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27)-청화산(4)

4.

현관 거실문을 여니 붉은 보름달이 앞마당에 휘영청 떠 있다. 계수나무 아래에서 옥토끼가 떡방아를 찢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미친 놈. 그것은 미국 사람 '암스트롱'이 달에 가보니 완전 뻥이라는게 증명되었어. 아, 미워 암스트롱. 나는 '인류의 마지막 로맨티스트'고 암스트롱은 '인류 로맨티시트의 파괴자'네. 뜬금없는 얘기. 어떤 분이 이런 의문을 던졌더라구요. "인간이 달에까지 가는 세상에 어째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아, 지당하신 말씀. 달까지 갈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갖고 있다면 가난도 충분히 없앨 수 있을텐데. 인간들이 혼자만 잘 살려고 하니까 그렇지. 나쁜 인간들.

청화도사가 술을 마시면서 "달이 집안으로 들어왔다"며 으쓱하면서 자랑이 대단하다. 그래서 나는 달을 불러서 예쁜 각시처럼 나의 옆자리에 앉아 시중 들라고 윽박질렀다. 옆에 끼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한뒤 동침을 좀 해야겠다고. 달하고 동침을. 뭐야.

청화도사는 크고 큰 대자연을 집안으로 데리고 와서 사는 구나. 한국에서 제일 어마어마한 큰 집이구나. 그래서 나온 시가 있죠. 김빼서 죄송합니다만. 조병화의 '해인사', "큰 절이나 / 작은 절이나 / 믿음은 하나 // 큰 집에 사나 / 작은 집에 사나 / 인간은 하나". 그래도 부럽다, 부러워.

주인장은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백두대간에는 확실히 정기가 있는 것 같다.이 곳 마을 노인분들이 평생 술을 그렇게 많이 드시고 계시지만 술 마신 뒤 산에 한번 올라갔다 오면 말짱하게 술이 깨어서 내려 온다고 한다". 또, " 자연에는 미물이나 식물이나 서로 교감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움을 완전 비우면 그 정기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이어 "산속에서만 도를 닦을 수 있고 속세라고 도를 닦지 못할란 법은 없다. 아무리 산좋고 공기좋고 정기좋은 곳이라도 너무 쓸데 없는 일에 신경을 쓰면 머리카락이 빠진다. 그러니 살고 있는 곳이 다 도닦는 곳이 될 수 있다. 기예와 기공을 닦은 사람만이 마음을 수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처럼 순수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무슨 정확한 말씀을. 농담이고요. 고단자로서 너무나 겸손한 말씀인 것 같다. 맞습니다.

사방의 산에 폭 묻힌 산자락 중턱, 넓직한 집마당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혼자 마당을 거닐며 우주를 음미했다. 침묵 고요 적막 평화. 이런 곳에 살고 싶다. 또다시 무릉도원 타령이구만.

산의 침묵과 고요. 그 무게는 얼마일까. 유경환 시인의 '낙산사 가는 길'이란 시가 떠오르네요. " 세상에 큰 저울이 있어 /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바로 앞 연엽산의 겨울밤 침묵을 달아보니 무게가 백톤입니다. 불량 저울이네. 하여튼 수백만톤의 무게가 아닐까. 맞다 맞어. 청화도사의 무게도 이 산의 침묵 무게만큼 이나 무겁겠지. 이런 얘기도 있더라구요. ' 침묵은 우뢰와 같다". 반대개념인데. 침묵하면 늘 다음이 무섭더라구요.

이헌태의 생각1. "보름달 빛이 저토록 밝아 온 설산이 다 드러나고/ 흰 구름이 달을 벗 삼아 바람따라 이러저리 한가롭게 노니는 구나/ 적막한 깊은 산속 개소리, 풍경소리가 어찌나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구나". '설산견곡'. 눈 덮힌 산속에 개소리만 울린다. 뭐야.

