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고갱이-발해의 대외관계

▲발해와 신라=당과 직접 충돌하며 등장한 발해는 초기에 신라와 우호적 관계를 추진했다.

주변국 모두를 적으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조영은 700년경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에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 5품인 대아찬의 질(秩)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신생국 발해에 비해 전성기 신라의 지위가 우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발해 무왕 대무예의 세력팽창으로 신라에 위협을 주자 발해와 신라는 대립양상을 보였다.

성덕왕 때(721) 신라는 북쪽 국경에 장성을 축조해 발해를 견제했다.

또 733년에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함에 따라, 당과 연합한 신라가 발해의 남변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긴장과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양국의 교섭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문왕 대흠무가 재위하던 8세기 발해와 신라 사이에 상설 교통로가 개설했다.

당시 발해는 교통로 5개가 있었는데, 그 중 남해부(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었다.

9세기 접어들면서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누리는 반면, 신라는 하대의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를 공격해 영토를 빼앗고 여러 군읍을 두었다.

신라는 826년 7월 대동강에 장성을 쌓아 발해의 침공을 대비하기도 했다.

▲발해와 당나라=발해의 건국은 당나라에 대항하는 행위였지만 당은 발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돌궐과 거란의 발흥을 견제하기 위해서 발해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발해 또한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당과 계속 대립할 수만은 없었다.

당나라의 선진문물이 발해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발해는 713년에 정식으로 당과 국교를 수립했다.

716년 이후에는 매년 당에 조공사를 파견, 선진문물을 흡수했다.

이를 통해 발해는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 발전을 도모했다.

발해가 세력을 계속 넓혀나가던 중 732년, 당의 등주를 공격했다.

발해의 등주 공격은 국제전 양상을 보였다.

발해는 거란, 돌궐과 연합하여 당에 대응했고, 당은 신라와 함께 발해의 남변을 공격(733년)했다.

전쟁은 발해의 승리였다.

발해는 그 후 돌궐세력의 약화에 따라 강경노선을 철회하고 왕의 동생을 당나라에 입조시키는 등 당과 관계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선왕은 당과의 관계를 강화해 그의 통치 시기 중 819년을 제외하고, 매해 당에 사신을 보내 실리외교를 전개했다.

그러나 9세기 말부터 진행된 당의 와해와 한반도의 혼란 등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발해는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국력이 쇠퇴했다.

▲발해와 일본=긴밀한 관계를 맺어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의 교류했다.

특히 당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해주는 교량 역할을 수행했다.

발해가 일본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727년부터 919년까지 모두 34차례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라 차츰 무역의 형태를 동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이 발해로 사절을 파견한 것은 728년에서 811년까지 모두 13차례에 불과하다.

그나마 발해의 사절파견에 대한 답례의 형식이었다.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경제적으로 쇠락함에 따라 쇄국정책을 취했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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