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정 딱한 피고인에 생필품 건넨 판사 화제

'죄는 밉지만 인간은 미워할 수 없었다'.

판사가 자신에게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의 집을 이례적으로 방문, 온정의 손길을 베푼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대구지법 형사2단독 황윤구(43.현 여주지원 판사)판사는 지난해 12월 공중전화기를 23차례나 부수고 53만여원을 훔친 혐의로 구속된 김모(37) 피고인의 재판을 맡게 됐다.

김 피고인의 기록에는 몇년 전부터 앓아온 갑상선 기능 이상으로 몸이 크게 마르고 안구가 튀어나오는 등 몸이 아프고, 이때문에 일하던 섬유공장에서 1년여 전에 쫓겨나다시피 퇴직했으며, 쌀을 사기 힘들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되어 있었다.

황 판사는 선고를 3일 앞둔 지난 1월4일 오후에 법원 직원과 함께 김피고인의 가족이 사는 영구임대아파트(대구 달서구 월성동)를 찾았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피고인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

피고인의 사정은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있고 남동생은 손가락이 잘려 아무 일도 못하는 형편. 게다가 집안에서 유일하게 수입이 있던 여동생은 6세된 조카만 남긴 채 몇달 전 가출했다.

가족의 생계 수단이 끊긴 김 피고인은 집안의 가전제품을 하나씩 팔아 생활해오다 더이상 팔 것이 남아있지 않자 범죄의 길로 나서게 됐다는 것.

황 판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쌀과 라면, 계란 등을 가족에게 전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있은 김 피고인의 선고공판에서 "범행동기는 참작할 수 있으나 반성의 기미가 없고 사회적 위험성이 높다"며 실형 6월을 선고했다.

김 피고인은 이미 지난해 9월 동생과 함께 승용차를 훔치려 한 죄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어 그대로 풀어주기 어려웠다는 것.

황 판사는 "마치 '현대판 장발장'을 보는 듯했다"면서 "김 피고인이 1년여 후에 출감하면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여주지원으로 자리를 옮긴 황 판사는 86년 사시28회에 합격한 후 10년간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다 지난 2000년 대구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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