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블루 크리스마스

아침 출근 길, 짤막한 뉴스 하나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요즘은 애견(愛犬) 유치원이 생겨 매일 아침마다 개를 유치원 버스에 태워보내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남의 취미생활을 놓고 왈가왈부할 권리야 없지만 '재미있는' 뉴스라기보다 '이상한' 뉴스라는 생각이 앞선다.

언뜻 며칠 전 읽은 신문기사가 오버랩된다.

불우이웃시설에 대한 기부금이 줄고있는데다 사회복지단체 후원자들조차 썰물처럼 빠져나가 어느 해 보다 추운 겨울을 맞고있다는 소식이다.

대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이달부터 현재까지 모은 모금액이 지난해의 30%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가 없는 소년소녀 가장들이 사는 '꿈나무 집'에도 도움의 손길이 끊어져 성탄절 선물로는 한 아저씨가 사 줄 것으로 약속한 자장면 한 그릇이 전부라는 기막힌 사연이다.

초등학생 수준의 셈 법으로 봐도 애완동물에 대한 '과잉투자'를 훈훈한 인정(人情)으로 돌린다면 사회가 훨씬 밝아질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또 그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않다.

이 극과 극을 달리는 사회의 양면성과 불균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늘 성탄절을 맞아 새삼 떠오르는 화두(話頭)다.

우리는 지금 양극(兩極)사회의 언밸런스에서 균형을 잃고 있다

엊그제 오스트리아 빈대학 의과대학이 50개국 국민들의 평균 IQ를 비교한 결과, 가장 높은 나라가 홍콩(107)이며 그 다음이 한국(106)으로 나타났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가 102 정도이고 미국은 98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머리 좋기로 소문난 민족이 왜 이 모양인가. 정치판이나 교육, 경제 어느 분야든 그 좋다는 머리들은 다 어디갔단 말인가. IQ 세계 2위가 이 지경이라면 미국은 벌써 결딴이 나야 할 판인데 결과는 정반대다.

망년회 자리에서 나온 친구의 우스개를 듣고는 겨우 이해가 간다.

"좋은 머리들은 모두 도둑질하는데 가있기 때문이라고".

또 하나. 한국은행은 최근 우리나라는 선진국 진입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내용인 즉, 한국은 그동안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성공을 해왔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생산성이 정체돼 지금은 미국의 50% 수준이며 영국.프랑스.싱가포르.홍콩의 60%, 일본의 66%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정도 수준으로는 선진국은커녕 이미 남미(南美)의 여러 나라들이 경험했듯 선진국 진입 문턱에서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머리가 좋은 국민이지만 생산성 얘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다.

그러나 의문은 있다.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국민이 게으르거나, 그렇지 않다면 머리가 나빠 무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경우라야 이치에 맞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둘 다 아니다.

한국 사람의 두뇌와 근면성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왜 생산성이 낮은가.

한 마디로 바가지가 새기 때문이다.

오로지 권력에 목이 매이고, 돈이면 인간성까지 팔아먹는 금전(金錢)만능주의가 팽배하다 못해 넘쳐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부패 사슬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다.

게다가 청년 실업자까지 들끓는 구조적인 모순점까지 안고 있으니 바가지에 아무리 물을 퍼 담은들 온전할 리가 없다.

이런 불균형도 국민 탓인가.

요즘은 국가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이 국정의 핵심이다 보니 어딜 가나 '지역 혁신'이 담론으로 등장한다.

지역 혁신은 지역 스스로 발전의 원동력을 찾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지방 정부와 업계, 학계는 서로 목소리 높이기에 바쁘고 정작 힘을 합쳐야 할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삐걱거린다.

개혁 주체들끼리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데 어디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언제 상호 신뢰를 구축해 지역 혁신을 이룩한 단 말인가. 이런 상태에서 대구와 경북을 합친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사람은 대체로 거꾸로 선택을 한다.

이를 역(逆)선택(adverse selection)이라고 한다.

역선택의 결과가 바로 '모럴 해저드' 즉 도덕적 해이다.

우리 모두 거꾸로 삶을 살고있는 것은 아닌지, 엘비스 프레슬리의 우울한 크리스마스(Blue Christmas)가 성탄절의 오후를 적신다.

윤주태(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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