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만인석

강릉에 있는 선교장(船橋莊)은 300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고건축 전문가들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는다.

장(莊)으로 이름 붙은 몇몇 건물들 중 실질적으로 장원의 규모를 가진 것은 이곳뿐이다.

대지 3만평에 민간가옥의 한계인 99칸을 넘어 총 120여 칸 규모로 지어졌다.

선교장의 첫 주인은 18세기 초엽의 이내번이다.

이후 9대 종손이 이곳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서울 동대문에서 강릉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의 만석꾼 집안이다.

▲선교장은 재미있는 선비대접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과객들이 유숙을 청하면 학문과 사람 됨됨이를 시험해서 3가지 등급을 매겼다.

고명한 선비로 판정되면 고급사랑채, 학문과 식견이 있는 사람은 중사랑채, 평범한 과객은 행랑채에 거처를 마련했다.

손님이 체면 없이 오래 유숙하면 반찬 그릇을 바꾸어놓는 것으로 '송별'의 의사를 표시했다.

옛 반가의 밥상은 간장, 초장, 깎두기, 찌개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이 자리를 바꾸어 떠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선교장은 전라도 민요에도 등장한다.

가을에 참새들이 곡식을 쪼아먹으면 "배다리 통천집으로 가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현 종부의 고조부가 통천군수를 지낼 때 극심한 흉년이 들자 창고에 있던 쌀을 수천 석이나 풀어 군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선행이 민요로 옮아간 것이다.

선교장은 소작인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집안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적선에 무척 관심을 쏟았다.

소작인들은 만인산(萬人傘)이라는 옥양목 우산을 만들어 그 고마움에 답례했다.

1만 명이 일일이 서명을 해 만든 우산이라는 뜻이다.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 한국인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다.

나들이 온 한국인들이 공연한 우월감으로 현지인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일들이 잦아 생긴 현상이다.

상당기간 누적된 감정이어서 폭발의 잠재성을 안고 있다.

실제로 태국의 한 혐한단체는 한국대사관과 한국 항공사에 테러를 가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 필리핀에서는 프로 골퍼가 칼에 찔려 피살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우리가 세계 12위권의 경제대국이 된지도 오래다.

그러나 경제력에 걸맞은 문화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국민의 문화적 토양인 정치권이 특히 그렇다.

대통령의 험한 언사나 정치권의 이전투구는 사람들을 황폐로 몰아갈 뿐이다.

다양성을 잃은 사회구조도 고급문화의 생성을 어렵게 하고 있다.

돈을 부릴만한 문화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일단이 동남아에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만석꾼에게는 만석꾼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동남아 각 국의 만인산은 받지 못하더라도 만인석(萬人石)을 받아서야 되겠는가.박진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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