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후 첫 제헌의원 선거때 "나랏일 해야 할 높은 분들을 왜 우리보고 뽑으라 하나. 어렵고 중요한 문제는 나랏님이 알아서 하면 될 걸"이라고 하는 촌로들이 있었다 한다.
선거가 아직 생소하던 시대였으니까 이해가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각종 선거경험이 서른 번이 넘어가는 이즈음에도 이말은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직도 "누가 누군지 모르는 판에 어떻게 뽑느냐"거나 "뽑아봤자 그게 그거"라며 아예 투표를 외면하는 유권자도 있다.
그렇다.
선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표를 달라고 나서는 후보도 죽을 고생을 하지만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판에 꼭 필요한 일꾼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는 유권자도 편하지만은 않다.
대구.경북의 유권자는 그래도 지난 몇번의 선거는 편한 선거를 했다.
'반(反) 김영삼' 깃발로 똘똘 뭉쳐 자민련 태풍을 불게 했고 지난 16대 때는 "광주가 그렇다면 우린들 못하랴"며 반(反) 김대중의 구호아래 대구.경북 의석 모두를 한나라당에 안겨주었다.
◇몰표가 지역의원 앞길 막아
풀뿌리 민주주의에서 어느 한 정당의 싹쓸이는 지역 정체성의 표현으로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16대 총선 개표후 지역 곳곳에서 나온 "잘못됐다"는 지적은 선거결과가 지역 정체성의 표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여권의 창구를 막아 지역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는 지적은 그 이후 "여권내부에서 대구.경북을 버리자는 말이 나왔다"는 루머성 이야기로 구체화되기도 했다.
심지어 지역출신 한나라당 의원조차 "지역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때면 우리만 욕을 먹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몰표로 한나라당의 최대 주주는 당연히 영남이었다.
그덕에 당직개편 때면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은 언제나 한자리씩을 차지했지만 '말뚝만 꽂으면 당선되어 오는' 대구.경북 의원들의 입지는 실상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누구하나 낙오없이 당선되어 온 결과 대구.경북 유권자가 누구를 가장 기대주로 여기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당연히 한나라당 지도부는 지역출신 의원 누구에게도 지역 리더의 예우를 하지 않았고 지역의원들도 "너나 나나 똑같다"며 지역 대표나 지역 차세대 주자의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의원 개개인이 독립된 기관인 마당에 대표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리더가 없으면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나아가 미래도 기약할 수 없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몰표가 지역 의원을 키워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 의원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몰표가 쏟아진 대구와 광주는 서로를 "상대 못할 지역"으로 단정한 가운데 여타 지역 사람들의 눈에는 양쪽 모두 '이상한 나라'로 굳어져 갔다.
대구와 광주의 목소리는 "들어보지 않아도 뻔하게" 됐다.
몰표를 몰고 온 깃발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상황은 여전하다.
호남 표심을 잡기위해 이미 사라진 DJ깃발을 찾느라 분주하고,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는 "영남은 여전히 누가 가도 되는 지역"으로 물갈이의 표적이 됐다.
◇유권자가 '감동의 씨앗' 뿌려야
인조반정 이후 숙종과 영조를 거쳐오는 시기의 죽기살기식 당쟁정치의 특징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성'이었다.
학설 논쟁이 정치투쟁으로 이어져 당이 다르면 죽이고야 만 것은 나와 우리 당이 인정하는 가치의 절대성 탓이었다.
대통령 탄핵으로까지 이어진 작금 여야 정치권의 행보에서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만의 절대성만 돋보이고 있다.
상대를 인정하는 여유가 부족한 우리 정치권을 유연하게 하려면 먼저 우리 유권자가 유연해야 한다.
감정과 바람에 의한 투표로는 우리 정치를 유연하게 할 수가 없다.
야권을 키우려면 야권 주자를 뽑아야 하듯 여권과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여권 대표가 필요하다.
여야 모두가 싫다면 정당에 속하지 않는 후보가 있지 않은가. 그래야 대구.경북의 다양한 목소리가 여야는 물론 나라 곳곳에 골고루 전달된다.
정치의 요체를 감동이라고도 한다.
국민의 삶을 기름지게 하는 일 못잖게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키워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정치가 국민을 감동시켜 주지 못한다면 유권자가 정치에 감동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지역 인재를 키우고, 지역 목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전달되고, 나아가 우리 정치를 유연하게 하는 감동의 씨앗은 그러나 '묻지마 투표'라는 토양 아래서는 자랄 수 없다.
정치2부장.서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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