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생마저 '임대'할 순 없죠"

지난 12일 오후 4시쯤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용지아파트내 범물복지관 지하 식당.

'지글지글' 식빵이 굽히는 소리, 고소한 버터냄새가 가득하다.

오늘은 '주스&토스트' 취업 강좌가 열리는 날. "임대아파트에 산다고 실패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 살 자신이 있어요".

주부 김상남(33)씨는 아파트 앞 버스토큰 가게의 아르바이트도 이 강좌를 통해 소개받았다.

"이 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것도 빈말은 아니다.

저마다 토스트와 주스 맛을 품평하는 동안 지하식당의 체온이 조금 올라간다.

범물동 1238번지 용지아파트. 지난 1991년 2천600여가구가 보금자리를 튼 이 곳은 '가난에 전 영구임대아파트'의 대표격으로 불리던 곳. 주민중 60%가 정부 보조를 받고 있으며 5집 가운데 1집은 수입이 월 50만원 이하다.

그러나 용지아파트는 더 이상 예전의 '난곡'이 아니었다.

지난 2002년 9월 들어선 복지관 부설 범물지역사회발전센터가 '아름다운 용지마을 공동체 만들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입주민의 절반이 10년 이상 장기 거주자지만 자립할 방법을 모르니 의욕도 생기지 않았겠죠". 이 센터 정명희 실장은 주민들의 의식 바꾸기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8년 만에 반상회가 '용지사랑모임'으로 부활했고 삭막한 아파트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인사 잘하기' 운동도 벌였다.

이웃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임차인 대표 강병래(68)씨는 "그 전엔 옆 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몰랐다"고 했다.

또 지난해 6월엔 2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아파트내 홀몸노인, 장애인 이웃을 돕기 위한 '이웃사촌봉사단'이 생겼고 작년 여름 아파트에서 연 영화축제 때는 이웃동네 사람들까지 놀러왔다.

주민들이 명예기자로 활동하는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용지마을 신문도 발행한다.

여고생이 4컷 만화를 그리고, 주민들 스스로 글도 투고한다.

"우리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파트가 밝아졌어요". 무료한 일거리로 소일하던 김계현(61.여)씨는 이웃사촌봉사단장을 맡은 후부터 부쩍 웃음이 많아졌다.

특히 지역개발센터가 지난해 말 개강한 창업강좌는 이 곳에 희망을 가져왔다.

주스&토스트 강좌에 앞서 열린 베이비시터 강좌에도 주부들이 몰렸으며 이번 음식 강좌가 끝나면 '가정관리사' 강좌가 시작될 예정이다.

지금 용지아파트엔 사람사는 향기가 묻어나고 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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