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대에 따라 좋은 제도의 기준 다르다"

통일신라가 935년 멸망했다.

천년만년 영속할 것 같았던 신라는 왜 무너졌는가.

어느 국가나 일어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진다.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지만 국가의 몰락은 오래 전부터 예견되기 마련이다.

국민들 중에도 이제는 망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당나라가 그랬고, 통일신라가 그랬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던 경주인들이 '나무망국 찰리나제'를 외우기 시작했을 때 신라는 이미 망했다.

권력투쟁, 부패, 이념갈등, 군사적.봉건적 부조리, 강대국의 침략 등 국가의 멸망 원인은 다양하다.

각각의 요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국가 멸망에 기여하기 마련이다.

통일 신라의 패망과 관련, 서양 사회학자 올슨의 '집단행동의 논리'가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올슨은 한 국가의 쇠락 원인을 이익집단에서 찾는다.

조직화가 자유로울 경우 이익집단이 발생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 확대 재생산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들 이익집단의 요구는 사회체제를 경직화한다는 것이다.

경직된 체제는 원활한 순환을 저해하고,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학설이다.

통일신라는 올슨의 지적과 달리 조직의 자유화가 부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직의 이익추구와 경직화라는 결과는 같았다.

신라는 국가 형성기에 귀족세력을 편제하기 위해 골품제를 제정했다.

골품제는 성골, 진골과 6두품부터 1두품까지 모두 8개의 신분계급으로 구성되었다.

골품제에 따라 성골.진골은 권력을 독점하고 6두품의 요직 진출을 차단했다.

6두품은 결국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이 됐다.

지방의 귀족들 역시 세력을 확장해 왕권을 넘보거나 사병을 두는 등 자신들의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해나갔다.

귀족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농민을 수탈했다.

이에 농민들 역시 신라에 반감을 품고 저항군으로 변해갔다.

신라는 골품제를 바탕으로 지방 세력의 힘을 꺾고, 이를 모아 고구려와 백제에 맞서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적어도 한반도 동남쪽의 소국 신라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고, 삼국통일을 이뤄 낼 때까지 골품제가 기여한 바는 크다.

그러나 신라 성장의 동력이 됐던 골품제가 신라 패망의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신라가 용도 폐기했어야 할 구제도를 고집해 결국 멸망의 길을 걷는 것과 대조적으로 떠오르는 북쪽의 강자 왕건이 골품제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곱씹어 볼만하다.

잘못된 구습이 국가를 쇠락케하는 반면, 새 국가는 구습타파를 외치며 등장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가르쳐 주는 셈이다.

그러나 신라가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호족 무마 차원에서 골품제를 도입했듯, 왕건은 통일국가를 완성하기 위해 혼인정책으로 호족을 달랬다.

후대의 이야기지만 이같은 왕건의 혼인 정책은 960년 광종대에 이르러 '피의 숙청'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왕권강화 작업의 필요성을 남겼다.

호족세력의 확대는 결국 신라처럼 패망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광종은 호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로 과거제를 도입했다.

특정 계층에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나라든 구조와 규범, 특징,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요구가 있다.

그 요구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제도나 사상 역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한다.

같은 제도라도 국가 발전에 유익한 시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장애가 되는 때가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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