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버지-(1)지긋지긋 축처진 어깨 이제 기대고 싶건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아버지의 그늘' 부분

얼마전 사이버 공간에서는 '아버지는 누구인가'란 글이 화제를 모았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 시대 아버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는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힌 중년들도 적지 않았다.

이 글에서 아버지는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는 말을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는 닮고 싶은 존재일까, 닮고 싶지 않는 대상일까. 안타깝지만 닮고 싶은 아버지를 가진 자식들보다 그렇지 못한 자식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으로 땀에 절어 항상 퀘퀘한 냄새가 나고, 꾀죄죄한 옷차림에 주름진 얼굴, 굳은 살이 박인 투박한 손…. 초라한 모습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닮고 싶은 존재이기보단 닮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하물며 아버지가 주색에 빠져 있거나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다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오히려 '반면교사'일 뿐이다.

신경림 시인의 '아버지의 그늘'에 나오는 소년도 '닮고 싶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자랐다.

산골의 작은 마을에 살던 소년은 주색에 빠진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그 아버지에 지긋지긋함과 한심함,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소년은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란 좌우명을 갖고 아버지와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몸부림쳤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다.

그렇게 장성한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은 인생을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나이를 훌쩍 넘긴 초로의 아들은 거울을 보다 거기에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토록 도망치려 애썼던 아버지의 모습이 거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가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아들은 뼈저린 자괴감에 빠져든다.

또 늙어버린 자신이 문득 아버지의 나약한 모습을 닮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나아가 아버지의 겉모습안에 감춰졌던 가장의 고독, 삶의 무게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내면,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서야 알아챈다.

끝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신 시인의 7번째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 비평사 펴냄)에 실린 '아버지의 그늘'은 시인의 자화상이다.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온 아버지에게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여주던 어머니도,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던 할머니도,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도 이 세상을 떠났지만 시인인 아들의 얼굴에 아버지는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시인의 가슴에는 회한(悔恨)만 쌓였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식들에게 닮고 싶지 않은 대상으로 추락한 아버지들이 너무 많은 요즈음이다.

내 아이의 모습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발견하듯, 아버지의 모습은 먼 훗날 우리들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름다운 고리로 엮이고 엮인 우리 자신의 삶이자 역사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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