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상인터뷰-해인사 은거 최치원

대학자 최치원이 해인사에 은둔해버렸다.

토황소격문을 쓰는 등 당나라에서 필명을 날렸던 그였다.

최치원이 귀국했을 때 신라사회는 흥분했다.

농민봉기와 귀족반란 등 어지러운 신라를 안정시킬 방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실과 귀족은 최치원의 개혁안인 '시무10조'를 묵살했다.

최치원은 개혁안을 펼쳐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지방대학을 전전하던 그는 아예 해인사로 은둔해 저술에 몰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은거중인 최치원을 만나기 위해 취재팀이 해인사로 달려갔다.

-전문-

-귀공께서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해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은둔해 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 봄에 작은 나무 몇 그루를 심었습니다.

때 맞춰 물을 주고 보살폈더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작은 나무도 보살피고 어루만지면 꽃과 열매로 화답합니다.

신라 왕실과 귀족은 작은 나무만도 못한 것 같습니다.

-상당히 상징적인 말씀인데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요. 이미 신라에 마음을 버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진성여왕께 시무 10조 등 개혁안을 올렸지만 가타부타 대답이 없습니다.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려면 여러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귀공처럼 학식이 높은 분을 중용하지 않는 배경은 무엇입니까?

△골품제 때문입니다.

신라에서 6두품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저는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골품제의 폐쇄성을 잘 아시던 부친은 당으로 떠나는 저에게 '십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시로 살을 찌르며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6년만에 빈공과에 합격했습니다.

귀국해서 나라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골품제의 벽은 너무 높고 두터웠습니다.

-당나라 유학생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6두품은 신라에서 정치적 진출에 제약이 많습니다.

그래서 귀국을 거부하고 당에 입각하거나 불교나 도교에 탐닉하는 유학생들도 있습니다.

개방적인 당나라의 인재선발을 경험한 사람들이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요직을 얻지 못한 학자 중에 불만이 큰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방호족과 결탁해 신라타도에 나선 인물도 있습니다.

최승우는 견훤 밑에서 문서작성을 맡고 있습니다.

최언위는 송악의 호족 왕건의 스승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가 6두품을 버렸습니다.

6두품이 지방호족을 택하는 것을 배신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신라의 장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곳곳에서 호족들이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 호족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신라왕실에서 마음이 떠난 것이지요. 골품제에 가로막힌 6두품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흉년에 이제 백성들의 마음도 떠나고 있습니다.

개혁이 없는 한 신라는 망합니다.

한편 그는 요즘 소나무, 대나무를 벗삼아 시를 쓰거나 비문을 짓고 있다.

얼마 전에는 그 동안 써온 시를 한데 묶은 '계원필경'을 내놓기도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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