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평론가 이덕일 역사속의 개혁-(3)조선중기 386 조광조

조선 중기의 386,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인가?

*젊은 명망가 조광조

김옥균.박영효 등의 개화당이 조선말의 386이었다면 조광조.김식 등의 사림파는 조선 중기의 386이었다.

김옥균의 극복대상이 친청수구파였다면 조광조의 극복대상은 공신집단으로 구성된 훈구파였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서른 살 때인 중종 10년(1515)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가 되었을 때 사관이 "(조광조가) 장성해서는 성리학에 잠심해 자기의 말을 실행하고 행동은 예법을 준수하니, 한때의 유사(儒士)들이 애모하여 따라서 교유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중종실록" 10년 6월 8일)"라고 기록할 정도로 호평받았다.

그러나 그는 천거에 만족하지 않고 그해 8월 문과 전시(殿試)에 응시해 합격했다.

*개혁파의 기수로

그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처음 정계에 얼굴을 내밀었을 무렵 조정의 현안은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의 공동상소였다.

중종이 내외의 의견을 널리 듣겠다며 구언(求言)하자 둘은 상소를 올려 새왕비를 간택하지 말고 중종반정 직후 폐출된 중종의 첫부인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라고 주장해 큰 파란을 일으켰다.

중종의 첫부인의 부친 신수근(愼守瑾)은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는데 중종을 추대하자는 박원종(朴元宗)의 제의를 거절했다가 반정 도중에 살해되었다.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중종의 부인 신씨도 쫓아낸 후 장경왕후 윤씨를 왕비로 삼았는데, 그녀가 사망하자 박상 등은 새로 왕비를 간택하지 말고 억울하게 쫓겨난 신씨를 왕비로 모시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 상소에 정국공신들은 분개했다.

신씨가 복위되면 자신들은 죄없는 왕비를 내쫓은 패륜집단이 되기 때문이다.

정국공신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박상.김정의 처벌을 요구했고, 조광조가 몸담은 사간원과 사헌부도 이에 가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는 '재상(宰相)이 이들을 벌하려해도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은 마땅히 이들을 변호해야 하는데 도리어 탄핵에 가세했다'며 대간의 전원교체를 요구했다.

이로써 파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결국 신씨의 왕비 복귀는 실패했지만 대간 전원도 교체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단번에 개혁의 기수로 떠올랐고, 정국은 본격적인 개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조광조와 중종의 결탁

조광조의 화려한 등장 배경에는 중종의 연출이 있었다.

중종은 비록 왕이지만 억울하게 쫓겨난 부인 신씨가 인왕산에 중종을 그리워하며 치마를 내건다고 해서 치마바위 전설이 생길 정도로 힘없는 임금이었다.

정국은 박원종.유순정.성희안의 이른바 반정 3대장으로 대표되는 정국(靖國)공신들이 주도했다.

그런데 중종 8년까지 이들 3대장이 모두 사망하자 중종은 그 공백을 사림파로 메꾸어 공신들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목적은 왕권강화가 아니라 지치정치(至治政治), 즉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에 있었는데, 양자의 이런 차이가 나중 큰 비극을 낳았다.

조광조는 성리학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궐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악(雅樂) 연주자를 여악(女樂)에서 남악(男樂)으로 대치하고, 불교적 성격의 기신재(忌晨齋)와 도교적 성격의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사림파는 또 훈구파의 토지독점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자 50결 이상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限田法)과 노비 숫자의 제한을 주장했다.

훈구파의 경제침탈로 신음하던 백성들이 조광조에게 환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평하게 행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해서 그가 거리에 나갈 때면 매양 사람들이 그가 탄 말 앞에 늘어서서 '우리 상전 오셨다'라고 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조광조의 인기는 치솟았다.

조광조는 정몽주와 스승 김굉필을 성균관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함으로써 사림파의 개혁이념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려 했다.

그러나 훈구파에서 "그 뜻은 김굉필을 종사하게 하고 그것을 빙자하여 당(黨)을 세우자는 데 있었지, 처음부터 정몽주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다("중종실록" 12년 8월 7일)"라고 간파해 정몽주만 종사되고 김굉필은 제외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조광조는 그 실패가 사림파의 조정 내 세력의 열세 때문으로 보고 중종 13년 '초야에 묻힌 유일지사(遺逸之士)'의 발굴을 명분으로 현량과(賢良科) 실시를 주장했다.

