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25)-'젖줄'황강을 따라

*'볼록 볼록' 거대한 무덤 빼곡히...

백두대간 소백산맥의 한 봉우리인 남덕유산(1,508m)의 동쪽 경사면에서 발원, 경남 거창을 거쳐 동쪽으로 합천을 에돌아 창녕 부근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 들어가는 황강(黃江).

낙동강과 합류하는 황강 하구에서 북쪽으로 7km쯤 들어간 황강 연안에 돌출한 해발 50m의 구릉지역. 불룩불룩 치솟은 거대한 무덤들이 빼곡하고, 동남쪽 인근에는 흙으로 쌓은 성이 둘러싼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玉田) 마을의 '옥전 고분군'이었다.

옥전 마을의 동쪽에는 '다라리(多羅里)'가 자리잡고 있다.

옥전 고분군의 무덤 수는 중.대형 30여기와 소형 등 1천여 기에 달했다.

규모에서 고령 지산동 고분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황강을 배경으로 북쪽으로 토성과 궁성 터, 그 뒤편으로 능선을 따라 지배층 무덤이 포진, 회천을 배경으로 궁성 터와 주산성, 그 주산 능선에 배치된 지산동 고분군과 축조환경도 거의 비슷했다.

그렇다면 이 무덤 군락에는 어떤 인물들이 묻혔고, 또 지산동 고분의 주인공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옥전 고분군의 능선 동쪽에 있는 규모가 두 번째로 큰 M3호 무덤(밑바닥 19.4m×21.6m의 타원형) 안으로 들어갔다.

땅 아래로 구멍을 낸 수혈식(竪穴式) 돌널(石槨) 구조였다.

주인공 널(主槨) 안에는 주조 돌도끼가 직사각형으로 깔려 있었고, 금동제 말 장구 등 상당량의 철기, 한 쌍의 금 귀고이, 용과 봉황 무늬를 새긴 고리모양 손잡이 큰 칼(環頭大刀)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

부장품 널에는 83점의 토기와 사슴뿔 등이 보였다.

특히 주인공이 안치된 주곽에서는 대가야 지배층 무덤 중 질과 양에서 가장 압도적인 철제품들이 쏟아졌다.

갑옷 6점, 투구 2점, 대검 1점, 대도 13점, 소도 70여점, 화살촉 400여점, 창 13점, 말투구 2점, 안장 2점, 재갈 3점, 덩이쇠 28점, 주조 쇠도끼 121점, 단조 쇠도끼 15점 등등. 상당한 위세를 가진 소국의 왕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중 더욱 눈길을 끈 것은 망치, 집게, 숫돌, 덩이쇠, 주조 쇠도끼였다.

이른바 '단야구(鍛冶具)'인 셈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철을 제작할 수 있는 집단을 장악했거나, 철 제작 집단의 수장으로 단정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됐다.

가야세력 중에서 철 제작집단을 장악했다는 것은 바로 강력한 무력을 소유한 세력, 나아가 하나의 소국을 형성한 세력으로 볼 수 있다.

400년대 후반 쌓은 M3호 무덤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이전에 축조된 무덤에서 나온 토기가 주로 창녕(비화가야) 양식인 점에 비해 대다수 대가야 양식 토기가 출토됐다는 점이다.

옥전 고분군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M1호 무덤. 400년대 중반 쌓은 이 무덤에서는 창, 대도, 말 갑옷, 화살촉 등과 함께 대다수 창녕 양식의 토기가 쏟아졌다.

또 5, 6기의 껴묻이 널(殉葬槨)과 금동 허리띠 등 장식성이 뛰어난 유물로 미뤄 이 지역 최고 위계의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됐다.

300년대 초반 쌓은 54호 무덤에서는 대다수 함안(아라가야) 양식 토기가, 300년대 후반 축조된 23호 무덤에서는 창녕 양식과 신라 양식이 뒤섞여 나왔다.

또 500년대 중반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M11호 무덤의 경우 무덤 양식이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 양식과 비슷하게 가로로 구멍을 낸 횡혈식(橫穴式) 돌널이었고, 각종 장신구도 백제 양식의 영향이 엿보였다.

그렇다면 이 옥전 고분군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옥전 고분군 인근에 있는 다라리, 철기 제작집단을 소유한 강력한 세력, 환두대도와 말장구 등 왕 무덤의 형식을 갖춘 각종 유물 등등. 바로 문헌에 국명만 남아있는 '다라국(多羅國)'이었던 것.

황강 하류지역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한 옥전 세력은 황강과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 주변의 창녕, 의령, 고령, 거창과도 쉽게 교통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같은 여건은 또 주변 가야세력 및 신라의 간섭과 견제도 쉽게 받을 수 있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다라국은 옥전 고분군의 유물에서 알 수 있듯 철 제작집단을 확보한 독자적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300년대 초반에는 함안 세력, 후반에는 창녕 세력과 신라에 영향을 받다 400년대 중반부터 대가야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

합천지역에서 황강을 따라 가장 서쪽에 있는 봉산면 송림리 '반계제 고분군'. 합천댐 수몰지구에 있는 이 고분군은 400년대 후반~500년대 초반에 쌓은 4기의 대형 무덤을 비롯해 모두 40여기의 돌널 무덤으로 이뤄져 있다.

이 무덤에서는 토착계나 외래계 유물은 보이지 않고 모두 대가야 유물 일색이다.

대가야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이 곳 토착 세력과 별다른 무력충돌 없이 장악한 지역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같은 합천댐 수몰지구에 위치한 대병면 '창리 고분군', 봉산면 '봉계리 고분군', 봉산면 송림리 '중반계 고분군', 봉산면 '저포리 고분군' 등은 500년대 초반부터 중반 사이에 대가야 세력이 진출한 흔적이 뚜렷했다.

또 황강에서 남쪽으로 뚝 떨어져 분포하고 있는 '삼가 고분군'의 경우 무덤 규모 등으로 봐 강력한 독자세력이 존재하다 400년대 후반 대가야권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됐다.

400년대 중반 야로 철산지를 확보한 대가야는 이처럼 서쪽과 남쪽으로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해 길목에 위치한 황강 하류의 합천지역 각 세력을 장악했다.

특히 반계제, 창리, 봉계리, 중반계, 저포리 지역을 복속한 뒤 서쪽으로 진출했고, 400년 후반 옥전과 삼가 세력을 아우른 이후 남쪽으로 각각 세력을 뻗쳐 나갔다.

백두대간을 향해, 또 경남 서부지역을 향해 달리는 말에 힘차게 채찍을 내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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