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고갱이-발해 건국과 성쇠

▲건국=당나라가 고구려 옛 땅을 통치하게 된 지 약 30년이 지난 696년. 고구려 별부(別部) 출신인 조영이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영주(지금의 조양)에서 북동으로 벗어나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측천무후는 회유책을 썼으나 실패하자 이해고를 시켜 이들을 추격했다.

걸사비우가 당군에게 참살됐으나 조영은 추격을 뿌리치고,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밖 육정산으로 빠져나와 성을 쌓고 진(震)나라를 세웠다.

조영은 700년 스스로 진국왕으로 칭하고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또 자신의 성을 '대'씨로 칭하는 한편 국호를 발해로 고치고 713년 발해군왕이 되었다.

▲성쇠=대조영의 정책과 치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진국을 세울 당시 한창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의 추장 묵철과 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716년 묵철이 살해되고, 당나라가 영주를 되찾자 대조영은 당나라와 평화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수도가 동모산(東牟山:지금의 육정산 부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당이 대조영을 군왕(郡王)으로 책봉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국 초기 발해는 추장국(酋長國)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719년 대조영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했다.

그는 오늘날의 올가강 유역에 이르는 연해주 남단을 발해의 영토로 만들었다.

또 동해를 통해 일본과 수교했다.

그 뒤 북동쪽의 흑수말갈 문제로 당나라와 대립했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은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고 관무역을 활발하게 하는 등 평화외교정책을 취했다.

특히 동모산에서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로 천도하였다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다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기는 등 잦은 천도를 단행했다.

762년 당나라는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올려 책봉했다.

발해의 국력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왕 시기에 발해는 독립국가의 기틀을 굳혔다.

5대 성왕은 수도를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겼다.

왕국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사람은 선왕이었다.

그는 발해의 영토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까지 확장했다.

3대 문왕시대에 알려진 3경 외에 다시 서경압록부와 남경남해부를 더하여 5경 15부(府) 62주(州)의 이름으로 전국을 통치했다.

해동성국을 이룩한 선왕은 830년에 죽었다.

▲멸망=묵철이 죽은 뒤 세력이 약화되었던 거란은 당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을 틈타 당나라를 멀리하고 오르혼강을 근거로 옛날의 돌궐과 같은 경로를 밟아 세력을 확장했다.

발해의 선왕 대인수의 무렵에는 북류송화강 부근을 경계로 발해와 겨룰 만큼 성장했다.

10세기 초에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의 숙원이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중국본토 진출에 앞서 발해 침략을 감행했다.

927년 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은 발해가 거란을 방비하기 위해 최전선에 구축한 부여성(扶餘城)을 뚫고 곧 상경용천부를 포위, 공격하여 불과 20일 만에 발해 제15대왕 대인전의 항복을 받았다.

서기 926년 1월 14일이었다.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며 만주 동쪽 땅에 나라를 세운 지 228년만이고, 고구려 멸망으로부터는 258년만이다.

발해의 멸망은 하나의 국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날일 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활동 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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