현량과란 추천에 의한 관료 선발제도인데 120명의 추천자 중 면접을 통해 28명을 급제시킴으로써 사림파는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 '위훈삭제'

그러나 조광조와 사림파는 개혁조급증을 드러냄으로써 모험을 자초했다.

정국공신들을 직접 제거하기 위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한 것이다.

정국공신은 당초 101명에서 117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뇌물이 오고갔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공신수의 확대는 단순한 뇌물의 결과만이 아니라 공신세력의 기반확충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그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중종 14년 대사헌 조광조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위훈삭제를 주장하는 계청을 올렸다.

"연산군 시절 유순(柳洵)은 나이도 많고 지위도 매우 높았지만 단 한번도 올바른 간쟁을 하지 않고 그저 비굴하게 비위만 맞추었는데도 반정이 일어나자 정국공신이 되었습니다.

김감(金勘).구영수(具永壽) 등은 연산군에 아첨하여 개나 돼지처럼 행동했습니다('양사의 정국공신 개정 계청(啓請), "정암선생문집")"

말 자체는 옳았지만 중종을 즉위시킨 세력은 사림파가 아니라 정국공신들이라는 점에서 이는 선을 넘은 것이었다.

사림파는 주저하는 중종을 압박해 117명의 정국공신 중 65%에 달하는 76명의 녹훈(錄勳)을 삭제함으로써 정계 등장 후 가장 큰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났던 것처럼 위훈삭제는 '나흘천하'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종과 공신들의 결탁

대궐의 나뭇잎에 감즙(甘汁)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조씨가 왕이 된다)'이라고 쓸 정도로 조광조 제거를 위해 절치부심하던 훈구파는 위훈삭제 직후 드디어 중종과 연합하는데 성공했다.

중종이 훈구파 홍경주에게 내린 밀지에서 "정국공신은 다 나를 도와서 추대한 공이 있는데, 지금 4등을 공이 없다 하여 삭제하기를 청하니…(나중에는) 연산(燕山)을 마음대로 폐출한 죄로 논한다면, 경(卿) 등이 어육(魚肉)이 되고 다음에 나에게 미칠 것이다"("중종실록" 15년 4월 13일)라고 말한 것은 위훈삭제에 대한 그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중종의 특명으로 전격적으로 체포된 조광조는 국문에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이라고 호소했으나 그 '임금의 마음'은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김정, 김식 등 동지들도 목숨을 잃었으며 김구.이자 등은 귀양갔다.

그와 동시에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소격서는 부활되었으며, 위훈삭제된 공신들은 다시 복훈 되었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대간 전원을 교체시키며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한 지 4년만에 처절한 배신과 실패로 끝난 개혁몽(改革夢)이었다.

이런 조광조의 개혁에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은 서로 엇갈리게 평가했다.

"조문정(趙文正:조광조의 시호)은 현철한 자질과 경세제민의 재질을 가지고서 학문이 채 대성되기도 전에 갑작스레 요로(要路)에 올라…참소하는 입이 벌써 열려, 몸은 죽고 나라는 어지러워지게 되어 도리어 뒷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징계삼아 감히 일을 해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이,"석담일기")"

그러나 퇴계의 평가는 달랐다.

"그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알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나라 정치의 근본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때 사림들이 화를 입은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선생(조광조)이 도(道)를 드높이고 학문의 뜻을 확립한 공로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정암선생 문집" 행장)"

학문이 대성되기도 전에 정치에 나와 자신도 죽고 나라도 어지러워졌다는 이이의 평가나 현세에는 실패했으나 후세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황의 평가는 모두 일리가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개혁주의자들은 율곡말대로 수신(修身) 이전에 잘못 세상에 나온 아마추어들일까 아니면 현세에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후세에는 평가를 받을 시대의 선구자들일까? 실제 조광조가 뿌린 개혁의 씨앗은 명종 말엽~선조 초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는 것으로 현실화되었고, 조광조 역시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 배경에는 조광조 사망 다음해의 아래 기록이 말해준다.

'조광조 등이 일을 행할 때 탄핵과 논박을 크게 하여 조정의 재상들이 주현(州縣)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들도 역시 각기 스스로를 삼가니 백성들 사이에 침어(侵魚)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또한 뇌물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류(士類)가 화를 입음에 이르러 염절(廉節)이 따라서 무너지니 조정은 재물에 때가 끼고 군현도 그 바람을 타서 이를 데가 없게 되었다.

("중종실록", 15년 10월)'우리 사회의 개혁세력은 과연 국민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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