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소년 '한스'와 오점록 사장

저녁 어둑할 무렵, 한 소년이 길을 가다 둑의 갈라진 틈에서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한다.

국토의 25%가 해수면 보다 낮은 조국 네덜란드, 둑이 터질 경우 온 나라가 바닷물에 잠겨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단단히 교육받아 온 소년이었다.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팔뚝을 틈새에 밀어 넣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그렇게 밤을 지샌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한스 브링크'.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다.

▲국가적 재난을 몸으로 막은 애국심의 극치를 우리는 어릴 적 이렇게 배웠다.

그런데 요즘 교과서에서 한스 얘기는 없어졌다.

사실이 아님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들어진' 소설 같은 얘기지만 소년의 몸에 밴 '위기관리' 정신과 '문제 해결능력'은 잊혀지지 않는다.

지난해 대구 지하철 참사 때 한스 소년이 생각났는데 이번 중부 지역 폭설에서는 아예 한스 소년이 이를 비웃고 있는 것 같다.

"재해 관리는 평소 준비된 자의 몫이야"라며.

▲정부는 4일 오후 서울과 경기지방 폭설에 이어 5일엔 중부지방에 폭설이 내려 큰 피해가 났는데도 눈이 거의 그친 뒤인 6일 오전에야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러니 국가 기간도로망인 경부.중부고속도로가 마비돼 승객들이 도로에서 추위와 허기로 37시간을 버텨야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총체적인 재해재난 방지시스템 부재의 혹독한 대가를 언제까지 반복해서 치러야할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고건 총리가 부랴부랴 "기술 전문성이 없고 대응방안이 무계획적이며 구태의연하고, 희망적인 관측에만 매달려 결과적으로 긴급 제설대책이 실효성이 없었다"며 총체적 준비 부족을 시인했고 오점록 한국도로공사 사장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정부는 항상 이렇다.

이미 일기 예보에서 폭설이 예측됐는데도 또 '사후 약방문'식 대응을 했다니 지난 태풍 매미 때처럼 관계장관들이 제주에서 골프나 즐긴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국민은 살아있었다.

천안의 대한적십자사 소속 40여명의 봉사대원은 도로에 접근하여 컵라면 1천 여개와 뜨거운 물, 빵.음료수를 허기진 승객들에게 나눠줬다고하니 정부는 재난대책마저 민간에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지하철 참사와는 달리 비록 인명 피해없이 몸고생, 마음고생으로 끝났지만 '늑장 대응'이라는 문제의 본질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도대체 무엇하느라고 대책회의를 그렇게 늦게 열었는지 원인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한스 소년보다 못한 문제해결 능력, 그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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