이 "이 교장선생님은 훌륭한 분이셔서 좋은 데 가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속으로 자랑스러웠다. 어머니도 "너거 아버지는 극락가셨을거야"라고 말했다. 중생이 업에 따라 윤회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윤회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 천상이다. 사후 아버지의 다음 길을 염라대왕이 판단할 때 60년을 함께 산 어머니의 증언도 무척 중요하리라. 부디 극락왕생하소서.

많은 분들이 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살펴주셨다.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초우제, 삼우제를 지내는 이유를 알았다. 사람이 죽으면 보통 그 영혼이 바뀐 적막한 환경을 두려워 하는데 이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란다.

저를 아시는 분들도 많이 오셨고 조화를 엄청 보내주셨다. 조화나 문상객도 다 부질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북적북적대니 기분은 다소 홀가분했다. 나도 인생을 그렇게 헛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꼬. 상가는 가급적 가봐야겠다. 철이 든 것이다. 상을 당해보니 오시는 분들이 너무 고마웠다. 결혼식은 몰라도 장레식은 꼭가야하겠다고 나름대로 다짐해본다.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가시는 것을 보면서 또 산행과도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는 혼자의 길인 것이다. 누가 함께 가고 누가 대신가는 것은 아니다. 산행도 함께 올라갈 수도 있지만 걸어가고 느끼는 것은 결국 혼자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는 것이다. 묵묵히 한발짝 한발짝 내딛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는 성인이 되기위해서는 탈속세, 독신이란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특히 석가세존은 인생은 홀로가는 것이며 도를 깨우치는 것은 혼자라고 말씀했다. 석가왈 "우자를 동반자로 삼지말라. 홀로 가는 것이 낫다. 고독하게 걸어가라"라고 확실히 딱 잘라 말씀했다.

불교초기경전에도 나와 있다."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다와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석가세존은 태어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 이 우주에 내가 가장 귀중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수행중에도 진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혼자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 깨달아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스스로도 용맹정진해서 득도, 해탈했다.

이런 애기하면 공감하는 분들이 많은 것이다. 인생은 어치피 혼자다. 부모님도 계시고 마누라도 있고 자식도 있지만 결국 혼자다. 주위 사람들은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존재다. 아프면 혼자 아픈 것이고 인생에서 겪는 슬픔과 기쁨, 쓴 맛과 단맛 모두 본인의 것이고 본인이 느끼는 것이다. 마누라도, 자식도 이제 남편에게 너무 매달리지 마라. 알아서 살아라. 남편도 이제 해방되고 싶다. 물론 가정을 책임져야하지만.

산을 좋아하고 앞으로도 산을 자주 갈 것이기 때문에 미리 마누라 앞에 선언해야겠다. 비정한 것 같지만 남편에게 매달리지 말아라. 우리나라 여자들은 남편에게 무척 부담이 가는 존재다. 그 부담의 무게를 줄여달라. 알아서 운동하든지, 취직을 하든지, 책을 읽든지, 취미를 갖든지, 남편이 없어도 인생을 알아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결혼은 서로의 자유를 억제해서는 안된다.

그 옛날 신라,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때만 해도 여자들이 잘 나갔다. 신라는 27대 선덕, 28대 진덕, 51대 진성여왕등 여왕이 3명이나 나왔으며 두여왕은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여자들이 재산도 상속받고 제사도 담당했고 자식들이 어머니성을 따르기도 했다. 물론 근래 여성들이 얼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화, 자립화 해나가고 있지만 아직 대다수 유부녀들은 남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시쳇말로 어리고 철이 없다. 우리 마누라하고 관계없는 말이다. 맞아죽을라. 대체적으로 하는 얘기다. 외국여성과 우리나라여성들을 비교분석한 사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자들이 어리광을 부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 서양여자들이나 중국,일본여자들은 일욕심도 있고 독립심이 강한데 우리나라 여자들은 너무 의존적이라고 한다.

