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대가야-(32)깊숙이 파고든 서쪽 세력권

2003년 말, 대가야의 역사를 새로 써야할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묻혀진 대가야의 궤적이 무덤 속에서 하나 둘 드러나면서 어쩌면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건은 전북 순창에서 발생했다.

전북대박물관이 문화유적 분포지도를 만들기 위해 산 능선의 무덤 흔적을 찾다가 우연히 파헤쳐진 깔개(바닥) 돌을 발견한 것이다.

무덤 언저리에서 항아리와 접시 뚜껑이 나타났고, 그것은 바로 약 1천500년 전 대가야의 무덤이자, 유물이었던 것. 호남 내륙 깊숙한 곳, 백제의 세력권으로만 알려졌던 순창지역에서 대가야의 자취가 드러난 것이다.

대가야 세력권을 새로 규정해야 할 '역사적' 발견인 셈이다.

동으로는 섬진강을 경계로 남원시, 서로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의 주능선을 경계로 정읍시, 북으로는 임실군, 서남으로는 전남 장성 담양 곡성군과 접하는 곳에 위치한 전북 순창군. 군의 동쪽 경계지역에는 섬진강(蟾津江)의 지류인 오수천(獒樹川)이 현포리 마을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꽁꽁 얼어붙은 하천은 강물이 되기 위해 소리없이 남으로 남으로 흘렀다.

장수군에서 발원해 임실군 오수면을 관통한 이 하천은 역시 임실군을 거쳐 남으로 내려온 적성강(赤城江)과 순창군 적성면에서 한 몸으로 어우러져 섬진강이 된다.

호남 중부내륙 깊숙한 이 곳에서 가야, 그것도 대가야의 유물이 나올 줄이야….

전북의 최남단 중부지역에 위치한 순창군의 북동쪽 접경지, 동계면 현포리. 동계면을 둘로 갈라놓은 오수천 줄기의 서쪽, 현포리 '연산마을'은 55가구가 구릉 밑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자그마한 동네다.

연산마을 회관을 끼고 야트막한 산 구릉을 5분쯤 오르자 폐교된 동계중학교의 동남쪽 6부 능선에 무덤의 바닥 돌이 서너 군데 드러나 보였다.

이 동네 류철수(65) 이장은 "지난해 초 밤나무 수종 개량을 위해 굴삭기로 정지작업을 벌이면서 무덤 속에 깔렸던 것으로 보이는 돌이 많이 파헤쳐졌다"고 말했다.

이 유적지는 지난 2002년 8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순창문화유적분포지도' 작성을 위해 지표조사를 벌이던 전북대박물관에 의해 발견됐다.

연산마을 회관 바로 뒤편 염소사육장에서 동계중학교 동남쪽 능선까지 약 100m 구간에 옹관묘 1기와 돌널무덤(石槨墓) 6, 7기가 드러난 것이다.

동남쪽으로 오수천이 흐르고, 주변 동계분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 구릉에 안착, 가야시대 고분의 입지조건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지표조사만 벌였는데도 허물어진 무덤의 바닥 돌 주변에서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 2점, 뚜껑접시(蓋杯)의 덮개 1점을 비롯해 수십 점의 토기 조각들이 나왔다.

젖꼭지(乳頭) 모양의 뚜껑접시 손잡이 둘레에는 대가야 양식의 전형인 물결무늬(波狀紋)가 두 겹으로 둘러져 있었다.

항아리와 덮개가 발견된 곳에서 약 10m 아래에서는 백제계 유물로 보이는 옹관 2개가 아가리를 마주댄 채 발견됐다.

1천500년 전, 백제가 호령하던 전남 광주와 담양 지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순창에서 가야계 유적이 처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원형이 제대로 보존된 채 발견된 토기 3점은 바로 대가야 양식이었다.

대가야 고분군의 하나로 새로 등재될 '연산 고분군'이다.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김승옥(전북대박물관 고고부장) 교수는 "순창에서는 가야계 무덤이 발굴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 지역 고대사를 밝혀줄 귀중한 학술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 밝혀진 대가야 세력권은 경북 고령을 비롯해 경남 서남부 대다수 지역과 전북 남원 장수 진안, 전남 여수지역 등이다.

이번에 순창에서 대가야 유적.유물이 발견됨으로써 대가야 전성기, 백제와의 서쪽 접경지역은 새롭게 순창을 꼽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대가야의 서쪽 세력권은 장수, 진안을 넘어 섬진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전 수계를 포괄한 셈이다.

물론 섬진강 수계인 전북 임실군 관촌면 오수면, 순창군 동계면 적성면 유등면, 전남 곡성군, 구례군 일대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는 이 같은 사실을 더욱 확고히 뒷받침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순창 지역에는 이번 지표조사 이전에 대가야 세력권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요인이 또 있었다.

'연산 고분군'에 인접한 동계면 관전리 동계중.고등학교 1층 '호송 유물자료실'에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종 유물 수십 점이 전시돼 있다.

폐교(1988년)된 동계중학교에서 지난해 옮겨온 것들이다.

이 학교가 폐교되기 이전인 70년대 초반, 동계중학교는 학생들을 상대로 동계면 일대에서 주워 집에 보관하고 있던 유물을 수집했다.

동계면 일대에는 고분이 많아 주민들마다 토기, 철기 등 유물을 한 두 점씩 보유하고 있었고, 교사들은 교과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이 유물을 모았던 것. 이 중 '고려시대' 또는 '삼국시대' 유물로 표기해 놓은 목긴 항아리와 목짧은 항아리 각 1점은 바로 대가야 양식 토기로 최근 밝혀졌다.

그 역사의 뿌리는 제때 밝혀지지 않았지만 30여년 동안 훼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동계중.고 채규상 교사는 "유물자료실에 있는 대다수 토기는 동계면 현포리 연산마을과 마상동, 관전리 등지에서 주민들이 모으거나 학교에서 수집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계중 교사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한 양연직(68)씨는 "순창군 동계면과 적성면 일대에는 고대 무덤이 산재해 있고, 주민들이 벌목이나 논밭 경작 때 나온 유물 일부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장수에서 발원한 섬진강 줄기를 타고 순창으로 향하는데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지역은 전북 임실이다.

임실군의 중앙에 위치하는 관촌면 금성리 '화성마을' 바로 앞에는 동~서로 뻗은 산 구릉 위에 '금성리 고분군'이 있다.

대가야가 400년대 후반 진출한 남원의 서부지역과 지형적 장애요인이 전혀 없이 인접한 곳이다.

지난 1972년 전북도립박물관이 지표조사를 벌인 3기의 무덤은 주인널(主槨)과 부장품널(副槨)을 갖췄고, 대가야 양식의 뚜껑있는 목긴 항아리 1점 등 토기 수 점과 도끼, 창, 칼 등 철기가 나왔다.

물결무늬가 세 겹으로 둘러싼 이 목긴 항아리는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400년대 후반과 500년대 전반, 대가야는 이렇게 백두대간을 넘어 남원 장수 진안까지, 다시 장수에서 섬진강을 타고 임실 순창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파악됐다.

강줄기를 따라 곡성 구례 하동을 통해 남쪽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저 멀리 왜(倭)와 중국을 바라보며….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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