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대 초반 가을 어느 날, 우륵(于勒)은 금곡(琴谷:고령 쾌빈리)의 대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제자 이문(泥文)이 망치를 들고 뒤따랐다.
바람이 대숲을 흔들었다.
새벽 빛줄기들이 흩어지고 모였다.
대나무를 잘라낸 자리엔 넓은 평상이 깔려 있었다.
그 위에 오동나무 널 판과 명주실이 널려 있었다.
지난 해, 이문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자락부터 훑어 조양(朝陽)과 부상(扶桑)에서 소달구지에 싣고 온 나무와 실이다.
나무판을 두드리던 우륵은 이문에게 "쉽게 갈라지지 않고 소리가 맑아야 한다"고 했다.
양지 녘 하천 가에 자란 신령한 오동나무라야 금(琴)의 앞 뒤 판으로 제격이었다.
왕의 군사가 왔다.
금과 음악이 제대로 돼 가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고을의 방언이 다르니 어찌 소리가 같겠느냐. 고을마다 소리를 따로 만들라'고 명한 가실왕(嘉實王)이 묻힌 지도 벌써 여러 해가 흘렀다.
가실왕(嘉實王)의 명에 따라 백제의 10줄 현악기(마한시대, 광주 신창동 출토)도, 중국 남제에서 가져온 쟁(箏)도 아닌 대가야 고유의 악기를 만들고 있었다.
왕의 부름을 받고 고향 성열현(省熱縣:의령 부림면)을 떠나 온 지난날들이 스쳐갔다.
왕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가야금을 완성하고, '자연의 소리'도 맘껏 펼쳤다.
가실왕의 장례기간 내내 소리로 별과 하늘과 대가야의 평안을 빌었다.
이제 각 고을에 전하기 위한 12곡도 거의 완성 단계였다.
서쪽 저 멀리 가야산을 바라보며 솟은 왕 무덤이 햇살을 받아 또렷했다.
이뇌왕(異腦王)은 초조했다.
기문(己汶:남원)과 대사(帶沙:하동)가 무너졌다.
섬진강 뱃길이 끊겨 왜(倭)와의 교역 주도권은 백제에 넘어갈 판이었다.
낙동강 하구에 인접한 남쪽 고을은 하나 둘 신라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대가야 왕권에 대한 지방세력의 믿음도 점차 엷어졌다.
음악을 서둘러 완성해 지방을 추슬러야 할 상황이었다.
군사로부터 전황을 전해들은 우륵은 상념에 잠겼다.
523년, 아기 울음소리가 대궐에 울려 퍼졌다.
우렁찼다.
월광태자(月光太子). 백제에 섬진강 하구 바닷길을 뺏긴 이뇌왕은 지난해 신라 법흥왕에게 결혼동맹을 제의했다.
법흥왕은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시종 100여명과 함께 보냈고, 이뇌왕은 나라의 생존을 위해 왕비를 맞았다.
정략결혼이었다.
신라와 대가야 두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월광은 뼈가 굵고 키가 크고 말달려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태자는 불행했다.
신라에서 온 어머니와 시종들은 대가야에서도 계속 신라의 옷을 고집했고, 고을 수령들은 불만을 품고 시종들을 쫓아냈다.
529년, 신라가 이를 트집잡아 대가야 3성을 빼앗음으로써 결혼동맹은 깨졌다.
이후 월광은 대궐 중신들로부터 태자로서의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가야의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있을 즈음, 우륵은 12곡을 완성했다.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 기악곡인 보기와 사자기를 제외하고, 대가야에 속한 각 고을의 특색이 있는 음악을 정리한 가야금 곡이었다.
대체로 하가라도는 금관국(김해), 상가라도는 대가야, 달이는 여수 또는 하동, 사물은 사천, 물혜는 광양 또는 고성, 하기물은 남원, 거열은 거창 또는 진주, 사팔혜는 합천 초계, 이사는 의령 부림, 상기물은 임실 등으로 추정된다.
우륵은 각 고을의 수령이 모일 때면 궁정에서 12곡을 연주했다.
중국과 일본이 현악기를 앞에 두고 손톱으로 연주한다면, 우륵은 금(琴)을 몸에 밀착시켜 손가락 살로 현을 뜯었다.
줄이 물러 음역이 넓었고, 자연의 재료 탓에 물소리, 새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청정한 대가야의 소리였다.
대가야 세력권인 각 고을을 음악으로 평정하고 규합하려 했던 가실왕의 뜻이 결국 빛을 발했던 셈이다.
그러나, 김해와 창녕을 비롯해 남쪽 가야제국은 점차 신라의 병장기 앞에 스러져갔다.
532년, 금관국(김해) 구해왕(仇亥王)은 왕비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등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의 진골로 편입된 김무력은 21년 뒤 백제로부터 뺏은 한강하류의 신주(新州)를 다스리다 이듬해 대가야와 백제, 왜를 몰살시킨 관산성(管山城:옥천)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대가야의 태양은 점점 기울고 있었다.
우륵의 마음도, 금(琴)의 소리도 흔들렸다.
월광태자도 그러했다.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대가야의 태자인가, 신라의 왕족인가'. 월광은 불교에 귀의했고, 중신들은 더 이상 신라의 핏줄을 문제삼지 않았다.
왕은 또 다른 아들, 도설지를 태자에 책봉했다.
가야산 해인사 서쪽 5리 '거덕사'에 몸을 맡긴 월광은 훗날 야로현 북쪽 5리에 터를 마련하고 '월광사'를 건립했다.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는 그렇게 산과 물과 하늘을 벗삼아 한을 달랬다.
성열현 사람, 우륵도 기울어 가는 대가야를 떠났다.
열두곡 소리가 더 이상 고을의 마음과 땅을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 이문을 데리고 신라로 망명했다.
신라 진흥왕은 국원(國原:충주)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남한강이 '용섬'에 부딪히고, 왼쪽 멀리 '달천'이 합쳐지는 곳, 탄금대(彈琴臺:충주 칠금동)였다.
551년 3월, 우륵은 낭성(娘城:청주)에 행차한 진흥왕에게 열두 곡을 연주했다.
대가야의 악기는 그렇게 신라의 소리가 됐다.
그 소리는 울려퍼져 대가야의 하늘까지 미쳤고, 다시 소리는 칼과 피가 돼 대가야의 땅마저 신라의 땅으로 바꾸고 있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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