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기러기 아빠'들이 늘고 있다.
자녀교육을 위해 가족을 해외로 내보내고 혼자 사는 아빠들이다.
이들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하소연이다.
21세기, 영어는 종교가 됐고 명문대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매력적인 이념이 됐다.
공교육은 제자리를 잃었다.
엄청난 사교육비에 학부모들의 허리는 힘없이 꺾였다.
그럼에도 미래는 불투명하다.
'내 자식을 영어 잘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살지만 자식만큼은 해외 유학파로 키우고 싶었다', 고난을 자청한 '외기러기 아빠'들의 말은 '성전(聖戰)'에 나선 용사의 고백처럼 들린다.
'지옥 같은 이 땅의 교육현실에서 우리 아이를 구해내고 싶었다'. 자신 역시 입시학원 강사인 한 '외기러기 아빠'의 고백이다.
◇ 외기러기 아빠 현황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2003년 9월 말 현재 해외 유학생은 16만명. 여기에 최근 급증하고 있는 초.중.고 조기유학생을 합칠 경우 2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자녀교육문제로 어린 자녀와 아내를 국내의 대도시로 이사시키고 농촌에 혼자남아 농사짓는 아버지들도 있다.
◇ 황폐해진 생활
'외기러기 아빠'들의 고통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다.
가족관계가 소원해지기 일쑤고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경우도 생겨났다.
또 교육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많다.
중소기업인 성모(대구시 서구)씨는 한동안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재작년 중1.2학년이던 남매를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보낸 후였다.
"처음엔 좋았다.
아내의 바가지 안 들어 좋고,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없으니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조금씩 망가졌다.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됐다.
별 일도 아닌데 화도 자주 냈다". 성씨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여섯 달 이상 받았다고 말한다.
성형외과 의사 이모(대구시 중구)씨는 좀 다른 고민을 안고 있다.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느낌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싶다.
가족들과 좀 소원한 편이었는데, 캐나다로 떠난 후 더 서먹서먹해진 것 같다.
나는 힘든데 가족들은 현지에 너무 잘 적응하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울해지는 때도 많다".
외기러기 아빠들 중에는 가벼운 신경성 질환을 넘어 생활고와 정신적 황폐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안경제조업체를 경영하는 양모(대구시 북구)씨는 송금에 허덕이느라 몇 달째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했다.
회사를 떠나는 직원들이 생겨나고 회사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지난 해 가족을 모두 불러들이고 말았다.
고생하고 돈 쓰고 배운 건 없었다고 자평한다.
몸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우고 저녁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기 일쑤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니 육체적으로도 허약해지기 십상이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이라 심장병, 고혈압, 당뇨병 등 각종 질환에 쉽게 노출된다.
지난해 10월 말, 두 딸과 아내를 캐나다로 보내고 혼자 살던 한 40대 가장은 자신의 집 소파에 기댄 채 숨진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는 심근경색을 앓고 있었다.
자녀의 유학문제를 알아보기 전에 '부부 상담소'나 '가족문제 상담소'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박병탁씨는 "외기러기 아빠들 중에는 자녀교육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면서 "이는 일종의 도피행위이며 떨어져 살 경우 가족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충고한다.
박 원장은 또 "남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며 "자녀에게 쏟는 정성의 반이라도 남편에게 쏟아야 한다"고 아내들에게 조언한다.
◇내일을 향해 쏴라
모든 외기러기아빠들이 생활의 리듬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아니다.
호젓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따로 떨어진 후 가족 사랑이 더욱 돈독해졌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늘어난 자신의 시간을 알차게 쓴다.
새벽부터 영어학원에 다니는 등 자기계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수영·마라톤 등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많다.
드물지만 처가나 본가에 들어가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마주 보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던 자녀와 e메일을 통해 다정다감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땐 버럭 화를 낼 일도 메일로 쓰니 한결 부드럽다.
부부관계 역시 더 애틋해진다.
혼자 남아 힘들게 돈 벌어 보내는 남편에 대한 연민, 객지에서 아이들 돌보느라 애쓰는 아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2002년 중학생 아들을 캐나다로 보낸 손인락(대구시 달서구)씨는 자신의 결정에 매우 만족해하는 경우다.
손씨는 자녀의 뒷바라지를 위해 아내를 외국에 보내는 대신 현지 가디언(현지보호자 겸 생활지도교사)을 붙였다.
가디언 고용비용은 월 70만, 80만원 안팎.
"아내와 떨어져 살지 않으니 '외기러기 아빠'들 처럼 생활이 엉망이 될 염려는 없다.
유학전 충분히 상담하고 살피면 자녀를 믿고 맡길 하숙집과 가디언을 찾을 수 있다.
가디언들이 1주일에 2, 3차례 자녀의 소식을 e메일로 꼼꼼히 전해준다"는 손씨는 그러나 "2, 3개월에 한번은 부모가 현지를 방문해야 한다.
가디언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자녀의 학교생활, 성적, 교우관계, 집에서의 생활 등을 직접 점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손씨는 초교 3학년인 둘째아이도 5학년이 되면 해외로 보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자녀를 해외유학 보낼 때는 요모조모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한국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우리나라 교육현실에도 문제가 많지만 외국에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더 많을 수 있다"며 외기러기 아빠를 강행하기 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이왕 외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면 생활규칙을 정해 제때 식사하기, 과음하지 말기, 메일과 전화로 소식전하기, 가능한 한 자주 만나기 등을 통해 '가족'이란 끈을 팽팽하게 당기고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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