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악의 3월 폭설-경북 북부 복구현장을 가다

폭설이 퍼부은 지 나흘째. 날씨가 풀리면서 양지쪽에선 쌓인 눈이 녹아내리며 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들녘에는 '눈 폭탄'에 맞아 무너진 비닐하우스가 지천이다.

삶을 포기할 수 없듯이 농사도 포기할 수 없다.

농민들이 땀내음을 풍기는 복구현장을 찾았다.

▨농협 빚도 못 갚았는데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 폭설피해 현장. 철재 파이프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뒹굴고 있었다.

군 장병과 공무원들이 힘을 보태 무너진 비닐하우스 7동을 정리하는 작업은 대충 마무리단계였다.

농민 김명달(53)씨는 "혼자 하려면 몇달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라면서도 "농협 빚도 못 갚은 터에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군인인 작은 아들(22)도 특별휴가를 얻어 집에 와 있었다.

이웃마을에 사는 정창섭(51)씨는 자기 집 창고가 무너지고, 마을 진입도로에 쌓인 눈도 그대로지만 친구 김씨를 돕기 위해 찾아와 이틀째 김씨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날 안동시 서후면사무소 직원 10여명은 하루종일 폭설 피해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비상사태인 만큼 야간근무를 하며 폭설피해 조사대장을 만들고, 복구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광섭 총무계장은 "태풍이나 집중호우 때와 달리 겨울에 피해가 나다보니 자원봉사 문의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피해 농민들은 정부가 폭설피해 농가에 3% 이자의 단기자금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언 발에 오줌 누기'정책이라며 정부를 성토했다.

자금을 받으려면 담보물건이나 보증인이 필요하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판에 담보는 어디 있으며, 누가 보증을 서주겠냐는 것. 버섯재배사가 몽땅 무너지는 피해를 입은 원모(42)씨는 "보증없이 돈을 빌려줘도 부서진 하우스를 다시 짓고 소득을 올리려면 최소한 2,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1년짜리 자금융자는 농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눈이 녹고 날씨가 풀리면 다시 비닐하우스를 세우겠다고 했다.

농협 빚 한 푼 떼먹지 않고 꼬박꼬박 갚아가며 살겠다고도 했다.

다시 정성을 쏟아 거름 만들고, 손톱이 빠질 때까지 오이며 풋고추.감자.수박을 키워내겠다고 했다.

한 농민은 "농부가 땅을 버리고 어딜 가겠느냐"고 했다.

▨조류독감에 한번 죽고, 폭설에 두번 죽고

"조류독감이 한풀 꺾여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이게 뭡니까?" 예천읍 청복리에서 오리농장인 대한축산을 운영하는 구창모(37)씨. 그는 밤새 멀쩡하던 오리사육장이 순식간에 온데간데 없고 눈에 파묻혀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며 당시의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죽으라고 하는구나.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구나. 말하기도 싫고 꼴보기도 싫어 숙직실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었습니다".

그나마 친구들과 가족, 주위 사람들의 위로전화와 직원들의 독려로 간신히 힘을 얻어 구씨가 다시 바깥 출입을 시작한 것은 지난 7일. 행여나 하는 마음에 농장을 둘러봤지만 남은 것은 폐허로 변한 오리사육장과 깔려 죽고 얼어 죽은 오리들뿐이었다.

용케 살아남은 오리들도 자동사료공급기가 부서져 사료와 물을 제대로 먹지못해 죽어나가고 있었다.

직원 6명과 밤새 죽은 오리를 치웠지만 속수무책.

살아있는 오리라도 급히 옮겨야 하지만 마땅한 사육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직원 함동호(38)씨는 "오리 2천마리가 죽은 지 사흘도 안돼 하루 500마리씩 또 죽어나간다"며 "조류독감에 울고 또다시 폭설로 폭삭 망하게 생겼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8일 대한농산 직원들은 응급복구 지원에 나선 공무원들의 도움으로 새 오리장 건축에 사용할 철재 파이프를 나르고 있었다.

대표 구씨는 "조류독감 파동 때 오리팔아주기 행사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은혜에 보답도 못한 터에 다시 군청 직원들의 도움을 받게 됐다"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며 주위의 도움에 감사를 표시했다.

▨자식처럼 키우던 오이는 얼어붙고

"복구작업은 재기할 능력이 있을 때나 가능합니다.

당장 생계가 어려운 농가에겐 복구조차 사치입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오이를 재배하는 문경시 영순면 의곡2리 임영만(48)씨는 지난 98년 고향으로 돌아온 귀농인이다.

축사와 퇴비사 202평과 연동비닐하우스 802평이 폭설로 무너지는 바람에 졸지에 전재산을 날렸다.

지난 1월 전재산 5천여만원과 농협에서 대출받은 5천만원 등 1억원을 투자해 비닐하우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난 1월 파종한 오이가 생육상태도 건강하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볼 때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그러나 눈밭에 내동댕이쳐진 오이처럼 임씨의 꿈도 시들어 버렸다.

"이젠 농협 빚을 갚을 능력도 없고, 다시 농사를 짓고 싶은 의욕도 없습니다.

지난 4일간 눈물로 지새우다보니 이젠 더 흘릴 눈물도 없습니다".

임씨는 "가족들의 생계 해결이 급선무"라며 "작은 정성이라도 좋으니 도와달라"고 울먹였다.

문경.박동식기자 parkds@imaeil.com

안동.장영화기자 yhjang@imaeil.com

예천.마경대기자 kdm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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