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탄핵 대결의 파장

지금 우리는 '때' 아닌 두 가지 사태로 곤경에 처해 있다.

100년 만에 처음이라는 폭설로 인한 피해도,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인 대통령 탄핵 파장도 모두가 피할 수 있었음직도 한데 왜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폭설과 같이 자연 질서의 왜곡에서 온 불행이나, 탄핵발의라는 정치질서의 탈선에서 온 불안이나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긴 마찬가지이나 두 가지 사태 모두가 '때'에 맞지 않게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곤혹스럽다.

자연의 재앙은 눈물과 땀, 그리고 국민의 성원과 국가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치유될 수도 있겠지만 여야간에 맞붙은 탄핵결투는 우리 정치사에 오점과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크게 염려된다.

지난 일년, 우리는 혁신의 기치아래 전개된 화려한 미래에의 약속과 로드맵의 장담 속에 한 때 도취되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된 침체한 경제와 혼란스런 사회상태는 그 푸른 꿈이 실망의 먹구름으로 가려져,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정치 앞에 쌓여진 난제들이 산더미 같은데 그것들을 풀 생각은 아예 접어두고, 신성한 의사당을 결투의 대결장으로만 꾸미고 있으니 그저 한심할 뿐이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국민들을 위해? 아니면 자신을 위해? 탄핵의 실체를 알고 싶다.

탄핵사태의 단초는 노대통령이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이 선거법에 위반 된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청와대가 이에 반동하는 태도를 보인 연후에 탄핵문제가 본격적으로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그러한 결정은 우리 국민의 법상식에 비춰보아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대통령의 특정정당 지지발언이 아무 문제가 안 된다면 80만이 넘는 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해도 이를 제지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는 선거의 공정성인데, 국민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대통령과 공무원들이 선거에 엄정하게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토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의 '선진국에는 그런 선거법이 없다'느니, '선거법 해석과 결정도 달라진 권력문화와 시대흐름에 맞게 이루어져야한다'느니 하는 주장은 우리의 법상식과는 차이가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법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사회변화의 속도가 빠른 데서 나오는 결과이다.

따라서 그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지 청와대의 발상처럼 초법적인 힘을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번에 대통령이 현행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선관위의 위법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 그 재발방지를 약속했더라면 야당의 탄핵명분도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야당이 제기하고 있는 탄핵 사유도 진부하기 짝이 없다.

노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해서 국법질서를 문란케 했고, 권력형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어 법률적.도덕적 기반을 상실했으며, 총선 올인 전략에만 매달려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이 탄핵발의의 명분이다.

모두 크게 틀린 주장은 아니지만 일단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야당으로서는 떳떳한 언명으로 받아들이긴 어렵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관행상 선거법위반사실만 가지고 대통령을 탄핵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과 지금이 탄핵을 제기할 만한 여유가 있는 때인지를 다같이 숙고해 보았더라면 탄핵발의까지는 가지 않았으리라. 안으로는 대선자금 문제로 만신창이가 되어있고, 밖으로는 쓸만한 업적도 남기지 못한 처지에 있는 야당이 악수를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다.

16대 국회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국정파탄과 헌정질서혼란 책임의 빌미를 왜 제공하려 하는지 이해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의 결과들은 국민이 여야 정치인 모두에게 도덕적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야당은 대통령 탄핵안 발의를 폐기하고,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암담하고 우울한 정국을 풀어주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살기도 어렵고 힘든 이 때 더 이상의 혼란도 원치 않으며, 모든 권위와 전통이 다 무너진 이 시점에서 법이라도 제대로 지키며 살자는 지극히 인간적인 국민들의 이러한 소망을 정치인들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성숙하여지고 있다.

남의 흠을 잡고 오기로 대응하여 4월의 총선에 몇 석의 의석을 더 얻어 본들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무릇 정치는 국민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야 한다.

지금이라도 무모한 투쟁의 장을 거두고, 얼마 남지 않은 4월 총선에서 정치적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에 빠진 국민들이 총선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성의를 다하는 것이 보다 떳떳한 길일 것이다.

김복규 계명대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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