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초점> '풍운아 허주(虛舟)'...삶과 영욕

자유인, 로멘티스트, 시인, '선비탈 웃음'의 정치인인 허주(虛舟) 김윤환(金潤煥) 전 의원이 세상을 떴다. '양지'를 지향하면서도 권위에 매이지 않은 분방한 성격과 선친에게 물려받은 경제적 여유는 그가 여야나 이념, 세대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맺을 수 있는 자산이 됐다. 비록 변신의 천재, 구시대 정치인의 전형이란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고비마다 조정력으로 난관을 헤쳐갔다.

◇출생과 성장=1932년 경북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 천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허주는 선친 김동석(金東碩.4대 국회의원)씨의 영향을 받아 대학 3학년(경북대 영문과) 때 정치할 결심을 굳혔다. 허주는 지난해 기자를 불러 선친의 유훈(遺訓)를 들려준 적이 있다. "언제였던가. 3대 민의원 총선에서 실패한 직후 아버지가 고향 낙동강변에서 내 손을 잡고 '네가 꼭 정치인으로 성공해라'고 당부하던 그 떨리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었다.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권오기(權五琦) 전 통일부총리, 정호용(鄭鎬溶).유수호(劉守鎬) 전 의원과 경북고(32회) 동기인 허주는 황금사자기 대회 본선에 참가, 주전선수가 부상당해 3루수로 잠깐 뛴 '특이한 이력'을 자랑삼아 말하곤 했다. 또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백선엽(白善燁) 장군이 이끌던 1사단 17포병대에 참전, 다부동 전투를 거쳐 북진, 압록강까지 진군한 일이 있다고 한다.

시인으로서 허주는 또 다른 이력이다. 시인 허만하(許萬夏), 영화 평론가 이영일(李英一) 등과 함께 문학 무크지인 '시와 비평'을 1956년 2월 대구에서 창간, 한국 현대시사에 이름이 오를 정도다. 앞서 55년 6월19일자 대구 매일신문(지금의 매일신문)에 '참회-그리운 사람들에게'라는 시가 실린 일도 있다.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대구일보에서 1년반, 영남일보에서 몇 달을 보낸 뒤 동화통신을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 편집국장 대리를 끝으로 물러나기 까지 17년간 언론계에 재직한 그는 40을 갓 넘긴 72년 9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은 동향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거기(善山)는 신현확(申鉉碻) 의원이 더해야 하니 자네는 유정회(維政會)에 들어와 나를 도와달라" 고 말했다.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첫 출발이 됐다.

그의 정치력이 빛을 발한 것은 두 대통령을 탄생시킨 킹메이커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 때는 '4자 필승론'으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는 노태우-김영삼-김종필(金鍾泌) 3자의 갈등으로 인한 파국을 막으려 'YS대세론'을 끌어내기도 했다.

◇불우한 말년=하지만 지난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에게 팽(烹)당하면서 불운이 시작됐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그는 2000년 총선을 얼마 앞두고 민국당을 창당, 재기를 노렸으나 도의원 출신인 김성조(金晟祚) 의원에게 패하면서 좌절하고 만다. 자주 병원신세를 져야했던 허주는 끝내 신장암 판정을 받아야 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쪽 콩팥을 떼어내는 척추수술까지 받았지만 병세는 악화, 지난 10월 귀국했다. 뇌사상태에 빠져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도 허주는 불법 대선자금 파동과 최병렬(崔秉烈) 한나라당 대표의 단식 소식을 듣고 걱정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권력정치의 끈을 놓기 싫어서였을까. 15일 허주는 공교롭게도 이 전 총재가 검찰에 자진 출두하던 날 홀연히 세상을 떴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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