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관상을 보는 이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 얼굴의 인상(Physiognomy: 즉 그의 얼굴 모양, 깊이 패인 주름살, 눈의 크기, 눈빛, 입술의 색 등)을 읽고 적절하게 그와 교류한다.
물론 첫번째 인상은 몇번 더 만나면서 수정되기도 하지만 비록 틀렸더라도 새로운 얼굴을 대할 때 인상을 읽고 그 사람에 대한 어떤 막연한 해석(거기엔 평가도 내포됨)이 없었더라면 그것을 기초로 한 의미 있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인 교류도 애당초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얼굴의 모든 흔적은 자연법칙에 의하여 조각된 그의 삶과 경험, 체험의 결과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 일상생활의 언어 행위 속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또는 용어)들도 사람의 얼굴처럼 '인상'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너무나 엉뚱한 발상으로 들릴까? 구두로 말할 때 그 단어가 어떤 톤으로, 어떤 액센트로, 어떤 크기로 발음하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텍스트 속에 나오는 단어나 용어의 '인상'이라면 좀 더 황당하게 들릴까?
하버드의 철학자 스탠리 카벨은 바로 그런 주장을 폈다.
즉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한 단어는 여러 다른 학문적, 이론적, 사회문화적 콘텍스트 속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학문의 경우 어떤 용어를 새로운 콘텍스트 속에서 만나게 될 때 그 용어의 사용 역사는 바로 그 단어의 개념적인 '인상'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단어의 개념으로서의 역사적 족적을 무시하고 기껏해야 사전적 의미만으로 그 용어의 개념적 이해를 도모한다면 그땐 서로간의 이해는 공허한 것이고 그런 식으로 용어를 구사하는 무리들은 허무주의적 말장난에나 열중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로 이런 현상이 한국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단어의 용어로서의 역사적인 족적에 무지한 순전히 사전적 의미만으로 된 번역서들이 제대로 된 학문의 도입은 커녕 엉터리 개념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의미 없는 논문들만 양산하여 지적 공해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 한국 고등교육의 현주소라면 정치담론은 전혀 논리적으로, 계보학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용어들을 제 멋대로 사용하여 한국 정치를 허무주의적 파워 게임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닌가? 지금의 한국 정치담론 속에서의 '진보, 보수, 좌파, 우파, 인권, 민주, 자유' 등의 용어들이 제 멋대로 사용되어 그 용어들의 사전적 의미만 간신히 파악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을 현혹시키거나 잘못 인도하여 우민정치를 실현시키고 있으니 바로 이것이 '남미화'(즉, 민주라는 이름의 대중 영합주의)의 원인인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정치 담론 속에서 용어들이 얼마나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진행되는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진보 좌파'라는 용어를 통해 살펴보자. 과연 누가 진보 좌파에 속하는 것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일까? 아니라고 대답할 근거가 더 많다.
어떻게? 김 전 대통령은 시장경제 중심의 미국식 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적극 펴지 않았는가? 미국 정부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대북 관계에서만은 자주적인 햇볕정책을 써서 북한에 우호적이었으므로 '진보 좌파'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논리의 전개도 가능하다.
즉 북한 정권이 좌파 정권이 아닐 뿐 아니라 서구의 좌파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인권문제에 있어서 김 전 대통령은 진보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북한의 심각한 인권문제를 의식적으로 덮어 둔 것이 김 전 대통령 재직시의 햇볕정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회는 말을 할 때 개념적인 정확성에 굉장히 소홀하다.
비단 정치 담론에서만이 아니다.
너무 쉽게 양비론적인 논리에 휩쓸려 버리는 경향이 많은데 이것은 지적으로 게으른 때문이 아닐까? 구별할 것은 구별하고 정확하게 용어를 구사하여 계속 검증하여야 오해가 없을 텐데 우리는 그냥 얼버무리길 좋아하고 "아니 당신, 따지자는 거야?"하고 나무라는 데, 아니 왜 '따지는 것이' 버릇없는 짓일까? 그런 태도부터 고쳐야 되지 않을까? '국제화, 국제화'하는 데 우선적으로 이런 언어행위, 논리적 사고의 국제화가 급선무가 아닐까.
홍가이(경성대 해외석학 초빙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