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시절에 모 고등공민학교에서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2학년 때던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과 선배를 따라 그 곳으로 놀러 갔다가 얼떨결에 선배의 짐을 대신 떠맡았다.
한두 번이면 된다는 선배의 꾐에 속아 덜렁 수락해 버린 것이 내처 덤터기 쓴 꼬투리가 되었다.
지금도 그런 학교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그 학교는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는 야간 학교였다.
가정 환경이 좋지 못해 중학교를 가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 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문을 열었는데, 그 학교를 나오면 검정고시에서 일부 과목을 면제해 주는 특혜가 있어 상급학교 진학의 뜻이 있는 아이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터에 한때는 정원이 초과될 정도로 북적거리기도 했다.
일찌감치 교단 경험을 쌓아 볼까 하는 이악한 속셈으로 아이들 앞에 서게 된 나는 그만 순수한 정에 이끌려 나중에는 아르바이트까지 접고 매일 그 곳으로 출근할 만큼 푹 빠져 버렸다.
우동이나 자장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흡사 인적이라도 끊어지면 유령이라도 나올 듯한 허름한 가건물에서 여름이면 천장에서 대책 없이 비가 세고 겨울이면 유리를 대신한 신문지 창이 덜걱거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했지만, 우리들에겐 열정이 아이들에겐 순수와 꿈이 있어 고생스러운 줄을 모르고 지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며칠 전, 나는 그 때의 한 제자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스산한 연말 분위기가 완연한 12월이 되면 각종 모임과 소식을 알리는 우편물이 풍성해지기 마련인데, 그 편지는 십여 통에 달하는 여느 우편물 속에 섞여 있었다.
나는 처음 그 편지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보내는 사람'의 난에 씌어진 성명과 주소는 분명 내 기억 속에 없던 정보였다.
편지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성이 듬뿍 담겨 있었다.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녹두알 크기의 먹빛 글씨로 촘촘히 써 나간 편지는 자그마치 석 장을 채우고도 모자라 뒷면의 여백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정성과 애씀으로 편지 한 통을 마무르자면 안쫑잡아 일주일이 걸려도 부족할 성싶었다.
사연은 자신의 근황을 생략한 채 온통 그 시절의 추억들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놀라웠다.
수십 년이 지난 옛일을 어제처럼 또렷이 재현해 내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용히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더없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두 차례나 꼼꼼히 숙독했음에도 끝내 그 제자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급기야 해묵은 사진첩을 뒤지고 나서야 어렵사리 그 제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가 3학년일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충무로 수학 여행을 갔었는데 한산도로 가는 뱃머리에서 나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사진첩 속에 요행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삼남매의 소녀 가장이었던 그녀는 어느 대갓집의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2박 3일간의 휴가를 내주지 않아 수학 여행을 못 갈 형편에 놓여 있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그 사실을 안 내가 직접 가정 방문하여 허락을 받아냈는데, 그게 두고두고 가슴속에 빚으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사진 한 장과 편지 하나를 앞에 놓고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이제는 의젓한 중년 여성이 되었을 제자의 얼굴 뒤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때의 추억들이 마치 먼지를 뒤집어쓴 구멍가게 유리창 너머의 풍경처럼 아련히 떠올랐다.
세월이 가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고 한 점 추억만 우련히 남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추억은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애틋한 빛깔로 채색되는 것 같았다.
나는 뜻하지 않은 한 제자의 배려로 그날 밤, 가슴 설레는 추억 속을 마음껏 유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 한 해가 저무는 막다른 길목에 서 있다.
이맘때쯤이면 매스컴에서는 으레 '다사다난'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렇다.
올해만큼 이 말이 절실히 가슴에 와 닿는 해도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무엇보다 우리 대구는 연초에 돌이키고 싶지 않은 불상사가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 해가 가기 전, 스산한 우리의 영혼을 화톳불처럼 훈훈하게 쬐어 줄 편지를 써 보면 어떨까. 기억 속을 더듬어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은혜로운 사람이나 빚진 사람, 아니면 여태 가슴속에 묻어 둔 그리운 사람에게 따스함이 없는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 대신, 땀과 정이 밴 자신의 글씨로 또박또박 밝혀 쓴 아주 특별한 편지를….
이연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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