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경제위기가 아니라 지성의 위기다

1997년 말 우리를 강타했던 경제위기가 그 이듬해 여름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시작한지 10년도 채 되지 못한 러시아에까지 미쳤을 때 상황은 참으로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미국 달러에 대한 러시아 루블의 환율은 5배로 하락했고 러시아가 가진 돈의 80% 이상이 집결된 모스크바 중심지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삶이 다시 자연경제상태로 돌아가는 듯한 현상이 빚어졌다.

많은 전문가들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기 위해 부심했지만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농업사의 세계적 대가인 테오도르 샤닌의 진단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직면한 위기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1년을 돌아보며 문제를 짚어내는데 만족하지 않고 사회주의 체제를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시키는 개혁을 추진한 지난 10년을 한 단원으로 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더 나아가서는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되돌아 보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러시아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위기가 아니라 지성의 위기라는 것이었다

샤닌이 볼 때 러시아는 19세기 초부터 잘 못된 길을 걸어오면서 문제를 축적해 왔으며 그러한 역사적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지난 10년간의 개혁 노력도 문제의 심각성에 버금갈만한 혜안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바로 지난 1년간 옐친 치하의 국정의 표류가 결국 러시아를 세계의 빈국으로 전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러시아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위기가 아니라 지성의 위기라는 것이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제정시대에나 공산주의 시대에나 그 길을 가면 안된다고 경고하며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소리들이 결코 없지 않았다.

문제는 그러한 이성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것을 정책적 대안으로 채택할 만한 지성을 러시아 사회도 집권층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데 있었으며, 그러한 지적 각성이 없는 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경고였다.

"지성의 위기"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보다도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도전과 과제로 볼 때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건만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도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를 비롯한 경제의 부진과 국가경쟁력 유지 문제, 안보 문제, 환경문제, 그 어느것 하나 안심할 만한 것이 없건만 정치는 부패와 부정선거 척결이라는 덫에 걸려 표류하고 있을 뿐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국가적 현안 어느 한가지에 대해서도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진정한 귄위에 대한 존중 등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놓는 모든 불문율들이 깨져 나가고 있다.

저마다 자기의 사적 이익에 조금이라도 저상되는 일이라 싶으면 그것이 공동체 전체의 안녕이나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에 상관없이 작당을 하여 폭력으로 싸우려 덤비는가 하면 어린이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도 말리거나 나무라지 않고 외면해 버린다.

북한과 화해와 통일을 이룬다고 하면서 북한의 정치나 사회에 대한 진정한 정보와 지식을 얻는데는 일본, 미국, 중국 등 어느 나라보다도 무관심한 것이 우리다.

민족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의 인권문제는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것이 우리 정부와 사회의 공통점이다.

어린 학생들이 한국전쟁을 시작한 것이 미국이고 우리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세력이 미국이라고 배우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북한은 이제 위협이 될 수 없다고 믿는 모양이니 지성의 위기가 더 이상 심각해 질 수가 있을까 싶다.

대통령을 배출했던 민주당이 두 개의 세력으로 분해되어 대통령 탄핵까지 이야기하며 처절한 싸움을 벌리는 것을 보면서 50년간 역사의 길을 달리했던 남북간의 화합이 그렇게 갈등과 대가 없이 쉽게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인가. 중국이 동북아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제패하는 세력으로 부상할 때 우리가 독자적으로 활보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이라도 더 넓게 지닐 수 있는 동맹구조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는가.

동족간의 화해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에 희망에 기초한 환상이 이성을 압도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설명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지금 국가의, 민족의 전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지성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인호(서울대 명예교수 전 주러시아대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