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형제봉 관람 끝. 아, 이제 하산이다. 아, 기쁘다. 뭐라캐도 하산은 언제나 좋아. 한시간 가량을 가파르게 또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쉼 없이 내려오니 말허리 같은 안부, 피앗재가 나왔다. 곧장 직진은 속리산 정상인 천황봉으로 가고 좌측은 만수계곡으로 내려간다는 이정표가 나왔다.
만수계곡은 물이 바짝 말라 있고 잡목들이 귀신 같은 몰골로 정글처럼 우거져 있었다. 산죽도 군데 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참 오랜만이네, 반갑기도 하고. 예전에는 민가도 있었던 흔적이 뚜렷한데 무슨 이유로 다들 사라졌는지. 길도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 즉 기분 나쁜 계곡이었다.
심상준 선배와 나, 이현주 세 명이 후미가 되어 30분 가량을 정신없이 혼 빠진 듯 내려가니 오후 2시, 마을로 이어지는 농로길이 나왔다. 이번 산행, '땡'. 하산 종료. 이번 산행은 대략 10시간 걸린 셈이고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을 빼면 대략 8시간 반 걸렸다.
산 숲에서 빠져 나오니 농로 바로 앞에는 너르게 사과밭이 쫙 펼쳐져 있고 개울 건너편에는 허연 화강암 절벽이 섞인 우람한 산이 우뚝 서 있다. 시멘트포장 길과 비포장 흙길이 교대로 이어진 농로따라 내려가니 몇 채 되지 않은 아담한 민가가 나왔다. 사방 주위가 높고 큰 속리산에 폭 파묻힌 아늑하고 고요하고 평온한 마을인 것 같다. 마을 분들은 뭐 먹고 사나. 인적도 없고 새들만 농가 마당 나무 위에서 한가롭게 지저귀고 있다.
마을로 들어오기 직전 개울 끝자락에 유영래 대장하고 백신종 선배가 냉욕을 하기위해 계곡 얼음을 돌로 깨고 있다. 벌써 백선배는 홀라덩 벗고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간다. 나를 포함한 후미 세명도 개울가로 후다닥 달려가 역시 훌라덩 벗고 물속에 들어갔다. 발이 얼마나 시린지. 얼음장 같은 물에 온 몸을 몇 차례 넣었다 꺼냈다. 겨울 계곡냉욕은 사우나 갔다 온 것처럼 몸이 늘 가뿐하다.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모른다. 겨울 냉수욕이 건강의 지름길은 확실하다.
계곡욕을 끝내고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오른쪽 정면에는 삿갓 모양의 그 장엄한 속리산 정상인 천황봉이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감격. 그 행복. 다음 산행에 오를 코스이지만 이미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곳 지명을 보니 보은군 내속리면 만수리. 물이 많아서 만수계곡인가. 영동의 물안계곡도 물이 많아서 이름이 지어졌는데, 비가 오니 진짜 물이 넘치더라구요.
주변에 병풍처럼 펼쳐진 산 능선 경치가 가히 신선들이 사는 곳 같이 신비롭고 경이롭다. 졸졸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가는 만수계곡이 고색창연하고 소담스럽다. 빨간 벼슬을 곧추 세운 흰 닭 한마리가 마을앞 논에서 자유롭게 뛰어 논다. 인간은 못 되어 닭으로 태어나면 저 정도는 자유롭게 살아야지. 조류독감으로 집단폐사 되어서야.
이미 전국에 걸쳐 오리와 닭 수십만 마리가 잔혹하게 무차별 도살 처분되었다고 하네요. 어느 도 축산위생과 공무원은 "소는 망치나 도끼로 타격하고, 돼지는 전기로, 오리는 크기에 따라 처리하는 등 도살처분 방법을 가축전염병 예방법에서 명시하고 있다. 닭은 큰 닭과 작은 닭의 구분이 모호하고 또 어떻게 죽이라는 기준도 없어 대충 알아서 죽일 수밖에 없다" 며 곤혹스러워 했다고 해요. 어떻게 이 수미산처럼 높게 쌓인 죄를 다 씻나. 대한불교 조계종 관계자는 "불상생계, 즉 미물일지라도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작금의 사태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한숨만 내쉬는 가 봐요.
최근 미국 광유병파동까지 겹쳐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육류장사들이 작살이 났다고 하네요. 설렁탕까지 피 보는 모양이에요. '회'만 찾는다고 해요. 육류를 너무 먹으면 안되는데 이제 원래로 돌아오는 구만.
이조시대만 해도 고기는 귀한 음식이죠. 그때만 해도 '육식자'란 '채식자' 반대가 아니라 귀족이나 고급관료를 지칭했다고 해요. 중세에는 고기가 귀한 음식이어서 고기를 먹을 정도면 지배계급이니까. 오죽 했으면 소를 도살하면 가뭄이 난다는 미신이 통했을까요.
조선들의 소 숭배 사례. 숙종실록에 따르면 송시열은 가뭄을 걱정하면서 정자 (程 子)의 말을 인용하면서 소의 밀도살을 엄금할 것을 주장했다고 해요.
정자 왈, "농사가 흉년이 드는 것은 소를 잡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소의 힘으로 농사 짓는 사람들이 고마움은 커녕 죽여서 잡아 먹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죠. 게다가 도살하면 소의 원한이 천지의 화기를 손상시키고 이것이 자연의 운행질서를 깨뜨려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중국 역사에서 똑똑하기로 유명한 정자도 요즘 이헌태가 보면 황당무계.
대학자인 율곡 이이도 이런 이유로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고 율곡 집안에서도 율곡의 제사에는 쇠고기를 쓰지 않는다고 해요. 힌두교 집안 출신인가.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소를 왜 숭배하고 잡아 먹지 않는 줄 아세요. 그 많은 인구가 잡아먹으면 소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고 해요. 다 이유가 있었구만. 아니먼 말고.
우쨌든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야연', 이것을 벙거짓골이라고 하는데 18세기부터 유행을 했다고 해요. 현대에 와서도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년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이후 지금까지 소,돼지의 '대량 살륙사'죠. 몇 년전부터는 육식기피풍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산골 마을은 국립공원 내에 위치, 전세버스가 함부로 못 들어온다고 한다. 나중에 관리소측에 어떻게 애걸복걸했는지 전세버스가 마을로 들어왔다. 큰 대형버스가 들어오기 길이 너무 협소해서 확 꺽인 다리를 지나갈 때는 차 앞 안내까지 받아야 했다. 후미팀을 태우고 상주방향으로 나가다 한 식당에 들러 촌 막걸리도 쭉 걸치고 맛난 촌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청국장에 밥, 고소한 배추잎으로 배를 잔뜩 채웠다. 아. 행복해. 다시말해 아, 배불러.
서양의 철학자 칸트 왈, "인간에게 가장 복스런 일이란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이라고 했다. 백두대간 산행 후 식사는 들 두 가지 다 갖추었네. 억쑤로 행복한 것은 물어 본 놈이 바보, 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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