이헌태의 생각2. " 달도 한가롭고 구름도 한가롭고 연엽산도 한가롭고 나도 한가롭다. 일체가 한가롭다". 뭐야. 노는 것 좋아하다 보니 시가 유치하구만.

느긋하고 한가로운 풍광을 보니 장자의 수행법이 생각나네요. 첫째 소요(逍遙).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이 떠돈다. 둘째, 심재(心齋). 목욕재계하듯이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 셋째, 좌망(坐忘). 돌아다니면 몸은 바쁘고 정신도 피곤하다. 그래서 앉아서 그냥 잊는다. 끊임없이 나에게 없는 것을 찾으려 밖으로 나가는 분주함에서 탈피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수행법을 자주 실천합시다.

보너스. 옛 시인이 노래하기를 " 푸르른 물빛은 부처님의 눈 / 온 산은 부처님의 머리 / 달빛은 한 마음의 근원 / 구름은 8만4천 경문일세".

푸르른 물빛이 빠졌네. 이헌태가 있잖아요, 물에 물탄 놈 같으니까. 물 같은 사람이라면 나쁜 뜻으로 쓰이는데 원래에는 참으로 좋은 말이거든요. 노자와 공자가 물을 얼마나 칭송했습니까. '천재'와 '천치'가 한 끗발 차이듯이. 모든 게 극과 극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귀한 과실주가 깡패 '객'들의 난동으로 아작이 나는 가운데 백신종선배가 돼지고기 두루치기까지 해오며 '술 주정'을 부추겼다. 술도 넘치고 안주도 넘치고. 보름달이 휘엉쳐 밝겠다, 산속 적막이 너무 좋겠다, 귀한 술 너무 많겠다. 그 다음이 어떻게 진행되는 줄 아시죠.'부어라 마셔라'.

다음날 새벽 2시 넘게까지 퍼 마셨다. 일부 사람들은 주인장을 잡아 놓고 고문을 하고 있었다.새벽 4시를 넘어서야 파장 분위기 였다. 복분자술과 인삼주가 얼마나 이들의 위속. 아니 몸속, 아니 이들의 우정속으로 퍼 넣었는지. 아프리카 곡물창고같은 자그마한 황토움막도 너무 이국적이었고 그 안에 훨훨 타는 장작불도 운치를 더했다. 그 속에서도 술판이 벌어지고.

사족. 새벽 2시에 이 집 처마 끝에 매단 풍경소리, 닭소리, 개소리의 합창이 어우러지면서 멋진 환상곡을 연주하고 있구나. 그 소리가 이헌태의 가슴을 때리고 더 나아가 우주를 깨우는 자연의 원음 같았다.

참 이상하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왜 닭도 울고 새도 우는 것으로 표현했지. 짐승들은 더 강도높게 울부짖는다고 했을까. 옛날 조상들은 슬픈 일이 얼마나 많길래 동물들을 웃지 않고 우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신동문 시인의 4.19혁명 예찬시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群)들'. 끝 부분에 " 아! 다비데여 다비데여 / 승리하는 다비데여/ 싸우는 다비데여 / 쓰러진 다비데여 / 누가 우는가 / 너희들을 너희들을/ 누가 우는가/ 눈물 아닌 핏방울로 / 누가 우는가/ 역사가 우는가/ 세계가 우는가/ 신이 우는가/ 우리도/ 아!신화같이 /우리도 / 운다. 역사도 울고 세계가 울고 신도 우는 정도가 되어야지. 닭이 울어. 비교도 안되네. 이헌태, 니 잡글을 보니 왜 너 같은 인간이 태어났느냐고, 울고 싶다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닭이 '꼬끼오'라고 자꾸 운다. 한밤중에 울긴 왜 울어. 미친 놈의 닭. 사람이 반갑다고 고함치는 것이지 뭐. 하여튼 새벽이나 낮도 아닌 한밤중에 왜 떠들어. '또라이 닭'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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