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선진국에 태어난 불행

그는 평범한 일본의 가정주부, 고졸 후 무역회사 다니다 결혼,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다.

화제가 밥으로 옮겨갔다.

일본 밥맛은 어딜가나 맛있다, 어째서 그러냐고 물었다.

인사치레로 물은 게 아니다.

일본 갈 적마다 정말 궁금했다.

더구나 FTA로 홍역을 치룬 끝이라 내게 이건 절실한 문제였다.

전문식당만이 아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일본 밥맛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된다.

그리고 나만의 평가도 아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우선 쌀을 잘 골라야 한다고 했다.

생산지, 유기농, 저공해 농법, 그리고 벼가 파릇한 기운이 있을 때 수확한 건지, 7°C 창고에 저장해 보관된 건지, 이제 막 도정한 건지를 꼼꼼히 살핀다, 그리곤 물, 밥솥, 가족들의 귀가 시간까지 맞추어 밥을 짓고 밥그릇까지 세심하게 챙긴다.

농사전문가도, 요리전문가도 아닌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밥 한 그릇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그 많은 과정마다 각자는 고도의 전문지식과 숙련된 기술을 발휘한다.

어느 과정 하나가 잘못돼도 밥맛은 없다.

모두가 전문가여야 한다.

밥맛이 이렇게 좋다면 쌀 시장이 개방된다고 겁날 게 없다.

이게 지식사회다.

생각하면 좀 으시시한 이야기다.

밥 한 그릇에도 많은 사람들의 전문지식이 동원되어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소비자도 이렇게 까다로워졌으니 생산, 공급하는 입장에선 더구나 새로운 전문 지식이 요하게 된다.

그래야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농산물 개방은 세계적 추세다.

떠들지만 말고 조용히 첨단지식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폐농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지식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글줄이나 읽으면 살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아니다.

고도의 전문지식과 숙련된 기술없이는 사회적.문화적 활동에 필요한 수입을 올리지 못한다.

어쩌면 이게 선진국(?)에 태어난 불행일는지 모른다.

얼마 전 도쿄대(東京大) 총장의 졸업치사가 인상적이다.

'자네들이 도쿄대 출신이라는 보증기간은 3년뿐일세'. 이제 겨우 공부하는 습관이나 요령을 터득했고, 공부에 수반되는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뿐이다.

그만큼 지식의 생명 주기(life cycle)가 짧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우리 사정은? 그리고 우리 교육은? 지식사회 문턱에서 우리로선 절실한 문제다.

3년은커녕 당장 써먹지도 못할 인재만 길러 내고 있는 건 아닌지, 답답한 자문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덕성이나 인품은 뒷전이고 오직 대입, 이 관문만 통과하면 마치 중산층 보증이나 받은 줄 아는지 그만 풀어진다.

그래도 졸업은 할 수 있는 게 한국의 대학이다.

교육 강국이니 어쩌니 하는 나라에 세계 100대 대학 하나 없다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덕분에 실력도 없고 나약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새로운 종이 양산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인도를 보라. 지금도 거기선 계산기를 못 쓰게 하고 어려운 숙제를 강제로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인도가 창조적 컴퓨터 소프트의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중국? 거품이예요. 우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가고 있습니다'.

인도 지도자의 자신에 찬 어조가 부럽다.

이웃 중국이 요란하게 부상하는 데 비해 인도는 겉모습만으로는 조용하다.

하지만 속이 탄탄하다.

미국 자존심의 상징, 실리콘 밸리의 첨단 인재는 80%가 인도 출신이다.

이것만으로도 인도는 부자다.

문제는 우리다.

부실한 교육에 설상가상으로 이공계 지망생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

어렵게 나와도 다시 의과 대학으로 옮겨간다니 걱정이다.

하지만 이건 큰 걱정 안해도 된다.

그냥 두면 절로 정리된다.

마닐라에는 택시 운전기사의 상당수가 의사라고 한다.

공급 과잉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발길에 차이는 게 의사다.

지금 우리 이공계 출신도 공급과잉이다.

수재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소수 정예로 키우는 게 이상적인 경쟁 모델이다.

소수의 수재에게 집중 투자하고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게 되야 우수한 인재가 몰린다.

우리는 지식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큰 전환점에 있다.

물론 소수의 엘리트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우주선을 만들든 농사를 짓든 각자의 분야에서 최신·최고의 전문지식과 숙련된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선진국(?)에 태어난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이시형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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