귀염성은 있는 모양이다. 요사이 유부녀들이 룸싸롱 아가씨처럼 얼마나 옷차림도 야하고 집에서 남편에게 교태를 부리는지 '가정룸싸롱', '술집룸싸롱' 두가지가 있어 술장사가 잘 안된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룸싸롱주인도 있더라. 실제로 유부녀들 중에는 룸싸롱 아가씨와 거의 구분이 안될 정도로 멋내고 야사시한 사람들이 적잖다. 과거에는 집에 오면 얘키우는 마누라, 밖에 가면 놀아주는 술집여자 구분이 딱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그 구분이 사라졌다는 것. '가정의 룸싸롱화'라고나 할까. '여인의 술집아가씨화'. 어디까지 가려나. 갈때까지 가보자. 성개방풍조까지 곁들여 어떻게 보면 좋은 세상인가.

찐한 얘기 한마디. 밤자리에도 거의 요부 같은 유부녀들이 한두명이 아니고 밤이 되어 방에 불만 꺼지면 마누라를 겁내하는 남편들도 크게 늘어났다는데. 이를 두고 일명 '여성상위시대' 서양사람들 중에서 "한국 유부녀들은 창녀처럼 왜 그렇게 화장을 떡칠하는지" 라며 경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외국에 가보면 사실 서양여자들은 정말로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안더라.

각설하고 고려여인으로 원나라에 끌려가 황후까지 올라간 기황후때 '경신외사'의 기록을 보면 흥미롭다

"기황후는 고려의 미인을 많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신중에 권력자들에게 보냈다. 당시 원나라 고관들과 귀인들은 고려여자들을 얻어야 명문가로 대접받았다. 고려여자들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섬기기를 잘하여 이들이 이르면 대부분 사랑을 빼았았다. 순제이후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고려여자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인계나 애교만점이 통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왜 이분야가 그토록 발달되었을까. 가무의 민족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전쟁이 많아 생존적 차원에서 영웅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랬나, 우리나라여자들이 예쁘기는 예쁜 편이 모양이다. 세계가 인정한다. 축복은 축복이다. 예쁜 여자들속에 파묻혀 사니까. 예쁜 것들이 원래 예쁜 값을 하려고 그러나. 우리민족의 여성을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에라 나도 모르겠다. 헷갈린다.

동양을 대표하는 부처님, 공자님, 도자님등 유,불.선을 주창하신 분들은 한결같이 여자들에 대해 불신을 드러냈다. 이것은 나중 기회에 소개해드리겠음.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봐도 아직 여자들은 고쳐야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남, 녀 똑 같은 인간이다. 통큰 생각, 광폭 생각이라고. 이제 여자들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말만이 아니고 진짜로. 당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앞에서 얘기했듯이 산은 혼자서 가고 혼자서 느끼는 것이다. 정상에 섰을 때 기분은 본인의 노력속에, 본인만이 느끼는 희열이다. 다른 사람이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그 기쁨을 내가 느낄 수 없고 내가 산에 오를 때 겪는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다.

쉽게 얘기해서 똥을 누고 싶은 생각을 남에게 전가해서 해결할 수 없듯이. 만약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남이 대신 똥을 누어주면 냄새나고 더러운 화장실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아도 되니까. 돈 있고 권력있는 사람은 싫은 것은 하지 않고 좋은 것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생노병사의 사바세계는 이상해진다. 석가세존도 생로병사를 보면서 홀연히 출가의 길을 떠났다. 만약 부자나 권력자가 생로병사가 대신 가능했다면 석가세존도 도닦을 일도 출가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등산은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이다.

이번 아버지의 상을 당하면서 나의 종교가 불교는 아니지만 부처와 싯다르타라는 말을 음미해봤다. 부처라는 말은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 석가세존의 태자때 이름인 싯다르타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월드컵때 붉은 악마들이 펼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감동적인 카드섹션문구를 다시 연상케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문구는 21세기 새천년의 한국의 최대화두다. 붉은 악마들은 참 똑똑한 사람들이야. 아이큐들이 얼마인지.

늘 그렇듯이 결론은 매우 중요. 오늘의 결론은 산은 인생의 도를 깨닫게 해주는 공간, 도장이며 백두대간종주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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