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닙니다.
그때 우리의 젊은이들은 세계를 향해 한국의 역동성과 박력을 보여줬습니다.
축구와 평생 담을 쌓아온 이 사람도 그 뜨거움에 젖어 함성을 올리며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숨은 저력과 잠재력을 한껏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88년 올림픽이 중진국의 탈을 깨는 의식이었다면 2002년 월드컵은 선진 강국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 조각의 불안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의 이름이 이상했습니다.
왜 붉은 악마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온 과거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냉전 시대에 세상살이를 배운 이 사람에게는 붉은 악마가 '북한 공산당'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반공(反共) 포스터' 그리기의 공산당은 꼬리 달린 붉은 괴물이었습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붉은 악마의 여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불안감은 응원단의 명칭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열광에 가까운 그 열정이 걱정스러웠습니다.
열정은 좋은 것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열정입니다.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도 열정입니다.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잊혀진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한강의 기적'도 승화된 민족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열정은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감성이어서 입니다.
선동과 조작에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합니다.
월드컵의 와중에서 그런 양면성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바로 그 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중생 사망사건이 있었습니다.
촛불집회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시위문화를 선보였습니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한국의 도전이었습니다.
강과 약, 불평등의 질서를 뒤엎는 새로운 전진의 물결이었죠. 미국은 한국의 열정에 압도돼 대통령이 거듭 사과하기까지 했습니다.
월드컵이 잉태한 열정이 또 한번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불안감은 여전했습니다.
미군 병사를 '살인자'로 지칭한 것이 못내 꺼림칙했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를 살인 당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살인이라고 불렀고, 어느 듯 보통명사로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불안의식은 그 살인이란 단어에만 연유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촛불집회의 순수한 열정을 왜곡시킬 수도 있으려니 하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능성은 참으로 높아 보였습니다.
월드컵 이후 우리나라는 젊은 감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늙고 타락한 기성세대는 설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젊은 감성은 기적을 창조해냈지만 기성세대는 나라의 장래를 펼쳐 보이지 못했습니다.
아예 사회의 짐짝 같은 존재가 돼버렸지요. 이제는 젊은 감성이 가자는 대로 마구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물러나라면 물러나고, 손가락질하면 잘못을 빌기도 하더군요. 젊은 감성이 너무나 당당하고 강렬해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젊은 감성은 뭔가 모를 불안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을 감성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예스'와 '노'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안됩니다.
완벽한 믿음, 완벽한 열정은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사에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습니다.
그렇게 보고싶고 믿고싶을 뿐이죠. 우리가 보고 느끼는 많은 부분들은 공허한 허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쩍 허상을 좇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실제적 변화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 사람은 실용주의자입니다.
첫 번째의 관심은 국민갈등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다음이 청년실업난을 해소하는 것이고, 250만의 무직가구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500만 비정규직에 대한 대우격차를 완화하고, 400만의 신용불량자를 줄이는 것이 급한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노사.교단의 안정도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일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랜저 도둑이니, 티코 도둑이니 하는 논의는 그저 말장난처럼 보입니다.
탄핵이 되든 말았든, 선거에 지든 이겼든 민생이 배제된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못 짚은 것일까요. 우리 사회의 논의는 이런 기대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니 말입니다.
공허한 권력투쟁과 이념투쟁은 열기를 더하고 불확실성의 그림자는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법치는 실종됐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 지켜보게 됩니다.
시대를 잘못 읽는 우둔함과 완고함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아도 본말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파란 고양이든, 노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는 색깔에만 모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1년 간 시종 누가 덜 더러워 보이는 색깔인지를 다투었습니다.
젊은 감성을 유혹하자는 저의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양이 색깔 때문에 멱살을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멱살을 풀고 냉수 한 사발 들이킬 여유가 있어야겠습니다.
나라가 싸움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짚어보아야겠습니다.
4월 15일 전 국민 반상회가 있다고 합니다.
박진용(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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