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행동할 때보다 말할 때 더 대담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데모크리투스의 지적대로, 말은 실행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대개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고, 그 의사에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의지의 일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말을 펼쳐 놓으면 무늬가 나타난다고 하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일 터이다
따라서 표현의 수단이자 방식인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품격을 판단하는 일차적 기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말은 수사적으로 과장되거나 상황의 논리에 좌우되기 쉬운 것이기에, 그 사람의 의지나 능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말로써 특정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말에만 매달려 특정인을 평가하려는 것은 곤란하다.
다시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화제가 됐다.
3.1절 85주년 기념사에서 일본에 대한 충고를 했다.
혹 지각없는 사람들이 하는 경우는 몰라도, 적어도 국가 지도자 수준에서 우리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번의 말은 모든 신문이 1면 머리 기사로 다루었을 정도이니, 우리 국가 내적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게다가 일본 총리와 정계도 신중하게 반응하는 눈치로 보아 국제적 파장까지 예상된다.
우리 국민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란, 독도의 주권 주장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공언 등이다.
그리고 '국가 지도자 수준'이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우회적으로 지명한 표현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기념사에 끼워 넣은 한마디는 한국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정면 비판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번 노 대통령의 말에 대한 우리 언론과 여론의 반응을 보면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대부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상대가 일본이고 때가 3.1절이었던 만큼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종 노 대통령을 곱지 않게 봐 왔던 언론도 기껏 '미묘한 파문이 예상된다'라고만 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엄밀히 따지면 이례적이다.
지난 일년 동안의 반응과 비교해 보면 그렇다는 의미다.
참여정부의 일년 동안 야당과 중앙의 보수 언론과 반노무현 성향의 여론은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혹독한 비판의 주된 빌미는 노 대통령의 말이었다.
특정 신문사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언론 탄압으로까지 비쳐졌다.
공산당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전제로 하면 당연한 과제임에도 색깔론으로 몰아쳤다.
오히려 그 정도는 다행이었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에서는 절정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농적 표현일 수 있는 그 말을 신문의 1면 톱에 올렸을 때, 대통령이 너무한 것인지 언론이 지나친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대통령은 말을 자제했다.
각종 연설문의 원고도 직접 손대지 않기로 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아마도 자신의 말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기보다는 예상 밖의 심한 비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3.1절 기념사도 따지고 보면 과거 문제됐던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엄숙주의와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국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보수외교주의자들은 일본 총리에 대한 결례가 어느 정도인지 걱정스러울지 모른다.
그날 아침에 기념사 원고를 고치자고 한 대통령을 두고 나쁜 버릇이 금세 다시 나왔다고 탓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엔 대통령의 파격적 한마디에 별다른 비난이 없다.
오히려 야당에선 고이즈미 총리를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거나, 총선용 인기 몰이라는 식의 엉뚱한 비판만 한다.
이것은 노 대통령의 말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변화일까, 아니면 특수 상황에 대한 일회적 이해에 불과한 것일까.
여기서 이제 대통령의 말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좀 정돈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의 표현이 일반적으로 과거 다른 대통령들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방식을 택하는 것은 근대적이고 수평적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탈권위주의의 소신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정치인들은 수사학적 표현을 위기를 넘기기 위한 수단으로 곧잘 사용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동안 자기 특유의 수사학으로 위기를 자초해 왔다.
말로 인한 노 대통령의 위기가 정작 실질적인 것인지 형식적인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대통령의 말꼬리만 물고 늘어지는 정치는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차병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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