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東京)에서 전철에 몸을 싣고 북서쪽으로 향했다.
사이타마(埼玉)현을 거쳐 100km 남짓 달린 군마(郡馬)현. 혼슈지방 중간쯤 위치한 내륙 도시다.
1천500여년 전 왜(倭) 왕권의 근거지인 오사카, 나라 등 키나이(畿內) 지방에서도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역. 대가야가 규슈 후쿠오카((福岡)에서 출발해 일본의 지중해인 세토나이카이(瀨湖內海)를 헤치고 혼슈 오사카(大板)에 도달한 거리만큼이나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이었다.
설마 이곳까지 대가야의 영향이 미쳤을까. 예상은 빗나갔다.
대가야 양식의 각종 유물은 물론 대가야인들이 이주해 정착한 흔적까지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때 대가야인들은 이 곳에 왜, 어떻게 왔을까.
글자 그대로 말(馬)이 많은 지역인 군마현 다카사키(高崎)시의 '간논야마(觀音山) 고분'. 500년대 전반의 대표적 왜 지배층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앞쪽이 직사각형, 뒤쪽은 둥근 모양의 무덤)이었다.
열쇠 구멍처럼 생긴 무덤의 길이는 고령 지산동의 대형 무덤보다 3, 4배나 긴 97m였다.
무덤 지킴이, 다카다 겐지씨와 함께 철문을 따고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다카다씨는 공무원도 계약직도 아닌 군마현의 평범한 시민이다.
돈 한푼 받지 않고 지역 유물을 지키는 자원봉사자다.
다카다씨는 "군마 일대에는 역사 교사나 문화재 관련 (향토)사학자 출신중 은퇴한 뒤 유물.유적 지킴이로 자원한 사람들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문화재 담당자조차 비전문성과 잦은 교체 등으로 자부심이 높지 않은 한국 문화재계가 눈 여겨볼 만한 대목이었다.
간논야마의 무덤 속 돌방(石室)에는 바닥, 천장, 벽면이 모두 돌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은 강돌로 메웠고, 천장과 벽면은 모두 560개의 돌이 꽉 들어차 있었다.
특히 18t에서 22t에 달하는 천장 돌은 이 지역에서 12km 가량 떨어진 산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다카다씨는 설명했다.
이 거대한 무덤에서 대가야 양식 투구(武胄)와 세 고리 방울(三環鈴)이 나왔던 것. 군마 현립 역사박물관에 보관된 투구는 철판 너비가 넓고, 중앙에 긴 돌기가 있으며 돌기 주변에 테두리 흔적이 뚜렷한 전북 남원 월산리 A호 무덤의 그것과 유사했다.
말 장신구인 삼환령도 보물급인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었다.
노토 다케시(能登健) 군마 현립 역사박물관 전문원은 "간논야마 무덤에서는 백제 거울과 신라, 중국 유물이 함께 출토돼 삼국시대 백제, 신라, 가야, 중국, 왜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주요 고분"이라고 말했다.
군마군(郡) 군마정의 '시모시바야츠(下芝谷) 고분'. 돌로 직사각 모양의 계단식 구조로 쌓아 올린 무덤(方形 積石塚)이다.
적석총은 일본에서 나타나지 않는 한반도 양식의 무덤 구조인 점을 감안할 때 주인공의 정체에 관심이 쏠렸다.
이 무덤에서도 대가야 양식의 F자 모양 말 재갈 장식(鏡板)과 청동으로 만든 세 고리 방울이 나왔다.
군마정 가미츠케모사토 박물관에 보관된 말 재갈 장식은 대가야권에만 한정된 유물이었다.
가야계 무덤 양식과 대가야 말 장신구는 무덤 주인공과 대가야인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증거였다.
가미츠케모 사토 박물관의 우치다 마스미(內田眞澄) 학예원은 "군마현에는 400년대 가야 이주민들의 유적으로 보이는 무덤이 5, 6곳에서 나타난다"며 "돌을 흙에 접착해서 쌓아올린 무덤 구조와 말 장신구 등은 대표적인 한반도계, 그 중에서도 가야계통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의 상징 동물이 말인 군마현에는 이처럼 400년대 중반 이후 500년대 중반까지 말, 특히 대가야 양식 말 장신구들이 대거 쏟아지고 있다.
일본열도에 식육용이 아닌 싸움 말(騎馬)이 등장한 시기는 400년대 중반 이후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가노(長野)현에서는 대가야 말 장신구를 장착한 말뼈도 출토됐다.
시기는 물론 일본열도에서 싸움 말이 등장한 때였다.
한.일 사학계는 400년대 중반 이후 왜에 등장한 말은 중국 한 대(漢代)의 것이 고구려로 전해진 뒤, 다시 신라와 가야를 거쳐 왜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군마현의 말 장신구는 대체로 대가야 양식이고, 이 유물이 묻힌 무덤 축조방식도 가야 계통인 점으로 미뤄 왜로 이주한 대가야인들이 배에 말을 싣고 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군마현 다카사키(高崎)시 하치만(八幡)정 '겐자키나가도로니시(劒崎長瀞西) 유적지'. 다카사키 시가지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약 6km 떨어진 넓은 대지에 분포한 곳. 대체로 400년대 중.후반에 형성된 이 유적에서는 이주민의 흔적이 더욱 또렷했다.
100여기에 달하는 이 무덤 군락 중 13호 무덤 흙구덩이(土壙)에서 말 이빨이 출토됐고, 5, 9, 10, 14호 무덤 주변에서 한반도의 연질토기가, 10호 무덤 안에서는 금 귀고리가 나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대체로 무덤이 아닌 주거지에서 나오는 연질토기가 10호 무덤에서, 더구나 대가야 양식 금 귀고리와 함께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다카사키시 간논츠카(觀音塚) 고고자료관의 다키자와 타다시(潼澤匡) 학예원은 "적석총과 연질토기, 보주형 장식 금 귀고리는 전통적 왜 양식이 아니다"며 "한반도계 무덤 구조와 유물은 무덤 주인공이 이주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의 방증 자료다"고 말했다.
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었지만 일본 땅에는 대가야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대가야 이주민의 후손들은 지금도 자신의 핏줄이 어디서 이어져 왔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본 땅에서 살고 있을 터. 대가야와 왜, 한반도와 일본의 질긴 역사의 끈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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