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개혁-(11)획기적 세제개혁 '대동법'

*생활개혁의 중요성

많은 국민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개혁피로증을 느끼는 이유는 개혁의 혜택을 실생활에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혁의 소리는 드높은데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는 현실, 일을 하는데도 더 가난해지는 근로빈곤층이 늘어나는 현실은 현재의 개혁에 무언가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실생활의 혜택으로 귀결되지 못한 개혁타령은 권력다툼에 불과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따져도 10년 이상 개혁을 주창해 왔지만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느끼는 것은 우리 실생활과 연결된 생활개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동법은 생활개혁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빈자가 많이 내는 공납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된 후 정확히 100년(숙종 34년:1708년)만에 전국적으로 확대실시된 세법이다.

그만큼 논란이 심했던 법이다.

대동법은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을 대체한 법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나중에는 국가수입의 약 60%를 차지하는 중요한 세원(稅源)이 되었다.

문제는 그 종류가 수천 가지인데다가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뉘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불평등한 부과 기준이었다.

공납은 군현.마을 단위로 부과되어 가호(家戶) 단위로 분배되는데, 각 군현의 백성수와 토지면적은 당연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공안(貢案:공납부과대장)'의 부과액수는 비슷했다.

작은 군현의 백성들이 불리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한 군현.마을 안에서 수백결의 토지를 가진 양반 지주와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전호(佃戶:소작인)가 같은 액수를 부담하거나 가난한 전호들이 더 많이 부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방납업자(防納業者)들까지 농민 착취에 가세했다.

'놓일 방(放)'자가 아니라 '막을 방(防)'자를 쓰는 이유는 공납업자들이 관리들과 짜고 농민들이 납부하는 공물을 퇴짜 놓고 자신들의 공물을 사서 납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의 원조격인 방납업자들은 막대한 폭리를 취했는데, 인조 16년(1638) 충청감사 김육(金堉)은 '공납으로 바칠 꿀 한 말(斗蜜)의 값은 목면(木綿) 3필(匹)이지만 인정(人情)은 4필'이라고 상소했다.

오늘날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인정이 당시에는 방납업자들의 수수료로서 물건값보다 더 비쌌다.

이는 모두 빈농들의 피땀이자 고혈이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대신 지우는 족징(族徵)으로 대응했고,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지우는 인징(隣徵)으로 그 액수를 채웠다.

그 결과 한 마을이 모두 도망가 텅 빈 마을도 적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그 대책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과 반개혁의 기준

공납의 폐해는 한 마을이 텅 빌만큼 심각한 반면 그 해결책은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토지로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많이 내고 땅이 없는 전호는 면제받는 조세정의가 실현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대동법 실시를 주장한 개혁정객들은 여럿 있었으나 실제로 현실화한 인물은 광해군 즉위년 남인 정객 이원익(李元翼)이었다.

그는 경기도에는 공납 대신 토지 1결당 쌀 12말을 걷는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조는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왕의 교지 가운데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어 담당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법 주관 관청의 이름이 '백성들에게 은혜(惠)를 베푸는(宣) 관청(廳)'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인 것은 이 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시결과 대동법은 큰 효과를 보아 인조 원년(1623) 강원도로 확대실시 되었지만 정작 농토가 많은 하삼도(下三道:경상.전라.충청)로 확대되는 것은 어려웠다.

양반 지주들의 반발이 그만큼 심했기 때문이었다.

*대동법의 정치가 김육

이런 상황에서 대동법에 정치생명을 건 개혁정치가가 김육(金堉)이었다.

광해군 때에는 북인 정권에 반대해 경기 가평에서 10여년간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던 김육은 인조반정 이후 벼슬길에 나서 대동법에 정치인생을 바쳤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인조 16년(1638) 9월 "대동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시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라며 충청도에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인조도 찬성했으나 관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김육은 효종 즉위년 11월 배수진을 친 상차를 올렸다.

"왕자(王者)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양호(兩湖:영.호남)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김육은 상차에 '별폭(別幅)'을 첨부해 대동법이 농민들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이익이라고 논증했다.

그러면서 '다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그 색목(色目)이 간단함을 혐의하고 방납업자들이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이점이 염려된다'고 우려했다.

실제 반대론자들은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작미(作米)가 어렵기 때문'에 혹은 '서울과 지방 사람들(京外之人)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등의 갖가지 명분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김육이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는 다만 방납모리배(防納牟利徒) 뿐'이라고 반박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반대일 뿐이었다.

양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친 효종이 확대실시를 주저하자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에게 죄를 주소서"라고 배수진을 쳤다.

*대동법 반대세력들의 공격

그러자 반대 세력들은 김육의 상차가 방자하다며 일제히 공격했다.

효종 초의 조정은 이 문제로 둘로 갈렸고 집권 서인이 분당되기도 했다.

대동법 실시에 찬성하는 김육.신면(申冕) 등 소수파는 한당(漢黨)이 되었고, 실시에 반대하는 이조판서 김집과 이기조(李基祚).정세규(鄭世規).송시열(宋時烈) 등 다수파는 산당(山黨)이 되었다.

김육 등이 한강 이북에 살고, 송시열 등이 연산(連山), 회덕(懷德) 등 산림에 살기 때문에 그런 당명이 붙었던 것이다.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농민의 유망이 심각한 현실은 인정했으나 그 대책으로 제시한 것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들을 철저히 통제하자는 것이었다.

과중한 부담을 견디기 어려워 유망하는 농민들을 통제하자는 것은 지배층이 현안 해결을 위해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법 논쟁은 양반 지주들의 대폭적 양보를 통해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확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려는 정치세력과 양반 지주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정치세력의 대결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비록 반대론자들이 더 많았지만 대동법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어서 효종 2년(1651)에 충청도로 확대 실시된 데 이어, 효종 9년(1658) 전라도 해읍(海邑), 현종 3년(1662) 전라도 산군(山郡) 등으로 계속 확대되다가 숙종 34년(1708년)에 마지막으로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전국적인 세법이 되었다.

대동법을 시행해 본 결과 과거의 공납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산당 영수 송시열도 효종 9년 임금이 "호서(湖西)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니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한가"라고 묻자,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 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이를 말해준다.

대동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현재의 개혁은 과연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은가. 과연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대동법으로 대체해야 할 공납폐가 없는가.

세계 OECD국가 중 우리나라처럼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는 조세정의가 확립되지 않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부동산 투자로 돈벼락을 맞았다는 사람은 많지만 그 이득이 세금으로 환수되었다는 소식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6공 때의 토지공개념과 토지초과이득세에 위헌판결이 내려진 것은 우리 사회에 대동법 반대론자들의 세력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2004년 법원 재산공개 때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와 법원의 1급 이상 일반직 공직자 125명 중 73.6%에 달하는 92명의 재산이 증가한 것은 그런 위헌 판결의 배경을 시사해준다.

좁은 국토에 4천400만명 이상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토지공개념이 위헌이라면 대한민국 헌법은 소수의 땅부자를 위한 헌법이란 말인가. 개혁의 소리는 드높은데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면 이는 가짜 개혁에 다름 아니다.

대동법처럼 서민들의 실생활에 이익이 되는 개혁이 진정한 개혁이고, 그것이 진보일 것이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