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41)빼앗고 뺏긴 관산성

분홍빛 진달래만 죽은 자들의 피 빛 영혼을 달래는 듯했다.

백제인들도, 대가야인들도, 왜인들도 모두 남김없이 스러져간 그 자리에서 꽃은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삼성산(三城山) 꼭대기엔 자그만 우물터가 낙엽에 가려있었다.

신라 병사들이 수십일 전투에 마른 입을 적시고, 백제와 대가야 병사들이 한 때 승리의 희열로 축배를 든 꿀물이었을 터. 그 우물은 다시 피로 물들고, 그 피는 다시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잎을 붉게 물들이고…. 1천500년이 지난 지금도 물기는 여전히 촉촉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쟁의 상흔은 온데 간데 없었다.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말 무덤 고개'. 전장에서 칼과 창, 도끼의 희생물이 된 수백, 수천의 말이 잠든 곳이다.

이 고개를 넘기 전, '옥천공원묘지'를 비껴 약 30분 오른 삼성산 정상. 남쪽으로 옥천 시내가 발아래 밟힐 듯했다.

북쪽으로는 서산성((西山城)과 삼양리토성(三陽里土城)이 곁에 있고, 고리산성(環山城;군북면 환평리)과 노고산성(老姑山城;군북면 이백리)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옛 신라의 성터였다.

옥천문화원 황건하 부원장은 "삼성산은 6부 능선 아래에 돌로 이중으로 쌓은 견고한 석성"이라며 "이 산 인근에는 '구진베루' '말무덤 고개' 등 관산성 전투의 역사를 대변하는 지명이 많다"고 말했다.

'관산성 전투'. 554년 백제, 신라가 국운을 걸고 벌인 싸움이었다.

551년 백제가 신라, 대가야와 힘을 모아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았으나, 2년 뒤 신라는 이 땅을 몽땅 독차지해 버렸다.

신라의 '배신'에 백제, 대가야가 '복수의 칼'을 빼든 것. 그 칼날은 충북 옥천의 관산성을 겨누었다.

옥천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서 추풍령을 넘거나, 상주에서 화령을 넘고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지나 백제의 왕도인 사비(부여)로 이어지는 교통로였다.

부여에서 경주로 향하는 주요 관문이기도 했다.

신라의 백제방향 국경의 최전방이었던 셈이다.

554년 여름, 백제 태자 여창(餘昌)은 대가야와 왜의 지원군을 이끌고 한 때 관산성을 함락하고, 신라 깊숙이 쳐들어가 승리를 맛보는 듯했다.

그러나 백제 성왕이 아들 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근위병을 거느리고 구천(狗川;서화천)으로 향하면서 불운이 예고됐다.

구천에 이르러 신라 복병을 만난 것. 성왕은 결국 신라군 전초기지인 삼년산을 지키던 김무력의 부하장수 고간(高干) '도도(都刀)'의 부대에 의해 '구천(九天)의 객(客)'이 돼버렸다.

왕을 잃은 병사들은 사공 없는 배처럼 휘둘렸고, 전투마다 완패했다.

4개국이 개입한 이 국제 전쟁에서 성왕을 비롯해 백제 연합군은 몰살당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는 '좌평(佐平) 4명과 군사 2만9천600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고 그 때의 참상을 말하고 있다.

대가야의 전성기인 400년대 후반부터 500년대 초반까지 대가야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크게 혼탁했다.

영토분쟁은 끊이지 않았고, 외교관계는 복잡하게 뒤얽혔다.

초강대국 고구려는 남으로 눈길을 돌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의 목숨을 빼앗고, 도읍 한성(서울)을 함락시켰다.

국가적 위기를 맞은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479년 동성왕이 집권하고 나서야 정국 안정을 꾀했다.

300년대 후반부터 고구려에 의존해오던 신라는 400년대 후반, 팽창하는 고구려의 위협에 맞서 백제, 가야 등과 손을 잡았다.

481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에서 일곱 성을 빼앗고 남으로 치고 내려오자, 신라 소지왕은 백제와 대가야 연합군의 힘을 빌어 이를 물리쳤다.

대가야는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중국 남제에 사신을 파견(479년)하고 친신라, 친백제 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며 주변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484년 고구려가 다시 신라에 쳐들어갔으나, 신라는 백제에만 구원을 요청해 고구려를 격퇴했다.

신라와 대가야 사이의 소원해진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대가야는 496년 신라 소지왕에 꼬리 다섯 자 되는 흰 꿩을 보내 화친을 도모했다.

500년대 초반, 대가야는 기문(己汶;남원), 대사(帶沙;하동) 등 요충지와 왜(倭)와의 교역 주도권을 놓고 백제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대가야가 친백제에서 친신라 정책으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된 다툼이었다.

522년 대가야 이뇌왕은 백제-왜와의 교역에 대응해 신라 법흥왕에 청혼,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과 혼인해 월광태자를 낳았다.

이른바 결혼동맹이다.

그러나 529년 신라가 의관제를 빌미로 대가야에 쳐들어와 3성을 빼앗음으로써 그 동맹은 깨진다.

530년대, 신라 법흥왕은 강력한 왕권과 국력을 바탕으로 낙동강 하류로 진출, 금관가야(김해)와 비화가야(창녕) 등 가야제국을 손아귀에 넣는다.

대가야는 다시 양쪽에서 옥죄는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화친을 시도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와 대가야의 힘을 빌어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되찾았다.

그것도 잠시, 553년 신라 진흥왕은 한강 하류의 백제군을 몰아내고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한강 전역을 독차지해버렸다.

이 신주는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이자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이 군주가 돼 다스렸다.

이로써 신라-백제의 동맹관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양국은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돌아섰다.

신라의 '배신'에 격분한 백제 성왕은 554년 대대적인 복수전에 나섰다.

이 때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 연맹군은 왜군 원병 1천명과 함께 백제 편에 섰다.

그 복수전은 배신의 대가를 갚기는커녕 수만 명의 목숨과 피를 뿌리며 결말을 맺었다.

충북대 역사교육과 차용걸 교수는 "관산성은 성왕이 숨진 곳으로 알려진 서화천(西華川)을 중심으로 삼성산, 서산성, 삼양리토성 일대가 유력하다"며 "이 전투는 백제의 참패와 함께 대가야가 급격히 몰락하는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옥천군청 설용중 문화관광담당은 "올 하반기 삼성산과 삼양리토성에 대해 문화재청에 사적지 지정 신청을 할 예정"이라며 "이 일대에 발굴조사가 이뤄지면 관산성의 실체가 더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성왕이 숨진 곳으로 알려진 구천은 지금도 삼성산 서북쪽 아래 '구진베루'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은 서화천을 감싼 벼랑지역이다.

구진베루는 '구진'이란 나루로, 또는 왕이 숨진 '궂은 벼랑'으로도 일컬어진다.

옥천읍에서 구진베루로 향하는 길목에는 관산성 전투의 상처를 담은 이름들이 맴돌고 있다.

'진터벌' '염장' '말무덤 고개' '군진' 등등. 그 상처는 대가야의 뼛속에도 깊숙이 파고들어 곪아갔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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