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27)-청화산(6)

6.

시간이 너무 허비되어 당초 예정된 산행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대장이 쿨쿨 주무시고 있는 가운데 여러 가지 대안이 나왔다. 백신종 선배는 거창에 함께 내려갔다가 점심을 먹고 허정균 선배가 사는 전북 부안으로 건너갔다가 바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자고 주장했고 나는 인근 문경 주흘산에 올라가서 설경을 만끽하자고 제의했다.

유대장을 흔들어 깨우니"나는 못 가지만 너희들은 무조건 가라"고 독촉이다. 일행들이 주저하자 "만약 안 가면 우리 산악팀은 뭐가 되냐. 개판이다". 이 노인양반이 미쳤나. 이헌태가 완존 미쳤구만. 죄송합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출발해서 눈 속을 어떻게 장장 12시간이나 갈 수 있나. 조난당하기 십상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때 청화원 주인장이 귀를 번쩍 뜨이게하는 발언을 했다. "마을 바로 위가 조향산이다. 쭉 올라가면 갓바위재가 나온다". 당초 계획은 늘재에서 버라미기재로 가는 코스지만 이번에는 갓바위재에서 늘재로 역산행을 하면 시간이 대략 3-4시간만 소요되니 무리가 없고 적당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당초 계획산행의 초반내지 맛뵈기 산행인 셈이다.

유대장만 남겨두고 일행 15명은 폐교터에서 더 산 방향으로 올라가서 궁기리 경노회관에 도착해서 아이젠과 스패치를 하고 장비를 점검한 뒤 오전 9시 53분에 출발했다.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기묘한 돌산이 조향산이라고 한다. 돌산의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속리산을 다시 보는 듯하다.

애매한 코스가 나타나자 산꾼 백신종 선배가 치고 나가는 길대로 능선따라 곧장 힘차게 전진했다. 눈은 발목까지 약간 쌓여 있었지만 양지 바른 곳은 녹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한여름때 같은 햇볕이 얼마나 따스하게 쏟아지는지 연신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능선을 타고 가면서 설산의 경관을 즐겼다. '아! 아!' 이 아름다운 정취를 오래 간직해야지.

허정균 선배가 "백두대간도 좋지만 백두대간 옆구리도 좋구만"이라면서 대간 옆구리를 칭찬한다. 산도 옆구리가 좋지만 사람도 옆구리가 중요해요. 요통이 그렇게 아프다면서요. 허리가 부부에게 중요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심지어 이혼감이 될 수도 있음. 옥체를 보존하는 것보다 허리를 보호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

결국 낮 12시 정각에 대간 마루금에 올라 섰다. 갓바위재인지 아니면 갓바위재가 바로 앞인지 몰라도 공터였다. 백두대간을 알리는 리본이 매달려 있어 너무나 반가웠다. 내 고향 대구의 팔공산에도 갓바위가 있는데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듯하다. 참 팔공산 갓바위에는 부산경남쪽에서 소원을 특히 입학시험합격을 빌러오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고 해요. 대구경북지역 사람들은 부산의 해운대나 태종대등의 바닷가에 가서 돈을 뿌리고 오는데 대구지역은 볼 게 없어서 그런지 외지에서 오는 관광객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이것을 유식한 말로 '관광수지적자'. 나는 왜 볼 것 하나 없는 이런 대구에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뭐야. 이헌태 조상을 분노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마루금에 서서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 보니 양쪽의 큰 산 따라 쭉 내려간 골이 있고 그 주변에 인가들이 몰려 있었다. 이곳은 경북 문경군 농암면이다. 그리고 마루금을 건너 반대쪽에는 호수 같은 커다란 의상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이다.

머리위 하늘에는 하얀 솜사탕같은 흰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다. 구름이 너무 맑고 순수하고 포근해 보인다. 사위가 장쾌한 산맥의 군락으로 겨울산의 무게를 느끼게했다. 백두대간 주능선과 첩첩만겹 준령, 특히 남동쪽 방향에 시루봉과 연엽산이 장군처럼 우뚝 솟아 있다. 아아, 산도 호연지기. 나도 호연지기. 인생이란 이를 만끽하고 가슴에 담는 재미로 사는 것이지 뭐. 우람차고 웅장한 준령들과 눈덮힌 하얀 설산, 그리고 인간 이헌태. 인간 이헌태는 빼고. 너무 하시네.

대간 능선에 쌓인 눈이 장난이 아니었다.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무릎 내지 옆구리 깊이까지 엄청 쌓여 있었다. 약간 쉬는 틈에 한 대학생이 다가왔다. 북쪽 진부령에서 시작해서 혼자서 야영하면서 52일째 백두대간 산행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비용은 남쪽 지리산 천왕봉까지 갈 경우 장비까지 포함해서 대략 400만원 들것이라고 추측했다.

대한남아의 기상, 하늘을 찌른다. 이 추운 겨울에, 그것도 혼자서. 미친 학생 아닌가 몰라. 얼굴은 영락없는 거지였다. 하여튼 그 기상과 그 의지 높이 평가합니다. 근래 대학생들은 머리에 든 것도 많고 글도 잘 쓰지만 의지는 대단히 약하다고 들었는데.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보다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많으면 그 나라는 잘된다고 하던데.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인생을 알차게 보내는구만. 앞으로의 인생에 영광이 있어라!. 대단한 대학생이야.

대학생은 외로웠든지 우리팀을 따라 나섰다. 앞서 간 대간팀들이 눈속에 길을 내어 놓아서 그 깊은 구멍에 발을 맞추기만 하면 되었지만. 일년만에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산행의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 자연 산행 진도가 느릴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이헌태는 너무 좋죠. 모두들 속도를 내지 못하니 이는 이헌태가 뒤쳐지지 않는다는 뜻. 잘 났다.

대간 능선 길을 걷는 동안 좌우 계곡에서 불어 올라오는 세찬 바람이 '윙윙'소리를 내면서 위협을 하고 있는 듯했다. 대간 능선길은 암릉의 연속이어서 다소 고되었지만 그 주변 경치는 장관이었다. 든든한 근육질의 우람한 산악들을 조망하면서 걷는 그 기분은 하늘을 날아가는 듯하다.

봉우리에 서니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거센 겨울 바람이 불면서 곱디 고운 이헌태의 맨 얼굴을 쌀알을 퍼붓듯 마구 마구 때리고 있다. 이 시간,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빈둥빈둥 하루를 허송하는 전국의 절대다수 국민여러분이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 불쌍한 중생들. 어떻게 같은 인생을 살아도 이렇게 다른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