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고갱이-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는 구리와 아연, 또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 금속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이다.

그러나 기원 1, 2세기까지도 청동기는 사용되었다.

농경이 주된 생업이었다.

구릉과 충적지를 중심으로 대규모 취락을 형성해 정착 생활을 했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의기(儀器)로 사용되었고 석기와 목기, 뼈 도구가 주 생활용구로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무문토기(無文土器)이다.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櫛文土器)와 달리 무늬가 없거나 무늬가 있더라도 단순한 것이 특색이다.

한반도의 무문토기는 일반적으로 한강 이남지역(남한群), 서북부지역(압록강群), 서부지역(대동강群), 동북지역(두만강群)등 4개 지역군으로 나눈다.

이 시대의 무덤은 고인돌(支石墓), 석관묘(石棺墓), 석개토광묘(石蓋土壙墓), 옹관묘가 있다.

이 중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데,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으로 구분된다.

고인돌은 주로 하천변을 따라 열을 지어 분포하거나 평지에 무리를 지어 있다.

일부는 낮은 구릉 위에 단독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도 일부 벼의 흔적이 확인되지만 청동기 시대에 본격적으로 재배됐다.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 주거지에서 탄화미가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울산 검단리 유적의 토기에서도 볍씨가 박힌 흔적이 있어 기원전 6세기 이전에 이미 본격적으로 벼 재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벼농사는 중국의 화남 지방에서 대륙을 거쳐 들어왔다고 하는 북방설이 지배적이다.

일부는 해로를 타고 남부지역에 직접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벼농사 기술은 일본으로 전래되어 일본의 야요이문화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동기 보급 전쟁 확산

빈부격차.계급 발생

최근 돌보다 센 청동이 보급되면서 농사짓기 좋은 땅을 두고 싸움이 격해지고 있다.

선진부족들은 구리를 주원료로 주석과 아연 등을 섞어 청동검과 청동창, 청동 화살촉 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무기로 무장한 이들 부족은 아직 돌칼과 돌창에 의존하고 있는 이웃 부족의 농작물과 가축을 약탈하고 주민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전쟁에 승리한 족장과 부족민들의 지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청동 무기를 만드는 자와 싸움을 잘하는 힘센 자들은 차츰 농사일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제까지 이웃이던 사람들 사이에 주인과 노예가 생기고, 지배 부족 가운데서도 계급이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생기는 등 인류 역사 50만년만에 처음 사람 사이에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또 전쟁에서 승리한 족장들은 다양한 무기와 함께 청동거울, 방울 등과 같은 제사 도구를 만들어 하늘에 감사하는 등 지배체제를 다지고 있다.

한편 남만주와 요동 일대에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환웅부족이 곰부족과 통합해 새 국가를 건설했다.

부족단위를 넘어 고조선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진 정치구조와 농사기술을 보유한 고조선의 등장으로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일대 세력판도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고조선의 통치자는 '단군왕검'으로 제사장의 역할과 정치적 지배자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막강한 권력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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