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대구의 앞산 순환도로는 눈을 인듯 새하얀 꽃들로 뒤덮인다.
이팝나무들이다.
나무 전체가 하얀꽃을 덮어쓴 것이 이밥(쌀밥)같다하여 이팝나무라 한다고도 하고, 입하(立夏)에 꽃이 핀다하여 입하목(立夏木)으로 부르다 이팝나무로 불리게 됐다고도 한다.
여하튼 꽃모양을 보면 꼭 하얀 쌀밥덩이가 소복소복 얹혀있는 것 같다.
묵은 곡식은 바닥나고, 햇보리는 아직 한참 먼 이맘때 춘궁기(春窮期)면 보이는 것마다 먹을 것으로 보였었나보다.
하기야 옛말에도 "무슨 설움 무슨 설움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다"고 했다.
산의 소나무 속껍질(송기)까지 벗겨먹어야 했으니 서민들에겐 보리 한 줌 넣고 끓인 멀건 나물죽이 오히려 호사스럽던 시절이었다.
배에선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고 머리는 팽글거려 허깨비라도 보일 판인데 애꿎게 아지랑이마저 눈앞을 어지럽히니 몽롱한 눈에 흐드러진 이팝꽃이 수북히 담긴 쌀밥처럼 먹음직스레 보였을 법도 하다.
이팝나무에 얽힌 슬픈 얘기들도 있다.
강화도 마이산근처 아령읍엔 아름드리 이팝나무들이 있다는데 예전 '아기사리'(아기무덤) 터라고 한다.
제대로 먹이지 못한 탓에 영양실조에 시달리다 뭔병인지도 모르고 죽은 어린아이들을 묻었던 곳. 아마도 그곳 늙은 이팝나무들은 저세상에서나마 흰 쌀밥 배불리 먹으라고 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며 심었던 나무일 것이다.
그런데 '밥'으로 인한 설움이 21세기에 들어선 요즘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얼마전 밥 한솥 지어놓고 짧은 생을 마감했던 15세 여중생 수경양의 애달픈 삶이 앞산 순환도로 길게 줄지은 이팝나무의 하얀 꽃무리에 오버랩된다.
객사한 아버지와 뇌종양 앓는 어머니, 칭얼대는 철부지 두 동생. 온 몸으로 가난과 맞섰던 소녀는 그예 "내게 미래가 있을까"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나래를 접고 말았다.
그 아이가 이생에서 마지막 남긴 것은 눈물로 지은 밥 한솥.
식생활 패턴의 서구화와 몸짱바람으로 밥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다이어트 전문가들이 "밥은 거르지 마시고…"라고 조언해도 밥보기를 원수보듯 한다.
한쪽에선 여전히 '밥' 때문에 삶을 접는 사람들이 있고.
5월 중순까지 이팝나무는 하얀 쌀밥 같은 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 나무들 옆을 지나칠 때마다 가슴언저리가 콕콕 찔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나마 이 사회에 희망이 있다할까.
'이팝나무가 초록 잎사귀 위에/ 하얀 쌀밥을 파실파실 피워 날아갈 듯 깔아 놓았다.
/ 하얀 쌀밥이 바람에 날아간다…(중략) 이팝나무 위, 둥둥 떠가는 구름을 타고/ 제사밥처럼/ 소복소복 담겨 부풀어오르는 것이 어미들 가슴 속에/ 기어코 이팝나무꽃을 불질러놓았다'.
(박정남 시 '이팝나무 길을 가다'중)
전경옥 편집부국장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